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74
제74화
엘라트리오와 렉슬러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의 납치는 단순히 더스트의 변태 같은 망상으로 이뤄질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황족 납치다. 길이 남을 대사건으로 배후자가 없을지라도 있다는 가정 하에 조사가 이뤄져야만 했다.
그나마 황녀가 돌아왔다는 분위기에 도취되어서 조사라는 말이 쏙 들어갔다.
달아올랐던 혈색도 잠시. 엘라트리오는 단번에 분위기를 바꾸고 한숨을 지었다.
“저도 같은 의견이긴 하지만, 누가 절 납치할 생각을 했는지 감이 오질 않네요.”
“추측 가는 사람도 없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황족은 가족이면서 서로에겐 적이었다.
비와 첩들은 자기 자식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어렸을 적부터 암투를 벌였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였던 엘라트리오는 그런 환경 속에서 스스로 경쟁력을 갖췄다. 당연히 다른 황족에게 적이 되기 쉬웠다.
아니, 지금은 모두에게 적이었다.
“그래서 섣불리 제 납치 사건을 조사하자고 하지도 못하고 있어요. 그랬다간 분명 손을 쓸 테니까요. 지금은 5년 동안 갇혀 지내는 바람에 아무것도 모르는 황녀로 있는 게 맞아요.”
“연기를 하고 있다고?”
“저 인질에서 풀려난 지 얼마 안 됐어요.”
아아. 그렇지, 참.
엘라트리오가 너무 태연해서 전혀 몰랐다. 엄연히 5년 동안 갇혀 지낸 인질이었거늘.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지만, 황녀는 오롯이 정신을 차리고 복귀했다.
그렇기에 연기를 해야만 했다.
제정신이지만 제정신이 아닌 척.
유리는 몰랐지만, 엘라트리오가 돌아오고 나서 이 방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가끔씩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했다.
유리는 그런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연기를 해주고 있다니 잘됐군.”
“어째서요?”
“난 추측하고 있는 황족이 있어서.”
“진짜요? 아니, 그걸 떠나서 왜…….”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유리는 미리 챙겨온 서류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렉슬러가 먼저 열어봤다.
“이게 뭡니까?”
“더스트의 별장에서 챙겨온 장부들. 근위대장이 보고 있는 건 로체른 국경수비대에 넘긴 뇌물과 명단이다.”
뿐만 아니라 더스트가 갈락타시스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과 암거래 장부까지 전부 함께 있었다.
명단에는 로체른의 고위 귀족도 얽혀 있어서 거래가 아니라 협박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렉슬러의 동공이 터질 듯이 커졌다.
“황녀님!”
“왜?”
곁에 다가와 같이 서류를 보던 엘라트리오가 물었다.
명단을 훑다가 한 대목에서 눈동자가 멈췄다.
“흰꼬리 상단! 이게 왜 여기 있죠?”
“베리온 제국 황실 직영 상단, 맞지?”
“네, 맞아요. 그렇다는 건…….”
“황실 내부자가 더스트와 직접 거래를 했다는 증거다. 황녀 납치 사건을 사주한 증거이기도 하고.”
어지간한 국가는 모두 왕 산하에 상단을 두었다.
주로 사치품을 주고받을 때 이용하며 작게는 악세사리, 미술품, 크게는 광산이나 토지, 사업권을 거래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세계에서 암시장 다음으로 큰돈이 오가는 시장이었다.
흰꼬리 상단은 그런 시장 중 베리온 황실을 대표하는 상단.
‘황녀가 사라진 시기를 기점으로 더스트에게 돈이 흘러들어갔다. 더스트는 싸구려 물품을 상단에 팔았고.’
팔린 물건들은 하나 같이 전혀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대부분 골동품에 가까웠으며, 미술품이나 조각조차도 허접했다.
형식적으로 거래라고 써놓았을 뿐 흰꼬리 상단이 돈을 준 거나 다름없었으니.
엘라트리오는 배신감이 가득한 시선으로 장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설마 설마 했지만 진짜로 날 없애려고 했다니! 이것도 가족이라고!”
“흰꼬리 상단과 연관 있는 황족이 누가 있지?”
“후우, 일단 폐하를 비롯해서 서너 명 정도 있고, 제가 없는 동안은…… 렉슬러?”
그에게 묻자 렉슬러는 마른 침을 삼키며 답했다.
“아직도 황태자 저하께서 전담하고 계십니다.”
“루이스 오라버니? 하! 하긴, 오빠씩이나 되어서 툭하면 나한테 시비를 걸었었지. 기껏 한 발상이 납치라니. 치졸하긴!”
엘라트리오가 백성들에게 신망이 높다면, 루이스 황태자는 귀족들에게서 인기가 많았다.
때문에 엘라트리오의 업적과 상관 없이 결국 루이스가 황제에 오를 거라는 소문이 자주 돌았다.
[어쩌면 다이올드랑 루이스가 한패일 수도 있겠네. 하는 짓이 딱~ 비슷해.]‘원작엔 누군지 나오지도 않았어. 황제라고만 나왔지.’
다이올드가 가주가 될 때, 그를 가주로 밀어줬던 당시 베리온 제국 황제가 누군지는 제대로 기술되지 않았다.
그것이 꼭 지금의 황제라는 법도 없었다. 알려진 거라곤 황족 중 누군가라는 것뿐.
‘그리고 누가 누구와 한패인지는 관심 없어. 엘라트리오를 황제로 만들면 되니까.’
방해만이라면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없는 정보로 싸워봤자 패배할 확률만 늘어난다.
하지만 판을 가져간다면, 그만한 정보가 있다면 적이 누구든 관계없었다.
“다들 날 미워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황녀 마마.”
엘라트리오는 아연실색하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침울해지는 표정이 어둡게 그늘진다. 렉슬러가 걱정스레 바라보니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렉슬러. 이 가족은 처음부터 가족이 아니었어. 배신감은커녕 화만 나네.”
“……송구합니다.”
“송구는 무슨.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다고. 그보다 유리님. 이걸 어쩌면 좋을까요? 이 명단, 공개하실 건가요?”
“당장은 안 돼. 명단 자체를 거짓이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이 명단을 증명할 수 없게 돼.”
“그럼 어떡해야죠?”
“용병단.”
“용병단이요?”
“더스트는 5급 범죄자에 실력이 형편없었다. 그런 놈이 어떻게 황녀를 습격했을까?”
귀족 임명을 마치고 엘라트리오가 돌아오던 날. 곁에는 황실 기사단이 그녀를 호위했다.
일반적인 산적 무리로는 습격조차 상상 못 할 상황.
그러나 더스트는 기어코 황녀를 납치했고, 별장에서는 고가의 용병들이 그를 지켰다.
더군다나.
“그대가 있던 탑도 의심스러워.”
“거기가 왜요?”
“거긴 로체른 왕국이 아냐.”
“그럼……요?”
“샨타이.”
뜻밖의 지명이 튀어나오자 두 사람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유리도 태연하게 굴었으나, 말하는 입이 찜찜했다.
샨타이.
그곳은 과거 어느 가문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없어진 땅이었다.
지금은 군도를 비롯해 몇몇 작은 섬들만 남아 있으며, 전후 마력 폭풍이 생겨서 그 영향으로 섣불리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 가문이었으니.
‘솔리드녹스.’
과거 샨타이는 아무도 살지 않는 거대한 무인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샨타이에서 특이한 마석이 발견되었고 이를 놓고 전쟁이 벌어졌다.
이 중 솔리드녹스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었다.
전쟁에서 이긴 솔리드녹스는 샨타이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샨타이에 살던 원주민들이 마석 광산을 폭발시켰고, 그것이 지금의 샨타이 군도가 되었다.
“맙소사. 지금까지 제가 솔리드녹스의 땅에 잡혀 있었다고요? 그럼…….”
“섣부른 추측을 입 밖으로 꺼내진 말길. 솔리드녹스가 가지고 있는 땅이긴 하지만 그들도 거긴 관리하지 않고 있어. 어쩌면 돈만 주고 땅을 빌렸을지도 몰라.”
“그래도 확인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찾아왔지.”
유리도 괜스레 명단 하나를 들추며 말했다.
“이 명부를 빌미로 로체른에 협조를 구해서 별장을 조사할 수 있나? 용병단의 뒤를 추적해서 그들을 붙잡아야 돼.”
“가능하죠. 렉슬러? 입이 무겁고 믿을만한 자들로 바로 쫓아줘. 폐하께는 내가 둘러댈게.”
“알겠습니다.”
렉슬러는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유리가 하던 말을 이었다.
“실력 있는 용병단을 장기 고용하고 솔리드녹스의 땅을 빌렸으니 어마어마한 돈이 오갔을 거다.”
“흰꼬리 상단을 직접 파헤칠 순 없지만, 황실 은행장이랑 마침 친분이 있어요. 거기에 상단 계좌가 있으니까 기록을 열람할 수는 있을 거예요.”
“좋아. 그럼 그렇게 하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지.”
“어떤 거요?”
“글쎄.”
유리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엘라트리오가 절대 안 된다고 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안 할 유리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위험성이 높았다.
이를 알 리 없는 엘라트리오와 렉슬러는 비죽 웃는 유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 * *
그 길로 유리는 황성을 나와 어머니와 채럿을 만나 수도 곳곳을 놀러 다녔다.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라 들뜬 마음에 지치는 줄도 모르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들은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는 황성이 아니라 밖에 있는 고급 저택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한 1000골드 정도 들었지만, 돈이 대수랴.
저녁까지 근사한 코스 요리로 먹고 나서 방으로 돌아온 유리.
겨우 여독을 풀려고 하나 했더니, 따라 들어온 릴림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어 도련님.”
“황실에서 왔겠지?”
“다른 시녀들 말로는 10명 넘게 왔다갔데요.”
숙소를 잡자 황성에서 유리를 만나고 싶다며 계속해서 사람을 보냈다.
용가의 사람이 찾아왔으니 어떻게든 만나서 뭐라도 해보려는 수작질이었다.
이럴 거 같아서 숙소도 일부러 늦게 잡았고, 처음부터 예고도 하지 않고 수도로 왔었다.
또한 경비대가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티를 내며 출입했다.
그래야 황족들한테 용가가 찾아왔다는 소식이 닿을 테니까.
수도 경비대에서 렉슬러가 직접 맞이하러 왔던 것도 같은 일환에서였으리라.
다른 황족이 접촉하기 전에 만나려고 했던 거겠지.
“황태자한테서도 왔어?”
“네에, 여기요.”
미리 일러두었던 대로 릴림은 루이스가 남기고 간 초대장만 받아두고 나머지는 태웠다.
초대장을 받아보니 오늘 저녁 황실에서 열리는 엘라트리오의 귀환 축하 만찬에 초대한다고 적혀 있었다.
“배부르지만 가야겠네.”
“진짜로 가시려고요?”
“이거 때문에 황녀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알면 절대 만나지 말라고 할 테니까.
유리는 간단하게 옷만 갈아입고서 저택을 나섰다. 초대장에 적힌 시각보다 늦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번엔 릴림도 같이 갔다.
황성 앞에 다다라서 초대장을 보여주니 경비들은 군말 없이 들여보내줬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가 유리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만찬회가 진행 중인가?”
“네, 그렇습니다.”
남자는 유리를 데리고 곧장 만찬회가 열리고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어두운 복도를 조금 지나자 곧 화사한 홀이 빛으로 유리를 뒤덮었다.
홀 한가운데 놓인 기다란 테이블에는 뷔페처럼 음식이 깔려 있었고, 주변에는 황족의 친인척들이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먹고 대화를 나눴다.
“아무도, 못 알아보네요.”
릴림의 장난기 섞인 말에 유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이 용인이라고 알아볼 자가 몇이나 있다고.
만찬회 참석자들 눈에는 그저 누가 초대한 외부인 정도에 불과하리라.
“이쪽으로. 황태자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던 남자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계속 유리를 이끌다가 테라스에 따로 마련된 자리로 도착했다.
커튼 너머로 한 남자의 실루엣이 일렁거렸다.
커튼을 열고 들어가자 연한 금발의 남성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와인을 들이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인기척에 일어나서 유리를 발견하고 반겼다.
“와아, 설마 했는데 이리 와주실 줄이야. 반갑습니다. 루이스 베리온이라고 합니다.”
“유리 덴 나이트워커다.”
가볍게 악수를 하려는 찰나.
등 돌린 두 개의 의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중 하나는 루이스가, 다른 의자에는 여전히 다른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손을 맞잡으면서도 시선은 계속 그쪽으로 향했다.
익숙한 뒷모습이 뒤늦게 일어섰다.
그가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여기서 다 보는구나, 유리.”
“백부님.”
다이올드가 여느 때보다도 무거운 표정으로 유리를 내려다봤다.
뒤늦게 유리는 깨달았다.
이곳 황실은 이미 다이올드의 무대였다는 것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