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48
제48화
가문으로 돌아오고 나서 유리는 하루 종일 대련장에서만 머물렀다. 주변에선 휴식을 권장했지만, 딱히 무언가를 크게 하고 있진 않았다.
유리는 연무장 한가운데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대부분 시간을 명상에만 쏟았다.
‘기초는 충분해졌어. 하지만 역시 마나가 문제야.’
빅스터를 만나고 나서 유리는 마나 부족을 절실히 느꼈다.
뭐가 되었든 진짜 실전으로 돌입하면, 나중에 악마들과 싸우면 기초가 아닌 마나가 곁들여진 전투를 해야만 한다.
빅스터 같은 적들이 넘쳐날 것이며, 그들 다수를 한 번에 상대해야 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마나를 키워야 해.’
마나를 담는 그릇인 영혼의 크기는 분명 남들에 비해 컸지만, 그 속은 텅텅 빈 상태였다.
지금까지는 마나 전도성이 좋은 티르빙과 드래곤 하트가 만드는 순도 높은 마나 덕에 어찌해서 버텼을 뿐.
보다 높은 마나를 가진 이들을 상대로는 턱도 없다는 걸 이번 기회에 느꼈다.
다행히도 유리에겐 다른 의미의 기회가 찾아왔다.
[꼬맹아, 시간 됐어.]“벌써? 후우, 가자.”
명상이 끝나고 나면 항상 똑같은 장소로 향했다. 유리와 샤를린느를 위해 지어진 별채의 정원이었다.
정원 한구석에는 메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심겨 있었고, 유리는 쭈그리고 앉아 가지를 살폈다.
이파리는커녕 말라비틀어진 가지는 생명력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티르빙은 실망 가득한 어투로 따졌다.
[이거 크긴 크는 거니? 죽은 거 아냐?]“나도 몰라. 설정집이 그렇다고 하니까 믿는 거지.”
[이 언니는 그냥 나뭇가지를 바닥에 꽂은 거랑 뭐가 다른 건가 싶다.]나뭇가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별빛나무였다.
유리는 야누가 죽으면서 남긴 별빛가지를 챙겼다. 부러지는 바람에 빛을 잃고 평범한 나뭇가지가 되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그 덕에 쉽게 나이트워커로 가져왔다.
“설정에선 이놈만큼 마나 순도가 좋은 과실이 없다고 했어. 어떻게든 키워 봐야지.”
[만약 안 자라면?]“어차피 별빛가지는 뿌리를 내리기까지 오래 걸려. 그 동안 다른 수단을 찾아봐야지. 어쨌든 그때까지 정성을 다해서 키우는 수밖에.”
[물 주는 정성이 전부면서.]“그야…… 쩝.”
누가 보면 식물의 탄생 과정을 모르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설정집에 나오는 별빛가지는 특이하게도 식물로서의 디테일이 기재되어 있었다.
특히 삽목, 다른 말로 꺾꽂이가 가능했다.
삽목은 식물의 줄기를 잘라서 땅에 심는 일종의 재배법으로, 이것이 가능한 식물이 따로 있다.
대표적으로 장미나 산세베리아 같은 식물이 그러했으며, 별빛가지도 가능했다.
그래서 무작정 나뭇가지를 바닥에 꽂고 키웠으나.
도저히 자랄 기미가 안 보인다.
“토양도 좋은 걸로 바꿨고, 물도 잘 주고. 뭐가 문제지. 해가 안 들어서 그런가?”
[볕 좋은 정원에 심어놓고 해가 안 든다는 건 뭔 소리니.]“……그냥 답답해서 해본 소리야.”
어쨌든 삽목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이렇게 해서 자라는 건 분명하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정성껏 물을 주고 비료를 주는 수밖에.
어지간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별빛나무는 엄연히 솔리드녹스의 재산이라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결국 도서관에라도 가야 하나.‘
식물 관련 지식을 쌓지 못해 아쉬워하며 유리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우연히 지켜본 한 사람이 있었다.
* * *
샤를린느는 최근 들어서 가문 내 사용인들이나 시설의 관리를 맡으면서 바쁘게 보냈다.
보통 이런 업무는 가문의 안주인이 맡아야 했으나, 안주인 자리가 공백인 관계로 그간 빌과 겔런이 각자 관리했었다.
그러나 가문의 일원이 된 이상 샤를린느도 제 할 몫을 해야 한다며 벤헬링턴이 그녀에게 예산 처리 권한을 줬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는 덕에 아들 얼굴조차 보기 힘들던 중.
“유리?”
2층 복도를 지나던 샤를린느는 정원에 있는 유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공식 임무를 마치고 온 뒤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요 근래 많이 다치고 힘든 일만 했다고 해서 걱정이 많았으나, 샤를린느도 워낙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다.
‘간만에 같이 식사라도 해야겠어. ……응?’
샤를린느는 뒤늦게 유리가 그냥 정원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알고 보니 화단에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샤를린느가 뒤따르던 릴림에게 물었다.
“릴림, 유리가 요즘 정원을 가꿨었니?”
“첫 임무를 다녀오시고, 계속 저러셔요. 뭔지 몰라도 정원사들에겐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고요. 저도, 안 된대요.”
“음.”
유리가 갑자기 식물이라.
그에게 그런 취미가 아예 없진 않지만, 임무에서 돌아오자마자 저러고 있다니 호기심이 동했다.
‘뭔지 볼까.’
샤를린느는 아들 얼굴도 볼 겸 급히 정원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자리에 도착했을 땐 유리가 사라진 뒤였다.
대신 그가 보던 자리에는 마른 가지 하나가 물이 흠뻑 젖은 땅 위로 솟아있었다.
릴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가까이선 처음 봐요. 근데, 죽었, 네요.”
말이 좋아 죽은 거지.
실상 나뭇가지를 바닥에 꽂아놓고 나무가 자란다는, 어린 애들이나 할 법한 발상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유리가 했으니까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릴림에겐 죽은 나뭇가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샤를린느는 달랐다.
‘죽어가고 있지만, 아직 살아있어.’
가문으로 들어오기 전, 샤를리느는 작은 화원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가끔씩 유리가 샤를린느를 도우러 왔었는데,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삽목한 게 분명했다.
다만, 제대로 된 삽목이 아니었다. 대충 식물을 잘라서 심어놓았으니 제대로 자랄 리가.
‘이런 건 엄마한테 부탁해도 되는데…….’
샤를린느는 자신에게 도와달라는 부탁도 안 한 아들이 조금은 섭섭했다.
가끔 의존해도 좋은데.
그러나 서로 너무 바쁜 탓에 부탁조차 어려웠으리라.
아들이 뭘 키우는지 몰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진 샤를린느는 유리가 앉았던 자리에 똑같이 쭈그려 앉았다.
“처음 보는 품종이네.”
처음엔 가지를 매만지면서 살폈다.
마치 커피나무랑 올리브나무, 두 가지를 섞어놓은 거 같았다.
이어서 손을 뻗어 땅과 나뭇가지를 통째로 들어냈다.
지켜보던 릴림이 난색을 표했다.
“저, 마님. 그런 일은 정원사들한테―”
“괜찮단다.”
드러낸 흙을 옆에 놓고 나뭇가지를 뽑아내자, 역시 아직 뿌리가 자라지 못했다.
하지만 잘린 단면을 만지니 물기가 축축했다. 유리가 줬던 물은 흙에서 사라졌다.
가지 끝을 살짝 쥐자 탄성 있게 휘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끝에 가까이 댔다.
계속되는 이상 행동에 릴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시는 걸까?’
사실 샤를린느가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갑자기 꽃밭 하나가 망가졌다가 샤를린느가 발견해서 돌봐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샤를린느가 돌보고 일주일도 안 되어서 꽃들이 되살아났다.
당시만 하더라도 샤를린느가 화원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서 뭔가 했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오늘도 식물을 대하는 샤를린느의 모습을 직접 보고 있으니 어딘가 남달랐다.
“얜 아직 살 마음이 있나 보네.”
“예?”
“릴림, 칼 좀.”
“아, 네. 잠시만, 요.”
급하게 릴림은 가지고 다니던 페이퍼 나이프를 꺼냈다.
그걸 받아든 샤를린느는 잘린 단면을 경사지게 자르고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았다.
그리곤 옆에 있던 다른 화단으로 옮겨 심었다. 아까 심었던 화단과 달리 모래로 이뤄진 곳이었다.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땅을 파고 가지를 심은 샤를린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됐어, 이제.”
“이게, 끝이에요?”
“식물은 우리 생각보다 강하단다. 이렇게만 해도 자랄 거야. 오히려 너무 많은 정성을 쏟아선 안 돼.”
“으음, 그런가요. 전, 모르겠어 요.”
“보면 알 거야.”
여유로워하는 샤를린느를 보며 릴림은 갸우뚱하면서도 아무래도 보고할 이야기가 더 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나무가 정말 제대로 자란다면, 절대 우연이 아닐 테니까.
* * *
다음날.
유리는 기겁할 광경을 목격했다.
“야, 티르빙, 저거…….”
[어제는 분명 변화가 없었잖아?]아침 샤워를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가려던 유리는 창밖에 자란 거대한 나무를 보고 식겁했다.
분명 어제 마른 가지였던 별빛나무가 진짜로 나무로 자라 있었다.
그것도 정원 전체를 가릴 정도로 엄청난 거목(巨木)으로!
정원에는 벌써 구경꾼들이 모여서 나무 주변을 둘러쌌다.
‘몰래 키우려고 했는데, 망했네.’
별빛나무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솔리드녹스에서 난리 칠 게 뻔했다.
그래서 몰래 천천히 키우려고 했건만.
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을 내쉬면서 서둘러 정원으로 나갔다.
가까이서 본 별빛나무는 중심이 되는 기둥과 이파리까지 평범했으며, 가지의 끝자락만이 은하수를 담은 듯한 반투명한 흰색을 띠었다.
나무 아래로 들어서니 빛 조각이 눈송이처럼 떨어진다.
“신기하긴…… 하네.”
[난 눈만 아파서 싫다. 저 성력도 좀…….]아직도 티르빙은 별빛나무가 내뿜는 성력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유리는 더더욱 별빛나무가 필요했다. 성력이 약점으로 잡힌 이상 더 큰 내성을 키워야만 했다.
물론 대량의 마나는 덤.
[근데 뿌리 내리기까지 오래 걸린다며.]‘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음, 누가 영양제라도 줬나?’
[영양제로 하루아침에 1000년 묵은 거목처럼 자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 있는 거 아니니?]‘뭐, 그렇네……. 어쨌든 원인은 몰라도 어떻게든 자랐으니 이제 과실만 찾자.’
별빛나무의 핵심은 나뭇가지나 이파리에도 있지만, 결국 그 과실이 중요했다.
한 그루에 하나밖에 자라지 않는 과실은 하나만 다 먹어도 한 서클을 너끈히 넘길 수 있는 마나량을 가졌다.
이 정도 성체가 되었다면 분명 과실이 있을 터.
“어! 야! 저기저기!”
그때 구경꾼들 사이에서 한 목소리가 외쳤다.
고개를 돌리니 제몬이 있었고, 옆에는 타나토도 함께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유리가 머무는 별채에 있는 것도 별론데, 하필 제몬이 가리킨 곳에는 유리가 찾던 과실이 있었다.
언뜻 봐선 과일이 아니라 완벽한 구체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았지만, 은하수를 닮은 가지처럼 속이 불투명한 구체는 누가 봐도 이 나무의 과일이라고 말해줬다.
제몬이 그걸 보고 모두 들으라는 듯 더 크게 외쳤다.
“과일이잖아! 저거 분명 대단한 과일일 거야! 그치? 타나토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뭔지도 모르는 나무의 과일이 뭐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궁금하지 않아?”
“음, 뭐.”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해도 타나토 또한 과일에서 전혀 눈을 떼지 못했다.
과실은 별빛나무가 옆으로 뻗으면서 자란 가장 길고 높은 가지에 매달렸다.
바람만 불어도 떨어질 듯한 위치에 제몬은 몸소 바람을 만들어냈다.
“내가 떨어뜨려 볼래. 윈드 붐!”
손아귀에 바람에 덩어리로 모였다가 과실을 향해 힘껏 던지자 순간적인 강풍이 풀었다.
모든 가지가 흔들리며 나뭇잎이 떨어지고, 구경꾼들마저 몸이 휘청거렸다. 힘이 없는 사용인들 몇몇은 넘어지기까지 했다.
정작 과일은 바람이 그칠 때까지 안 떨어졌다.
제 마법에도 멀쩡한 과일에 제몬이 인상을 썼다.
“뭔데, 저거? 어우 씨, 괜히 열 받네.”
“이번엔 내가 해볼게.”
다음 타자로 타나토가 검을 뽑고 나섰더니 아무렇지 않게 검에 마나를 모았다.
“저런 미친!”
순간 유리는 더한 욕을 뱉으려다가 참으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별빛나무는 워낙 섬세해서 작은 상처에도 금방 죽는다. 애초에 어지간한 나무들이 다 그렇지.
하물며 타나토 같은 놈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나무를 두 동강 내고도 남으리라.
끔찍한 상상이 떠오르자 유리는 티르빙이라도 꺼낼 준비를 마쳤다.
그 순간.
“그만두렴.”
나긋한 말투와 함께 타나토 앞에 샤를린느가 끼어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