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72
제72화
엘라트리오는 한참 동안 렉슬러를 눕혀놓고 있는 힘껏 주먹질을 했다.
원래라면 렉슬러의 경지로는 상처조차 입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있는 그대로 주먹질을 받아들였다.
결국 엘라트리오의 손이 까질 때 즈음이 되어서야 멈췄고.
우선은 대화를 위해서 렉슬러까지 반에게 태우고 근처 마을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갱단원들은 멍청한 낯짝으로 구경만 했다.
렉슬러, 아니. 킹슬리가 떠난 뒤에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 * *
반에게 잠시 숲에서 휴식 시간을 주고 일행은 근처 여관 방 하나를 잡았다.
방에 들어오고 나서 엘라트리오와 렉슬러는 서로 마주 보고 앉았으나, 30분째 대화가 없었다.
멀리서 문에 기대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유리는 그들을 기다렸다.
나선다고 어떻게 될 문제가 아니었다.
“저분한테서 전부 들었어. 나 때문에 갱단 두목 노릇을 했다면서.”
결국 엘라트리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황실에서 황녀 마마를 포기했지만, 전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버젓이 살아 계실 황녀 마마를 두고는 도리가 아닌 거 같아서…….”
“그래서 더스트가 시키는 대로 따랐어? 그 변태 새끼의 노예로?”
“……면목 없습니다.”
“내가 평소에도 누누이 말했었지.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그냥 버리라고.”
그녀는 듣기 살벌한 소리를 덤덤하게 말했다.
“난 언제 좌천될지 모른다니까? 폐하도 날 싫어하는 마당에 네가 날 붙잡고 있어봤자 어쩌자고.”
“그래도…….”
“이유 붙이지 마!”
참다못해서 엘라트리오가 크게 소리를 치자 정작 더 큰 덩치의 렉슬러가 움찔거렸다.
“하아, 근위대장 씩이나 되어서 갱단 두목 짓이나 하고 있고. 제국의 역사에 수치야. 이래 놓으면 내가 좋아해줄 줄 알았어?”
“송구합니다.”
“넌 내가 돌아가면 바로 자를 거야. 세상에 다 알리고 창피를 줄 거라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엘라트리오가 납치되던 날, 귀족 임명을 위해 지방까지 내려갔던 건 황제가 내린 벌과 같았다.
황제의 귀찮은 업무를 맡기는 꼴이었으며 직접 귀족을 찾아가는 황족이라는 굴욕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매번 그녀를 지방까지 호위했던 렉슬러가 하필 그날 호위를 맡지 않았었다.
엘라트리오는 보다 분위기를 풀고는 유리를 향해 물었다.
“후우, 늦었지만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까는 남아서 죽을 거라고 하더니. 이제 살 마음이 있는 건가.”
“황족의 명령을 개무시하는 어떤 바보 얼굴 보니까 죽고 싶어도 못 죽겠네요.”
역시.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게 확실하다.
못난 애인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서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한 건 주효했다. 아니었다면 엘라트리오 성격에 정말로 그 별장에서 죽으려 했겠지.
하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바보짓이나 하는 렉슬러를 봐 버렸다.
그 순간, 황실이 포기한 것처럼 엘라트리오마저 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통성명이나 하죠. 이름이?”
“유리 덴 나이트워커다.”
“나이트워커요? 용가에서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데요.”
“뒤늦게 인정받은 서자라서.”
“아하.”
아하, 라고?
보통 서자라고 하면 대부분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난감해 했거늘.
엘라트리오는 그러려니 하는 느낌으로 넘어갔다. 오히려 그럴 수 있다고 수긍했다.
“어쩐지. 황실이 날 도와줄 리가 있나. 그래도 의아하긴 하네요. 나이트워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절 도왔죠?”
“렉슬러가 개인적으로 의뢰를 했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 의뢰를 받았고.”
“개인적이라는 건 가문의 의사랑 상관없이?”
“가주님의 허락은 받았다. 내 의사가 전적으로 반영 되어서 개인적이라고 한 거야.”
“대체 렉슬러가 어떤 대가를 약속했기에 나이트워커가 의뢰를 받아들였죠?”
황녀는 순수한 도움보다 거래를 먼저 의심했다.
옳은 판단이었다.
유리라고 해서 대가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또한 그 대가는 지명의뢰를 허락해줄 벤헬링턴의 마음까지도 흔들 제안이어야만 했다.
유리는 지명의뢰서를 꺼내서 둘 사이에 내려놨다.
“공백이잖아요?”
렉슬러의 사인과 인장까지 전부 찍힌 서류에는 정작 대가를 쓰는 란에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의뢰 내용만 적혔을 뿐.
즉, 렉슬러가 먼저 대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닌.
유리가 원하는 대가를 적을 수 있는 것이었다.
“렉슬러!”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건! 저들이 뭘 요구할 줄 알고!”
“그러게 말이야.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공백으로 의뢰서를 준 건지 모르겠더군, 렉슬러.”
사실 이 공백은 유리가 먼저 요구하지 않았다.
렉슬러가 먼저 공백으로 제출했으며, 이래야만 벤헬링턴이 허락해줄 거라고 믿었다.
“이제 와서 무르겠다고 하진 않겠지?”
“약속은 지킵니다.”
“이런 부당한 의뢰서가 약속이라고?!”
“괜찮습니다, 황녀 마마.”
렉슬러는 어떻게든 그녀를 안심시켰다. 엘라트리오도 말릴 수 없었다.
요구에 뭘 쓰든 간에 이건 이미 완성된 계약서나 다름없었다. 유리를 죽이고 빼앗지 않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다만, 유리는 계약서를 바꿀 의향이 있었으니.
“이 계약서가 마음에 안 든다면 바꿔줄 수도 있어.”
“어떻게요?”
“계약자는 렉슬러가 아닌 황녀.”
“그러죠.”
“황녀 마마!”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렉슬러가 비명 같이 소리치기도 전에 그녀가 손을 내밀어서 막았다.
“네가 무슨 마음으로 이랬는지 알겠지만 내 목숨 값은 내가 치르는 게 맞아.”
“하지만.”
“닥쳐, 렉슬러. 네 멋대로 했으니까 나도 이번만큼은 멋대로 하겠어.”
그리 말한 엘라트리오는 유리를 쳐다봤다. 요구 조건을 말하라는 눈빛이었다.
유리가 말했다.
“엘라트리오 황녀, 네가 황제가 되었으면 한다.”
“…….”
놀라거나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내가 한 제안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 난 황실에 연줄이 있었으면 해. 되도록 괜찮은 쪽으로.”
“더스트가 했던 짓을 똑같이 하겠다는 건가요?”
“협박이 아니라 정상적인 관계지. 난 그대가 황제가 되길 바라고, 또 그걸 도와줄 거거든.”
엘라트리오는 믿지 않았다.
나이트워커를 비롯해서 용가가 한 국가의 권력을 도와준다거나 지지한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의문스럽긴 했지만, 돕겠다고 했으니까 굳이 물을 필요는 없고.
“내가 황제가 되면 뭐하려고요?”
“내가 가주가 된다.”
“뭐라고요?”
이번 대답에는 동요가 일어났다.
황제가 되는 것보다 용가의 가주가 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며 함부로 입 밖에 꺼내선 안 되는 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해가 안 되네요. 용가의 가주가 되는 게 제가 황제가 되는 것과 관계있나요? 설마 황제와 황실의 힘이 필요하다고는 하지 않겠죠?”
“필요해.”
나중에 다이올드가 가주로 임명 될 때 황실의 힘이 보태질 테니까.
그렇다면 같은 방식으로, 아니.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의 지지를 받아서 가주가 될 작정이었다.
그리고 엘라트리오는 뛰어난 황제가 될 재목이었다.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가주가 되겠다고요?”
“서자라서 안 될 거 같나?”
“날 뭐로 보고. 전 신분이나 출신으로 평가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솔직히 서자라서 안 될 것 같다기보다, 터무니없는 자신감에 엘라트리오는 할 말을 잃었다.
기껏해야 10대 티를 겨우 벗고 있는 인상이 용가의 가주가 되겠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더군다나 용인 특유의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가 아닌 걸 봐서 그는 용인이 아니라 인간 또는 혼혈이었다.
하지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진심이 담겼다. 되고자 하는 의지도 충만했다.
반면, 유리는 그녀에게 황제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확신했다.
‘황제가 될 마음이 없으면서 귀족 임명식에 대리로 가진 않았겠지. 귀족들이 싫어하는 정책들을 마구 내놓지도 않았을 거고.’
[순수하게 백성을 위하는 황녀일지도 모르잖아.]‘순수하게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황제와 충돌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유일한 꽃’이라는 이명이 붙으면서 엘라트리오의 업적은 인정받았으며, 이는 황위 후계자로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녀보다 뛰어난 황위 후계자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녀가 지닌 두터운 백성들의 신망을 이길 자는 절대 없었다.
그런 그녀가 과연 권력의 힘 앞에서 좌절해본 적이 없을까?
‘내가 황제였더라면’이라는 가정을 안 해봤을까?
아니, 분명 있었을 거다. 여러 제도를 추진하면서 귀족들과 수도 없이 충돌해봤으니까 뼈저리게 느껴봤으리라.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나?”
“아뇨. 다만.”
고민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유리의 자신감, 그리고 지명의뢰서를 받아서 가주께 허락을 받고 가주가 되겠다는 포부도 당당히 밝혔다.
심지어 더스트가 있던 별장을 홀로 소탕하고 자신을 구하러 오기까지 했다.
능력과 자질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거기다 나이트워커라는 배경 또한 거절하기엔 너무나 탐스러웠다.
그래, 이건 전적으로 엘라트리오가 얻을 게 많은 장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타산에 안 맞네요.”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건가?”
“반대에요. 제가 더 큰 걸 바라고 있답니다.”
“무슨 뜻이지?”
“제가 황제가 되려는 욕망은 유리 님께서 제가 황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보다 훨씬 크다는 거죠. 아, 혹시 펜 있나요?”
유리는 가방에서 깃펜과 잉크를 차례로 꺼내서 줬다.
엘라트리오는 깃펜의 쥐자마자 서슴없이 공백을 채웠다.
베리온 제국의 황녀 엘라트리오 베리온은 의뢰의 대가로 ‘황제’가 된다.
베리온 제국의 황녀 엘라트리오 베리온은 의뢰의 대가로 이 이후로 유리 덴 나이트워커를 무조건 지지한다.
첫 번째로 받을 대가야 원래 받기로 했지만, 두 번째 조항까지 직접 적는 모습에 조금은 놀랐다.
“대놓고 지지선언을 하겠다고?”
“제 목숨 값에다가 야욕에 비하면 싸구려죠. 말 한 번이면 충분한 걸요. 그리고, 유리 님도 절 더 도와주신다면서요?”
이건 의뢰인과 수주인 간의 거래지만, 실질적으로 황제가 되라는 제안은 요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엘라트리오 본인이 뛰어나기도 해야 하며, 강력한 지지자가 필요하기도 했다.
이 의뢰서는 그런 의미에서 나이트워커의 누군가가 엘라트리오를 황제로 앉히고 싶다는 선언서인 셈.
그녀가 싱긋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유리 덴 나이트워커 님.”
“그러지.”
유리도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 * *
유리는 엘라트리오와 렉슬러를 황성으로 데려다준 뒤 바로 가문으로 돌아와 의뢰 성공 보고를 올렸다.
얼마 뒤, 황실로부터 엘라트리오가 살아 돌아왔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흘러나왔으며, 이 과정에서 나이트워커의 ‘누군가’가 도움을 줬다는 소식도 곁들여졌다.
엘라트리오의 복귀는 세간에 충격을 넘어서서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불러왔다.
버젓이 살아있는 황녀를 죽은 사람 취급한 황실은 온갖 질타를 받아야 했으며, 황제는 매정한 아버지라 욕을 먹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몇몇 영지에선 황제를 언급조차 못 하는 금언령(禁言令)까지 내려졌다.
참고로 갈락타시스와 렉슬러의 관계는 묻혔다.
렉슬러 스스로가 벌을 받겠다고 했으나, 황실에선 더 이상 권위를 추락시킬 수 없다며 근신 조치만 형식적으로 내리고 진실을 숨겼다.
물론, 엘라트리오가 이를 전부 까발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됐데요.”
“참 추진력이 좋은 황녀님이네.”
가문으로 복귀하고 일주일도 체 되지 않은 날.
유리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오랜만에 릴림이 깎아주는 사과를 먹으며 가문 밖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릴림의 나른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절로 하품이 나오는 오후였다.
“흐암, 그래서? 갈락타시스는?”
“근신하기 전에 근위대장이 직접 처리한다나 봐요.”
“그 사람도 추진력이 좋네.”
안 그래도 의뢰를 받기 전에 그에게 차후 갈락타시스를 어찌 처리할지 물었었다.
이번엔 전부 소탕하고 근위대장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었으나, 유리가 보기엔 시간이 걸릴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고작 일주일 만에 일을 벌이다니.
혀가 내둘러지는 행동파 같은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듯해도 은근히 닮아 있었다.
“아, 맞다. 도련님. 그걸 까먹고, 있었어요.”
“뭐?”
릴림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와 함께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카이 경으로부터 전갈이 왔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