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52
제52화
“그리고 이자벨, 너도 앞으로 나와라.”
“……?”
유리는 앞으로 나아가려 하다가 이자벨을 뒤돌아봤다. 그녀도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일단 시키는 대로 두 사람 모두 다이올드 앞에 섰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명령서를 개껌 던지듯 유리에게 던졌다.
“임무 명령서다. 너희 둘은 오늘 열외다.”
“네? 하지만……!”
부욱!
이자벨이 따지기도 전에 유리는 임무서에 붙은 봉인지를 떼고 펼쳤다.
옆에서 흘깃 훔쳐보던 이자벨은 기가 차서 물었다.
“대민 지원을 나가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무슨 말도 안 되는……!
어지간한 대민 지원은 자연재해 같은 위급한 상황이 아니고선 일반 사병들이 나갔다.
이건 누가 보더라도 억지스러운 차출이었다.
“그럼 훈련은 어떻게 합니까?”
“훈련?”
이자벨이 재차 묻자 다이올드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짜증을 토했다.
“지금 훈련이 중요한가? 영지민들이 직접 요청한 의뢰다. 영지를 위해 봉사할 줄 안다면 기꺼이 나서야 하는 것이 기사된 도리이거늘. 혹시 불만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이자벨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 입을 다물었다.
대민 지원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 이런 일쯤은 백 번, 천 번도 가능했다.
다만, 열외가 아닌 배제라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기에 뒷맛이 찝찝했다.
정작 유리는 평안하게 임무 내용을 읽고 명령서를 챙겼다.
‘뭐, 이럴 줄 알았지.’
자유의 관에 들어온 이상 다이올드의 텃세쯤은 예상하다 못해 기대했다.
과연 괴롭히면 어떻게 괴롭힐지.
하지만 생각보다 유치한 술수에 솔직히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애들 장난이네. 예전에 블랙 드래곤 아저씨였으면 과일 같은 거에다가 11서클 함정 마법 설치하고 그랬는데.]‘안 그래도 별빛나무 과실을 먹은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냐.’
[꺄핫~ 우리 꼬맹이 쫄았니?]‘11서클이면 당연히 쫄지.’
애초에 11서클 마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있다면, 어후. 상상도 싫다.
아무튼 유리는 임무서를 챙기고 경례를 올렸다.
“밤의 영광을.”
“흥.”
뻔뻔하기 짝이 없는 유리의 경례에 다이올드는 무시로 일변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연무장을 빠져 나왔다.
가는 길에 안쓰러워하면서도 동정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몇몇한테선 “꼴좋네.” 같은 비아냥도 흘러나왔다.
가문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아무 말이 없다가 문을 나서자마자 이자벨이 나오자마자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건 부당하다!”
“부당해도 별 수 있어?”
“유리는 화가 나지도 않나?”
“앞으로 수도 없이 겪을 일이야. 벌써 화내봤자 화병만 도져. 그런 것보다 오히려 난 이자벨한테 미안한걸.”
“나는 괜찮다. 지식의 관에 있을 때랑 다를 게 없으니.”
“그건 그것대로 별로네.”
“…….”
솔직히 이자벨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나이트워커에 남기로 한 건 오로지 유리 때문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윈 진즉에 각오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유리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비록 서자이긴 해도 첫 임무를 잘 마쳤으며 티르빙의 주인이기도 하다.
가문에선 둘도 없을 인재이거늘. 그놈의 파벌 싸움이 뭐라고, 내몰린 유리를 보니 괜히 그녀의 속이 쓰렸다.
하지만 이자벨은 한숨 한 번으로 울분을 애써 삭혔다.
당사자인 유리 본인이 참고 있지 않은가.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이라니……. 나보다 더 억울할 거야.’
솔리드녹스에서 없는 존재 취급을 받아봤던 이자벨이었다. 그 고통과 슬픔의 크기는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았다.
이자벨은 구태여 더 이상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후우, 그럼 뭐부터 해야지?”
“우선…… 밀 농장 일을 도우라네.”
임무서를 다시 펼쳐서 두 번째 장으로 넘기니 영지민들이 요청한 의뢰 리스트가 나왔다.
마치 모든 의뢰를 죄다 모은 것처럼 종이가 빼곡했다.
각 항목엔 의뢰인 이름과 가야 할 장소가 적혀 있었다.
그 첫 번째인 밀 농장.
유리와 이자벨은 밀밭이 깔린 언덕 아래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의뢰인이 있는 거대한 창고에 도착하자 여러 농부들이 낱알을 턴 지푸라기 더미를 모으고 묶는 작업 중이었다.
유리가 창고로 들어서자 감독관이 이방인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았다.
그는 허겁지겁 둘에게 뛰어왔다.
“아이구, 기사 나으리. 정말로 여기까지 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옆에 있던 이자벨이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속삭였다.
“그대를 몰라보는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영지민들한테 얼굴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그냥 넘어가.”
계속 말했었듯 유리는 생도 신분이다.
비록 임무를 맡으면 그 책임은 가문 혈통인 유리가 지게 되겠지만, 괜히 신분을 밝혔다간 농부들을 위축시켜서 제대로 된 의뢰를 못 들을 거 같았다.
유리가 나서서 감독관과 대화를 나눴다.
“우리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들었다.”
“언덕 제일 꼭대기에 있는 마차를 가져와야 합니다. 짐을 실었더니 바닥이 진흙이라 오질 못하고 있어요.”
그제부터 비가 많이 오긴 했다. 유리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도 흙바닥이 질펀해서 마차가 못 다녔다.
이후 유리는 관리인의 안내를 따라 언덕 너머에 있던 마차를 끌고 왔다.
장정 열댓이 붙어도 움직이지 않던 마차가 유리와 이자벨이 가세한 것만으로 쉽게 언덕을 내려왔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진짜로 감사드려요, 나으리!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몇 가지 일을 더 돕고 나오는 길에 농부들 모두가 나와서 인사를 해줬다.
그렇게 첫 번째 임무는 끝났고.
유리는 리스트를 읊었다.
“다음은 목공소네.”
목공소에선 질이 좋지만, 너무 큰 나무가 있어서 이를 운반하고 잘라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이번 의뢰는 오전이 다 지나서야 끝났다.
이후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20번째 의뢰까지 해결하니 오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자벨은 오늘을 포함해서 며칠 정도 이런 나날들이 이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다이올드는 무려 2주 내내 두 사람을 훈련에서 열외시켰다.
* * *
2주하고도 3일이 꼬박 지났다.
이제는 익숙해진 대민 지원 임무에 유리와 이자벨은 여유마저 생겨서 잠시나마 휴식 시간을 가졌다.
잠시 광장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는 이자벨에게 유리는 가죽 수통을 건네줬다.
축 처진 손이 수통을 받아 벌컥 들이켰다.
“후아, 고맙다.”
“힘들면 오늘은 일찍 돌아갈까?”
“오늘 할 일은 오늘 다해야지. 안 하면 부기사단장님이 가만히 안 계실 거다.”
“뭐, 그것도 그렇긴 한데. 억지로 무리할 필요는 없어.”
“그대는 지치지 않나?”
“당연히 힘들지.”
말과는 달리 유리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이자벨 눈에 비친 유리도 땀에 흠뻑 젖었으나 호흡이 골랐고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눈빛에는 생기가 돌아서 당장이라도 더 일할 기세였다.
‘2주 동안 계속 일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지?’
나름 마나까지 운용하면서 일을 하고 회복한 이자벨도 삭신이 쑤셨다.
어지간한 기사들도 쉼 없는 노동은 버거웠다.
그런데 유리는 심지어 요즘 들어서 일찍 일이 끝나면 혼자서 검을 휘두르는 시간을 가졌다.
“별빛나무 과실 때문인가 보군.”
“응?”
“유리가 지치지 않는 이유 말이다. 별빛나무를 먹어서 그런가 생각하고 있었다.”
“으음, 글쎄.”
유리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사실 분명 전보다 체력이 좋아졌다. 기대했던 마나 코어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신체적으로 피로감을 전혀 못 느꼈다.
별빛나무의 과실 덕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육체 노동이 엄청 도움을 줬다.
‘백부님은 전혀 모르시겠지. 2주 동안 개고생한 게 오히려 나한테 도움이 될 줄은.’
별빛나무를 만들었던 연금술사는 별빛의 힘을 담지 못해서 자연에 있는 모든 마나를 끌어모아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유리가 본 설정집에선 다르게 나왔다.
별빛나무는 분명히 별빛의 마나 자체를 지녔다.
연금술사가 몰래 별빛의 마나를 넣을 것이 아닌, 자신도 모르게 모든 마나를 모으다 보니 별빛의 힘마저 깃든 것이다.
문제는 이를 흡수하기 위해선 단순히 과실을 먹기만 해선 안 됐다.
워낙 이질적인 기운이라서 제대로 된 소화 작용이 필요했다.
운동을 통해 칼로리를 소비해서 소화시킨 에너지를 채우는 그런 작용 말이다.
그래서 유리는 기꺼이 대민 지원을 나와서 일부러 마나를 써댔다.
‘어때, 티르빙? 좀 흡수가 됐어?’
[80% 정도?]‘으음, 많이 흡수한 것치곤 전혀 느낌이 없는데.’
[별빛의 마나는 원래 느끼지 못해. 항상 하늘이 있지만, 하늘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거랑 똑같아. 늘 거기에 있어서 있는지도 모르는 거지.]알다가도 모를 설명이었으나, 어쨌든 별빛과실이 주는 힘이 절로 체감되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유리는 괜히 고생하고 있는 이자벨에게 더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나중에 좋은 검이라도 선물해줘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리가 말했다.
“그럼 얼른 마치고 돌아가자.”
해가 지면 영지민들의 시간도 끝난다. 광장과 저 멀리 길거리엔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발걸음이 분주히 움직였다.
오늘 임무는 딱 하나가 남았다.
드디어 올 게 왔다.
유리는 명령서 리스트의 마지막 내용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마수 사냥만 남았네.”
“유리. 전부터 생각했지만, 마수 사냥은 위험하다. 부기사단장님이 질책하더라도 안 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영지 외곽에 까만 나무 숲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원시림 그대로 남아있는 숲은 거대한 고목이 빼곡해서 한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다.
기본적으로 3급 마수종에 1급 마수종도 가끔 튀어나와서 허가가 없인 절대 출입이 불가능했다.
‘하물며 생도들끼리 마수 사냥은 금기시했는데. 백부님도 참. 짓궂으시네.’
[짓궂다는 뜻을 잘못 알고 있어, 꼬맹이.]‘기껏해야 5급 마수종이잖아.’
아무리 실력자에다가 경쟁 생존이 원칙이라 해도, 생도마저 굳이 사지로 몰아넣지 말자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물론 이번 임무에 적힌 마수는 5급으로 비교적 사냥하기 쉬웠다.
고로 안 갈 수도 없었으니.
“정 걱정되면 동료나 데리고 갈까?”
“누굴 데려가도 되는 건가?”
“안 된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사병 동원이나 기사는 안 되지 않나.”
그 길로 유리는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다름 아닌 쥐였다.
회색 쥐가 사람 품에서 튀어나오자 이자벨이 기겁했다.
“헉! 왜, 왜 쥐를 가지고 다니는 건가.”
“아, 이자벨은 모르겠네.”
“뭐, 뭐, 뭘 말이지……?”
“보면 알아.”
유리는 쥐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쥐가 몸을 타고 내려가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유리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럼, 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