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56
제56화
어지간해선 일개 기사에게 장기 임무를 주지는 않았다.
특히나 갓 입단하고 경력이 쌓이지 않은 젊은 기사는 적어도 사수를 붙여서 움직였다.
물론 카이는 예외였다.
유리의 명령을 받은 그는 곧장 언더하울로 향했다.
‘이런 시답지 못한 임무를 주다니.’
첫날.
카이는 유리가 준 임무 명령서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명령서엔 유리가 구체적으로 지시한 청부업자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사실 유리가 직접 주는 임무라고 해서 기대했다. 예언서를 본 그라면 분명 도움이 될 임무를 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유리가 준 임무 내용을 처음 봤을 땐 재미가 없었다.
‘흑마법사의 흔적을 찾아보라고?’
카이도 언더하울의 탄생 근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곳에 흑마법사 잔당이 남아 있다는 것도 안다.
전세계적인 지명수배자들이 이곳만큼 숨기 좋은 곳은 없을 테니.
언더하울로 들어선 카이는 청부업자들 몇 명을 들쑤셔서 흑마법사들에 관해서 찾아냈다.
거기까지만 하더라도 카이는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일이 진행될수록 이게 뭔가 싶었다.
“쉽군.”
유리가 적은 리스트의 청부업자들은 하나같이 실력 없는 놈들뿐이었다.
방금도 리스트의 한 명을 찾아갔다가 뒤통수를 맞았지만, 도리어 카이가 먼저 목을 잘랐다.
‘언더하울의 청부업자들이 이것 밖에 안 되었던가.’
아니면 유리가 일부러 쉬운 청부업자만 리스트에 올려둔 걸까.
카이가 아는 언더하울은 좀 더 강한 자들이 많았다. 환생 이전에 감당하기 힘들었던 자도 이곳에 있을 터.
‘어쨌든 이 정도 정보로는 턱없이 부족해.’
실력이 형편없는 자는 실력대로 정보의 양과 질도 떨어졌다.
유리가 준 리스트와 상관없이 다른 이들을 찾아갈까 고민하던 중.
드득.
괴이한 마찰음이 정면의 어둠 속에서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거대한 대검을 끌고 복면을 쓴 한 남자가 나타났다.
‘본 적 있는 놈이다.’
정체를 정확히 몰라도 일면식이 있다는 건 실력 있는 청부업자라는 뜻.
심지어 한 명이 아니었다.
뒤편으로도 다른 남자를 시작으로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다.
이윽고 카이를 둘러싼 일당은 흉흉한 기운을 그대로 드러냈다.
[도망가라.]뜬금없이 미뭉이 그렇게 경고했다.
[네 상대로는 아직 힘들다. 도망가야 한다.]‘왜? 이제 재밌어지려는데.’
‘그건 16번째였다. 지금은 아니지.’
[또…… 마음대로 해라. 대신 날 쓸 생각은 말아라.]미뭉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어차피 제 주인이 하겠다고 하면 못 말렸다.
카이는 투박한 장검을 꺼내며 그들에게 물었다.
“흑마법사의 소재를 찾고 있다. 아는 놈이 있나?”
“네놈이 언더하울을 들쑤시고 다닌 새끼인가.”
“죽이자.”
“죽여. 흑마법사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자, 죽여야 마땅해.”
“암, 그렇고말고.”
각양각색의 목소리와 말투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도저히 살려줄 기미가 없었다. 카이도 딱히 그걸 기대하진 않았다.
오히려 나서주면 잘됐다.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카이는 문득 웃음이 났다.
‘이러려고 시답지 않은 임무를 줬던 거군.’
결과적으로 카이는 언더하울의 작은 청부업자들을 죽이면서 들쑤신 꼴이 되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다른 청부업자들이 칼을 갈고 이리 몰려왔다.
‘이럴 바엔 처음부터 들쑤시라고…… 아니지. 이미 임무 내용이 그랬었던 건가.’
리스트는 터무니없이 길면서 내용물은 부실한 놈들로 가득했다.
이놈들을 전부 조사하라고 했다간 당연히 언더하울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실제로도 그랬고.
왜 이런 임무를 주었는지 몰라도, 카이는 믿고 해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언서를 본 유리니까 뜻이 있으리라.
무엇보다.
‘이제야 재밌어지는군.’
안 그래도 매번 정형화된 기사단 훈련만 받으려니 여간 좀이 쑤신 게 아니었다.
플레온 기사단의 훈련은 더할 나위 없는 실력 향상을 시켜줬으나, 그래도 실전만한 훈련이 없었다.
“내 양분이 되길 바란다.”
섬뜩한 한 마디와 함께 허공에 검을 그었다.
그러자 선두에 있던 자의 가슴팍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검격에 진격하던 무리가 멈칫거렸다.
카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순간, 형용하기 힘든 살기가 대기를 채웠고. 카이가 앞으로 나갔다.
곧 시궁창 도시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 * *
카이가 떠나고, 유리는 채럿으로부터 틈틈이 정보를 들었다.
일주일 동안은 리스트를 따라 열심히 다니다가 학살이 일어났다고.
‘예상대로 벌집을 제대로 쑤셨나 보네.’
[싸우기 시작한지 3일째라고?]‘응, 쉬지도 않고 싸우고 있다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단을 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그랬다간 벌집에서 벌들이 전부 도망갔을 걸.’
언더하울은 흑마법사들이 지배하던 시절부터 쭉 여러 국가나 기관에 기습을 받았다.
그런 기습이 익숙해진 언더하울은 병력이 접근한다 싶으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그래서 카이 단독으로 언더하울에 파견했다.
블레이크도 고려했으나, 이름이 알려져서 보내지 못했다.
‘뭐, 카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어차피 원작에서 수련을 하던 곳이기도 하고.’
원작에서 트리를 찾으러 갔던 카이는 언더하울을 한바탕 뒤집어 놓아서 트리를 찾아냈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한바탕 싸운 덕에 카이의 실력이 단숨에 상승했었다.
그런 연유로 유리는 카이 혼자 정보를 찾을 겸 언더하울에 그를 보냈다.
‘나도 훈련에 매진해야지.’
유리는 보급용 검을 챙겨 들고 자유의 관 연무장으로 나갔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연무장의 풍경.
첫날과 다른 점이라면 생도들은 도열해서 조용히 교육자를 기다렸다.
유리도 잡담 하나 없이 자리에 섰다.
참고로 더 이상 다이올드의 쓸데없는 의뢰는 없었다. 그 날 이후 얼굴도 비추지 않고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대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나와서 생도들을 훈련 시켰다.
“인상 펴라, 젖먹이들아. 훈련 받기 전부터 똥 씹은 표정이냐.”
특별한 안내 없이 단상 위로 한 중년의 여성이 대나무 지팡이를 짚으며 올라왔다.
그녀는 나이가 겉모습에 역력함에도 칼 같은 제복 차림에다 한쪽 눈은 안대로 감아서 숱한 풍파를 이겨낸 장군처럼 보였다.
그녀는 바로 벤헬링턴의 아내이자 유리에겐 조모, 기사단의 단장인 마리 스테이트 나이트워커였다.
‘제국의 반역자들을 혈혈단신으로 쓸어버렸던 용인.’
27년 전, 나이트워커가 소속된 디마트 제국으로부터 반란군을 처리해달라는 의뢰가 전해진다.
이때 나이트워커에선 단 한 명만 내보내는데, 그 사람이 바로 마리였다.
당시 반란군의 수는 30만.
그 중 10만을 죽이고 15만에게 부상을 입히면서 그녀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 날의 전쟁은 그렇게 허무하고 끝났고, 용인의 무서움을 세간에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마리는 내려간 입꼬리로 말문을 열었다.
“쯧쯧, 겨우 몇 주 해놓고 다들 죽상이군. 네놈들이 그래놓고도 용가의 기사가 되겠다고 온 거냐.”
마리의 성격은 벤헬링턴보다 더 고약하다면 훨씬 고약했다.
수시로 험담을 늘어놓기는 일쑤, 열심히 훈련 중인 생도 옆에서 욕을 하거나 괜한 트집을 잡았다.
차라리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만 주면 괜찮았겠지.
그러나, 지옥은 따로 있었다.
“자! 오늘도 똑같이 종 베기다! 기본 만 번! 시작해!”
불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생도들 얼굴이 일그러진다.
특히 타나토, 제몬 형제는 아주 대놓고 중얼거렸다.
“또 하는 거야?”
“대체 이게 무슨 훈련이라고!”
분명 마리의 귀에도 들렸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교관이 “하나!”를 외쳤다. 그러자 생도들이 일제히 정자세를 취했고, “둘!”에 하늘로 검을 들었다가 내렸다.
이것이 지난 일주일간 반복된 훈련.
생도들은 거의 미쳐가기 직전이었다.
똑같은 반복 훈련도 힘든데 하루에 이걸 만 번 넘게 시켜서 끝날 때쯤이면 검도 들지 못하는 생도가 태반이었다.
마나도 쓰지 못하게 해서 오로지 근력과 체력만으로 버텨야 했다.
마나를 조금이라도 썼다간.
바로 퇴출.
“하나! 둘!”
벌써 스무 명 남짓이 마나를 쓰다가 들켜서 퇴출당했다.
어떻게 마나를 감지하고 정확히 찾아내는지 몰라도, 꼼수를 부릴 수가 없었다.
애초에 유리는 그럴 생각도 없었다.
‘이건 고작 시작이라고.’
상대적으로 별빛나무 마나가 체화되어서 유리는 다른 사람보다 유리했다.
거기에 훈련이 끝난 후 릴림의 성력으로 금방 회복이 가능했다.
그러나 마리는 그 이상을 요구했으니.
“만 번 끝, 다시 하나부터 시작한다!”
일순 생도 몇몇이 불만 섞인 탄식을 질렀다. 제몬과 타나토가 그 중심에 있었다.
“횟수만 채우면 되는 줄 아느냐! 얼른 더 해!”
마리가 불호령을 내리고, 벗어날 방법은 포기밖에 없다는 사실에 생도들은 마지못해 검을 들었다.
이 짓만 벌써 일주일째다.
쌓인 피로감은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통증이 극에 달했을 땐 손에서 피가 났다.
그래도 해야 했다.
해야 한다고 마리가 말했고, 머리와 가슴이 외쳤다.
해가 다 지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 3만 번 대에 도달했다.
그 사이 10명 남짓이 살아남았고, 나머지 생도들은 정신을 잃거나 팔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몬은 진즉에 포기를 선언. 좀더 버티던 타나토는 욕을 하며 연무장을 나갔다.
누구도 그들의 포기를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러워했다.
이상했다.
어차피 오늘 포기한다고 해서 내일에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포기하면 남들보다 편히 쉬고 내일에 다시 하면 되었다.
그런데도 정작 남은 이들은 포기를 몰랐다.
다들 죽상이 되어서 휘두른다기보다 휘적거렸다.
유리는 3만 하고도 7천 번 대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검이 안 보인다.’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정 자세에 빠르고 흔들리지 않게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검이 눈에 안 들어왔다. 휘두르고 있다는 감각만 남아서 손에 검이 들린지 아닌지조차 몰랐다.
처음엔 여느 때처럼 고통스러워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8000번대에 들어서자 고통과는 사뭇 달랐다.
‘동작이 빨라지고 있어. 흔들리지도 않는다.’
괴로웠다면 검 끝이 흔들려야 정상.
하지만 검이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고 정확하고 일정했다.
휘두를수록 속도는 더 배가 되었으며, 검을 끝까지 내려쳤을 때 관성으로 인해서 더 나아가는 일도 줄었다.
그때.
이 모습을 지나가던 마리가 발견하고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존재조차 유리는 알지 못했다.
마리는 슬쩍 얼굴 앞에 대나무 지팡이를 들이밀었다.
전혀 반응이 없다.
‘빨리도 했군.’
소위 무아지경.
극한으로 사람을 몰아넣으면 본능과 무의식의 경계선에 선다.
그 극한에 몰아넣기 위해 반복 동작을 시켰고, 정신을 잃고도 동작을 하게 된다.
물론 모두가 유리처럼 무아지경 상태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꼭 빠져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빠져든 이상 극복해내야 했다. 여기서 무의식적으로 검을 휘둘러봤자 훈련이 되지 않았다.
마리는 호흡을 모았다가 단번에 토해냈다.
“정신 차려!!!”
“……어?”
호통과 동시에 내려치던 검이 손아귀에서 쑤욱 빠져나갔다.
앞사람에게 날아갈 뻔했으나 급하게 힘을 줘서 잡았다.
자칫 위험했던 찰나가 지나고, 유리는 멍한 시선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뭐……였지.”
“쯧, 뭐긴 뭐야. 힘들다고 얼이 빠진 거지!”
“…….”
얼이 빠졌다고?
아니, 유리는 분명히 정신이 또렷했다. 방금 전 마리가 다가와서 자신을 살피던 모습까지 전부 기억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검이 멈추지 않고 멋대로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검은 안 보였다. 잔상처럼 팔 동작만이 시야에서 왔다갔다했다.
마리는 그런 유리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다시 해.”
“예?”
“귓구멍이 막혔나. 다시 하라고. 정신 한 번 더 잃으면 네놈도 퇴출이야!”
그렇게 소리쳐놓고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당장은 뭔지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야 방금 전 경험이 얼마나 위험했으며, 또한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