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6
제6화
벤헬링턴은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유리를 바라봤다. 뻐끔뻐끔 담배 연기만 식탁에 퍼진다.
좀처럼 그에게서 감정이 읽히지 않으니 유리는 초조했다.
‘안 먹히는 건가.’
벤헬링턴이 티르빙에 관한 증언을 들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다.
티르빙을 가져오는 것.
유리는 마검이 가진 위험성을 막기 위해서라면 어떤 식으로든 가져가려 할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벤헬링턴은 1,000만 골드라는 거액을 주겠다며 가문으로 들어오라는 조건을 걸었다.
그때 유리는 확신했다.
‘뭐가 되었든 할아버지는 티르빙을 원한다.’
그래서 차라리 티르빙을 빼 들어서 원하는 걸 보여줬다.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고, 벤헬링턴이 치사하게 나온 이상 그가 혹할 만한 조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벤헬링턴은 의연했다.
“그게 무언지는 아느냐?”
“뭔지 몰라요. 근데 이게 가끔 말도 걸고, 제가 명령하면 시키는 대로 모습을 바꿔요.”
“티르빙이라는 무기다. 고대 마신이 벼렸다는 마검이지. 들어본 적 있느냐?”
“처음 들어봐요. 하지만 이렇게 손에 쥘 때마다 지치지 않을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유리는 일부러 천진한 척, 모르는 척 굴었다.
그렇다고 겁을 먹은 시늉을 하지도 않았다.
겁먹은 모습을 보이면 마검이 뭔지 알았다고 하는 꼴이 된다.
도리어 티르빙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식으로 힘을 과시했다.
당신이 날 원할 수밖에 없도록.
잠시 후, 벤헬링턴은 시가를 재떨이에 짓눌러 끄곤 이를 드러냈다.
“전에도 느꼈지만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건지, 아니면 어린애다운 건지 모르겠군.”
“…….”
“나이트워커 가주의 이름으로 약조하마.”
벤헬링턴이 앞으로 허리를 숙여 식탁에 가까이 몸을 붙였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샤를린느의 안전을 보장하마. 네놈에게 검도 가르쳐 주겠다. 1,000만 골드, 그건 입 아픈 소리다. 가문의 일원이 되는 순간 돈 따위 펑펑 써도 이 가문은 망하지 않아.”
“좋아요.”
그렇게 확답의 확답을 얻고 나서야 제대로 된 거래가 성사되었다.
이후로 유리와 샤를린느는 몇 분간 대화를 더 나누고서 별채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샤를린느가 유리의 양어깨를 붙잡고 쭈그려 앉았다.
“유리, 아까 보여준 거…….”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아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
유리는 어머니가 당황해하거나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쪽도 아녔다.
그녀가 젖은 눈가를 감추려는 듯이 유리를 끌어안았다.
“엄만 티르빙이라든가 그런 걸 모른단다. 그래서 네가 어째서 그런 걸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어머니…….”
“요 며칠 사이 보여준 너는 엄마보다 훨씬 강해. 그렇지만 언젠간 힘들 거야. 그러니까 힘들다면 언제든 의지해도 좋아.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유리도 작은 팔로 어머니를 같이 안아줬다.
의지.
어머니는 의지하길 바랐고, 유리 또한 언젠가 그럴 일이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원작을 알기 전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유리는 전생을 보면서부터 적어도 어머니만큼은 힘들게 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이곳에 왔으며.
이제부터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첫 단추가 제대로 꿰였다.
유리의 작은 손이 어머니의 등을 꽉 쥐었다.
* * *
벤헬링턴은 장례식 조문객이 아닌, 블레이머의 아내와 아들로 다시 장례를 치러야 한다면서 장례식 기간을 더 늘렸다.
덕분에 각국으로부터 모여든 주요 인사들마저 더 머물러야 했다.
무례한 절차였지만 벤헬링턴은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쓸 남자가 아니었다.
두 번째 장례식을 통해 가문의 사람임을 공공연히 알리고, 동시에 유리와 샤를린느의 자존감을 올려줬다.
그것이 벤헬링턴의 의도.
그리고 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듯이 장례식의 마지막 절차인 죽은 자의 머리카락 태우기를 샤를린느에게 맡겼다.
이후 장례식이 끝나자 벤헬링턴이 유리를 불러들였다.
유리가 찾아간 곳은 실내 연무장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걸음을 멈췄다.
‘저들은……?’
좌우로 수많은 사람이 도열했다. 그들은 나이와 성별, 신분, 심지어 종족마저 제각각이었다.
그들을 훑어보고 싶었으나 일단 끝에 서 있던 벤헬링턴을 향해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철부지 꼬맹이 주제에 쓸데없는 허례허식부터 배웠군. 일어나!”
자리에서 일어나자 벤헬링턴이 전방을 주시했다.
“저들은 가문의 사자(使者)다. 기사들과 별개로 꾸려진 실력자들이지.”
“사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용인의 근원인 드래곤들은 과거부터 자신 아래에 여러 봉신 가문을 두었다.
그들은 드래곤을 대신하여 세상사에 관여했고, 반대로 드래곤의 품에서 보호를 받았다.
드래곤이 사라진 지금 당시의 가문들이 그대로 남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용인 가문의 명을 따르는 이들이 남았으니.
그들을 사자(使者)라 불렀다.
‘원작에선 괴물 같은 놈들만 있던데. 이들을 직접 눈으로 보다니.’
나이트워커만 아니라 다른 용가(龍家)에도 있는 사자들은 주인공의 동료, 지나가는 조연, 필연적인 악역 가릴 것 없이 등장했다.
기본적으로 워낙 강력해서 적이 되면 가장 골치 아픈 존재이기도 했다.
“골라봐라.”
“예?”
뜬금없는 벤헬링턴의 말에 유리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검이 배우고 싶다고 했었지. 여기 있는 놈들이 스승이자 너를 지킬 자다. 이들 중에서 한 명 골라라.”
“진짜요?”
“왜? 덜떨어진 기사 놈들한테 배우고 싶으냐? 추천하지 않는다만.”
“아뇨!”
용인 가문 소속 기사들에게 배워도 충분하다고 여겼던 유리에겐 둘도 없는 기회였다.
기사들의 실력도 어마어마하지만, 사자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그들에게 배움을 얻을 기회라니!
유리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겔런, 설명해줘라.”
겔런이 나서서 한 명씩 안내해주며 소개를 덧붙였다.
사자들의 이력이라든가 쓰는 검법과 특징들이 줄줄이 나왔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유리는 닥치는 대로 그들에게서 배움을 얻고 싶었다.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그런데 문득.
한 여자를 지나치다가 그 앞에서 멈춰 섰다.
다른 사자와 다르게 하녀 복장을 한 여자로, 나이대는 기껏해야 갓 성인이 된 듯했다.
유독 하얀 머리카락이 튀는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길을 피했다.
“이 사람은 누구죠?”
“아, 이분은…….”
유려하게 설명을 있던 겔런이 차마 그 여자 앞에선 우물쭈물거렸다.
정 안 되겠는지 벤헬링턴의 눈치까지 살폈으나 가주는 무신경이었다.
마지못해 그가 말하길.
“아링턴 교국의 성기사이자 성녀였던 자입니다.”
“……!”
뜻밖의 만남에 유리는 나오려던 말조차 뱉지 못했다.
교국(敎國).
현대로 따지면 바티칸과 똑같은 나라로, 아링턴 교를 설파하며 교황과 같은 직위인 교제(敎帝)를 중심으로 모인 종교 국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교국의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대륙에서 왕권이 바뀔 때마다 교제에게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하는 전통이 있을 정도다.
그런 교국에서 성녀는 교제와 맞먹는 권력을 가졌다.
근데 그 성녀가 코앞에 하녀 차림으로 있다.
‘혹시…….’
“이름이 릴림인가요?”
“알고 계시는군요? 하긴 유명하니 모를 수가 없겠네요.”
아니. 릴림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 없었다.
릴림을 떠올린 건 원작에서였다.
– 하얀 달빛을 닮은 그녀는 사람을 홀리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녀를 몽마라 불렀다.
몽마, 서큐버스, 인간을 홀리는 뱀.
그러나 그 이름은 인간들 사이에서 불렸을 뿐. 진짜 이름은 따로 존재했다.
유리는 릴림이 아닌 ‘그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
[리리스의 동생이잖아! 진짜 악마의 혼!]티르빙이 제일 경악했다.
그럴 수밖에. 마검 이상의 ‘진짜 악마’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악마는 원작 말미에 세계의 멸망을 돕는 악역으로 변질한다.
“…….”
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 앞에 머물렀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릴림은 앞머리를 더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주변 공기는 설마 그녀를 고르겠어, 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벤헬링턴만이 흥미롭게 이 광경을 지켜봤다.
사실 주변이 뭐라 하든 유리는 그녀를 본 순간 완벽히 계산이 섰다.
“이분께 제 스승과 호위를 맡기겠어요.”
선택과 동시에 소리 없는 경악이 곳곳에서 들렸다.
* * *
릴림은 한때 아링턴 교국의 성기사단 단장이자 성녀로 추앙받았었다.
그러나 성녀 의식에서 내재되어 있는 레벤나라는 악마의 영혼 파편이 발견되면서 하루아침에 운명이 뒤바뀌었다.
당연히 억울했다.
악마의 영혼? 그딴 게 뭔데.
성기사로 충실히 살았으며 성녀가 될 준비를 마쳤었다.
악행을 저지르기보다 악행을 막아서는 데 앞장섰다.
자신보다 희생을 우선시하여 타인을 도왔다.
그런데 악마의 영혼 파편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악마 그 자체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랄지.
벤헬링턴이 충성을 요구하며 그녀를 거둬줬다.
물론 말이 좋아 거둬준 거지. 실질적으로 빚을 진 셈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먹고 지낼 곳이 필요했던지라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때부터 릴림의 하녀 생활이 시작됐다.
검, 성력, 다 버렸다.
사자의 본분도 잊고, 가사를 하는 편이 잡념 하나 없어서 훨씬 좋았다.
헌데, 유리가 그녀를 스승이자 호위로 골랐다.
릴림은 유리를 따라 별채로 들어섰다.
신분상 평민에 하녀인지라 아예 샤를린느와 유리의 담당으로 옮겨졌다.
방으로 들어선 유리는 귀찮은 예복부터 침대에 벗어 던졌다.
“따라오지 않아도 돼.”
“아, 아닙니다. 오늘부터, 당신, 아니. 도, 도련님을 모시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스승과 호위가 필요하다 했지 담당 하녀가 필요하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릴림은 본능적으로 그가 벗은 옷가지를 정리해서 옷장에 넣었다.
어쩐지 긴장되었다.
아까는 선택받기 싫어서 시선을 피했지만, 지금은 기세에 눌려서 시선을 돌렸다.
어지간한 기사 못지않은 기세가 있다고 해야 되나.
좀처럼 형언하기가 어려운 기운이 있는 건 확실했다.
‘대충 비위만 맞추면 적당……하겠지?’
기운이 어떻든 아직까지 릴림에게 유리는 철부지 아이로밖에 안 보였다.
검을 배우고 싶다는 것도 평범한 사내아이들과 같은 심리겠지.
빡세게 가르치면 의욕과 현실의 차이를 금방 깨닫고 그만둘 거다.
“시간 낭비를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
유리는 대충 편한 복장으로 알아서 갈아입고는 게슐츠가 줬던 검을 쥐었다.
그리고 릴림을 향해 말했다.
“바로 가르침을 받아도 될까?”
릴림은 옳다구나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 꼬맹이에게 자신을 고른 걸 후회하게 해주겠노라며 그녀는 유리를 따라 연무장으로 나갔다.
그러나.
훈련을 시작하고 4시간 뒤.
후회는 릴림이 먼저 했다.
“이거 아닌가?”
“아, 아뇨. 그게, 그러니까…….”
릴림은 그야말로 곤혹스러움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우선 그에게 검술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동작들부터 가르쳤다.
기초를 못하면 바로 지적하고 계속 같은 걸 반복할 요량이었다.
예상대로 유리는 기본적인 동작부터 헤맸다.
그래도 불평 하나 없이 ‘이렇게요? 저렇게요?’ 질문 세례를 쏟아내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래,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자.
그런 마음으로 계속 같은 동작만 시켰거늘.
문제는 4시간이 넘도록 같은 걸 하면서 똑같이 질문이 날아들었다.
“종베기가…… 맞지? 아냐. 아까 보여줬던 거랑 달라.”
오, 제발!
이제 그만해 줬으면 좋겠다.
아니, 차라리 가르치는 걸 똑바로 하면 그만두기라도 하지. 그러지도 못하는 게…….
“저 도련님. 이건 이쯤 하면 된 거 같아요.”
“무슨 소리야. 릴림이 시범해준 동작이랑 완전히 다르잖아.”
“아, 아, 아뇨. 제대로 따라 하신―”
“설마 가르쳐 주기 싫어서 얼렁뚱땅 넘기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결국 그 뒤로도 릴림은 종베기 동작 하나가 완성될 때까지 유리를 가르쳐야만 했다.
그리고 밤이 되어서 곰곰이 하루를 돌아보고 나서야 유리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