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46
제46화
솔리드녹스 본가.
용머리 마탑 최상층에선 눈앞을 검은 천으로 가린 한 마법사가 책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는 손끝에 느껴지는 잉크 자국을 더듬으며 글자를 읽었다.
그러다 창밖으로 서신을 매단 비둘기 하나가 날아들었다.
마법사는 손바닥을 내밀었고 비둘기가 그 위로 올랐다.
“뭐지. 말해.”
매여 있는 서신을 풀지는 않았으나, 비둘기가 구구구 소리를 냈고 빅스터는 용케도 비둘기의 말을 알아들었다.
긴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모든 소식을 들은 그는 입가를 문질렀다.
“흐음, 그렇다고?”
흥미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손아귀를 쥐어서 비둘기를 죽이면서 동시에 불태울 정도로 흥미로웠다.
손아귀에서 재를 털며 마법사는 책상에 기대놨던 거대한 지팡이를 짚어 몸을 일으켰다.
“개(開).”
그의 말에 공간이 갈라지고 저편의 세상이 보였다.
마법사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디뎌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갔다.
그곳은 메마른 요새였다.
* * *
유리와 나이트워커 기사들은 요새에 있던 이들을 모두 무장해제 시켰다.
병사들은 한쪽으로 몰아 기사단이, 야누는 포박해서 블레이크와 카이가 곁에 서서 감시했다.
참고로 야누에겐 임시로 손목을 꿰맨 뒤 성력이 담긴 초콜릿을 잔뜩 먹였다.
전직 성녀의 성력이 담긴 초콜릿이라 절단 난 손목쯤은 쉽게 치료했다.
지금도 옆에서 계속 병사들이 초콜릿을 먹였으며, 야누는 살겠다고 닥치는 대로 초콜릿을 삼켰다.
그리고, 기다렸다.
‘이 사태가 났으니 분명 솔리드녹스 본가에서 누군가가 오겠지.’
한 사람이 될지, 군단이 될지는 몰라도. 일단 기다려서 그들을 맞아야 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정비를 하면서 기다리자, 예상했던 후보 중 최악이 찾아왔다.
“손님이 많군요. 그것도 불청객이.”
“……!”
갑작스레 공간을 찢고 의문의 마법사가 걸어 나왔다. 화려한 로브 차림에다 형형색색의 보석이 박힌 거대한 지팡이를 든 마법사는 예고도 없이 요새 가운데서 등장했다.
마법사가 요새의 땅에 첫 발을 내딛는 그 순간.
쿵!
대기가 온몸을 짓누른다. 시야가 아찔해지고 팔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으읏!”
“어억!”
피아 구분 없이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몇몇은 호흡조차 하지 못해서 바닥에 쓰러져서 가슴이나 목을 부여잡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이 등장만으로도 이곳을 지배했다.
그나마 유리가 뒤늦게 검을 뽑았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뒤이어 블레이크나 카이도 검을 뽑았지만, 그 카이조차 간신히 버티는 게 전부였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마법사는…… 위험하다!
유리는 그 와중에 그를 찬찬히 뜯어 살폈다.
‘눈을 가린 마법사…… 빅스터군!’
빅스터 린테어 솔리드녹스.
솔리드녹스 가의 차남이자 ‘가려진 마도사’라 불리는 자.
약관의 나이에 10서클 경지를 넘어선, 그야말로 괴물이라 불리는 그는 특이하게도 눈을 가리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눈으로 마나를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는데, 설정집에 따르면 어렸을 적 그 능력이 과해서 스스로 눈알을 뽑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앞을 못 보는 건 아니다.
마나를 감지하고 세상 만물을 판별할 수 있어서 눈 없이도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했다.
‘젠장, 벌써 만날 인물이 아니었는데!’
요새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대강 직책 높은 인물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빅스터는 그 중에서 최악의 후보로 꼽혔다.
그는 야누보다 호전적인 성격이라 대화 자체가 성립되질 않았다.
원작에서 카이도 몇 안 되게 다루지 못했던 인물이어서 되도록 먼 훗날에 마주치길 바랐건만.
“아, 이런. 죄송하군요. 제가 오랫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지라 힘 조절이…….”
쿠우우우웅!!!
힘을 뺄 줄 알았더니 빅스터는 되려 더 강한 마나를 내뿜었다.
이번엔 유리마저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자자, 다들 일어서시고.”
모두가 제 발아래를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야 빅스터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힘을 거뒀다.
잠깐이었지만 10년 치는 늙은 기분이 들었다.
유리는 칼을 지지대 삼아 일어섰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어떻게든 힘을 줘서 약한 모습을 감췄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유리를 보곤 빅스터가 지긋이 웃었다.
“이거이거, 대단한 분이 계시는군요. 아직 작지만 껍데기가 큰. 지금은 속이 비었지만, 곧 무르익을 것 같습니다.”
“등장이 참…… 큭, 화려하군, 빅스터.”
“화려하다니. 진짜 화려한 걸 보여드릴까요?”
“아니, 사양하지. 더 이상 분쟁은 원치 않아.”
“벌써 한바탕 해놓고 저만 안 되는 겁니까. 여긴 제 땅인데요.”
이래서 빅스터가 최악의 만남이었다고 하는 거다.
그는 뭐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겉으로 나오는 친절한 말투는 속임수 같아도 속임수조차 되지 못했다. 그 정도로 노골적인 기세였고, 그 기세를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다.
‘알아, 아는데…….’
마음처럼 될지 모르겠다.
유리는 허리를 최대한 곧게 펴고 검을 집어넣어서 공격 의사가 없다는 걸 알렸다.
여기서부턴 무력이 아니라 진짜 정치가 필요했다.
다행히 빅스터도 무작정 죽이고픈 마음은 없었다.
쉽게 죽이기엔 눈앞의 소년이 너무나도 흥미로웠다.
‘내 마나를 버티다니. 가주님 말고는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말이야.’
물론 빅스터에 비하면 한참 약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게 남달랐다.
용인과 다른 외모면서 더 용인답달까.
아니, 용인이라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사람이 아닌 용(龍) 그 자체.
드래곤이 실존한다면 유리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빅스터는 마탑에서 출발했을 때보다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나저나 성함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딱 보니 나이트워커의 한 자리 하시는 분 같은데. 처음 보는 마나라서요.”
“유리 덴 나이트워커다. 이자벨 님의 호위대 대장으로 이곳에 왔다.”
“흐음, 들어본 거 같은데……. 모르겠군요. 뭐, 몰라도 되겠죠? 이 사태를 만들었으니 알아봤자 뭐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래야 했던 명분이 있어.”
유리는 빅스터에게 힘껏 망명 허가서가 든 봉투를 던졌다.
그런데 봉투가 그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불타서 사라졌다.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블레이크가 “무슨 짓을!”이라며 뛰쳐나오려 하다가 유리의 팔에 막혔다.
대신 유리가 물었다.
“가문의 공식 서류를 이렇게 태워도 되는 건가?”
“무슨 내용인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모르고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그리 말한 빅스터는 이자벨 쪽으로 흘깃 시선을 돌렸다.
겁을 먹은 이자벨은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
‘네가 기어코 나이트워커를 선택했다는 말이지.’
그런 그녀가 한심하기만 했다. 하필이면 나이트워커라니. 이는 솔리드녹스의 수치이자 오명으로 남을 사건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자벨이 유리의 등 뒤에 숨었다는 걸 알았다.
‘나이트워커가 아니라 그 자의 뒤에 숨겠다는 건가?’
아아, 그렇군. 빅스터는 눈을 내리감아 몰래 웃었다.
한심하긴 해도 자존심 하나는 다이아몬드 같았던 이자벨이 본능적으로 의지할 정도의 남자라.
그는 표정을 지우고 다시 유리를 담았다.
“유리 님, 마음 같아선 당신들을 모두 죽이고 싶지만. 애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번져봤자 뭐가 좋겠나요.”
“……뭐?”
“못 알아들으십니까? 필요 없으니 이자벨을 가져가라는 말입니다.”
빅스터는 그렇게 말했다.
쓰레기 취급하듯.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없어도 있느니만 못하다는 듯.
“투쟁을 포기한 자는 용인이 아닙니다. 가진 게 많아도 쓸모없으면 버려야죠. 가져다 썩혀봤자 냄새만 납니다.”
누가 듣더라도 이자벨을 향한 소리였다. 겁을 먹었던 그녀는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떨궜다.
그의 말이 백 번, 천 번 옳았다.
용인은 투쟁으로 경쟁하고 살아남아 강함을 증명한다. 그곳으로부터 도망쳤다면 패배자나 마찬가지.
유리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물었다.
“불의 영혼에 미련이 없는 건가?”
“솔리드녹스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그깟 힘에 의존했으면 지금의 솔리드녹스였을까요. 아! 혹시 할 수 있으면 폐기 처분해주시겠습니까? 그게 좋긴 하겠는데요.”
“너……!”
대놓고 물건 취급을 하니 유리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르고 싶었다.
아무리 용인 가문이라 해도 혈육을 저딴 식으로……!
그러나 티르빙이 한사코 말렸다.
[참아, 참아.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싸워서 어쩌려고? 너밖에 더 죽어?]‘하지만……!’
[네가 나서겠다면 강제로 네 육체를 빼앗는 수밖에 없어.]티르빙이 가지고 있는 패널티가 사라졌다지만, 언제든 저주를 발동시킬 수 있다.
티르빙이 제 주인을 잡아먹는 저주를 말이다. 그 정도로 빅스터가 위험했다.
유리의 속사정을 모르는 빅스터는 이번엔 야누에게 고개를 돌렸다.
“싫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 손으로 죽여야 할 사람은 죽여야 해서요.”
그리 말하곤 천천히 한 발을 들어 내딛자 자리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 그는 야누 앞에 있었다.
‘마나를 쓰지 않고 순간이동을 했다고?’
순간이동 마법은 항상 흔적을 남겨서 추격당하기 쉬운 마법으로 손꼽혔다.
헌데 방금 빅스터는 마나를 쓴 기척이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야누에게 다다른 그.
야누를 감시하던 병사들이 어떻게든 검을 휘두르려 하자 더 강한 기운이 그들을 짓눌렀다.
덩달아 야누도 얼굴이 바닥에 붙으면서 먹고 있던 초콜릿이 죄다 튀어나왔다.
“커, 컥! 비, 빅스터. 나, 나한테 뭐, 뭐하는 짓이냐!”
“뭐하는 짓이긴요. 불의 영혼 계승을 책임지겠다고 하셨던 건 숙부님이시니, 말씀하신 것처럼 책임을 지시라는 겁니다.”
“나, 난 너의 숙부이자 상관이다! 가문의 자자자, 장로라고!”
“약자 주제에 별빛가지 같은 신물에 의존했으면서 장로라니. 더 이상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시길. 제가 다 창피합니다.”
“미,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구차하게 더럽히지 말라니까요.”
“안 돼! 아아, 아, 안 돼!”
“멸(滅).”
파삭!
빅스터의 읊조림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야누가 깔끔하게 사라지더니 재가 되어 날렸다.
어디가 잘리거나 터진 게 아니라. 진짜 사라진 것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법이 펼쳐지자 모두가 입도 뻥긋 못했다.
아까 봉투를 태우면서 영창을 안한 것도 놀라운데, 이번엔 주문을 외웠지만 마법의 위력이 짧은 주문에 비해 파괴적이었다.
그런 마법을 본 적은 없어도, 유리는 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용언……마법!’
솔리드녹스가 나이트워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용인 가문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솔리드녹스에는 아직까지도 용언 마법이 명맥을 이어왔으며, 그 때문에 마법으로는 솔리드녹스를 따라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야누가 허무하게 죽자 빅스터는 아쉬운 한숨을 지었다.
“하아, 가주님께는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벌써 골머리가 아프군요. 그러니 유리 님. 오늘은 이쯤 해서 마무리 짓고 돌아가시고, 서로 공문을 잘 주고받았으면 합니다. 그래야 각자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시겠죠?”
“완전히 마음대로군.”
“그럼 다른 방도가 있습니까? 음~ 없을 텐데……. 안 그런가요?”
멋대로 묻고 멋대로 결론지은 빅스터는 다시금 공간을 찢어 저편의 세상을 열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이자벨을 향해 한 마디 남겼다.
“잘 가. 그리고 지금처럼 잘 숨어서 눈에 띄지 마. 그땐 오늘의 충동을 참지 않겠어.”
드드드드득!
빅스터가 공간 너머로 사라지고, 지진이 일어나듯 땅을 흔들며 찢어졌던 공간이 닫혔다.
그렇게 이자벨 호위 임무는 끝이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