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75
제75화
어느 정도 예견했던 사태긴 했다.
하루아침 만에 다이올드가 황실과 연줄이 생겼을 리는 없고.
적어도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 동안 관계를 이어왔으리라.
유리는 표정 한 점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백부님께서 계실 줄 몰랐습니다.”
“내가 있으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야…….”
용인이 황실에 있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우니까.
라고 할 뻔 했다.
허나 당당한 태도를 봐선 올 만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매복이라도 했던가.
“여길 온 꼬락서니가 참으로 우습구나, 유리. 왜? 황족이 보낸 편지를 보니까 발가락이라도 핥을 줄 알고 쫄래쫄래 왔더냐?”
“편지, 백부님께서 보내신 거군요.”
“보낸 건 황태자고. 시킨 건 나였다.”
낚시질을 했군.
유리는 그리 생각하며 물었다.
“그러는 백부님께선 어째서 여기 계시는 거죠. 저 하나 욕보이자고 오셨을 리는 없고.”
“가주님께서 보내셨다.”
“할아버지께서요?”
“황녀를 구출하는 데 도움을 줘서 감사하다며 이번 만찬회에 꼭 와달라고 황실에서 사정하더구나. 알다시피 가주님은 이런 걸 싫어하시고. 거절하기 민망할 정도라서 내가 대신 왔다.”
거짓말인지 분간이 안 갔다.
상식적으로 만찬회에 초대를 받아 누군가를 보내려 했다면 다이올드가 아니라 유리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는 어떤 귀띔도 못 들었다.
‘먼저 수도로 간다고 해서 안 알려준 걸까? 내가 수도로 올라오면 알아서 황실로 갈 걸 알고서?’
아니.
유리는 모든 추측을 접고 강하게 부정했다.
애초에 전제가 틀렸다.
용가는 황실에 찾아가지 않는다. 인간의 부름에 움직인다는 걸 불명예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리가 수도에 가겠다고 했을 때, 벤헬링턴이 반대하는 줄 알았었다.
‘할아버지께서 내가 황실에 가는 걸 모르지는 않으셨을 테고. 그렇다면…… 백부님도 허락해줬다고?’
뭔지 몰라도 다이올드가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감히 벤헬링턴을 들먹여가면서까지 거짓말할 심보는 그에게 없었다.
그렇다는 건 결국.
황태자를 통해 보내진 편지도 벤헬링턴의 뜻?
“자, 이제 내 질문에나 답하거라.”
다이올드가 사악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황실에 줄 한 번 대 보겠다고 이리로 온 거냐?”
그는 유리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유리도 그런 시선이 느껴졌다.
어찌됐든 벤헬링턴은 수도 행을 허락했지, 황실 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근데도 황실에 이리 와 버렸으니.
졸지에 거짓말을 한 거나 진배없었다.
“그게 문제라도 됩니까?”
“뭐?”
당당한 태도에 다이올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놈 수도로 간다고 말해 놓고 여기로 왔어. 거짓말을 해 놓고도 문제를 모르는 거냐?”
“황실에 놀러 왔으니까요.”
“뭐, 뭐라고?”
“엘라트리오 황녀와 친분이 쌓여서요. 좋은 친우가 된 거 같아서 좀 괜찮나 보러 왔었습니다.”
“그래서 황태자의 편지에 응했더냐?”
“응하면 안 됩니까?”
“이게 끝까지! 여전히 자기 잘못을 모르고 있구나!”
“백부님께서도 가주님께서 가라고 하니까 황실에 오셨잖습니까.”
“그거야 가주님 명령이지 않더냐!”
“저 같으면 안 간다고 했을 텐데요.”
유리는 황태자가 보낸 편지를 살랑살랑 흔들어보였다.
“용인으로서 먹칠하기 싫었다면 백부님께선 할아버지께 안 가겠다고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라고 해서 덥석 오셨군요. 이는 백부님께서 말씀하시는 먹칠이 아닐까요.”
“그러는 네놈은 뭐가 다르다고!”
“저야 제 자유의지로 왔습니다. 용인이니까 마음대로 이렇게 황실도 드나들고요. 황태자의 편지? 줄을 댔다고 하셨나요? 황태자를 찾아오기만 했을 뿐인데 줄을 댔다고 하면 백부님도 이 자리에 먼저 와계셨으니 줄을 댔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나, 난 가주님의 대리로 왔어! 네놈이랑 달리!”
“명령은 핑계시잖습니까.”
말싸움을 계속하자니 피로가 몰려왔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백부님은 오지 말아야 했습니다. 가주님께서 가라고 했어도, 용인이 되어서 인간이 부른다고 가야하는 건 안 된다며 따지셔야 했습니다. 저한테 따지 듯이요. 하지만 오셨죠. 용인답지 못하게. 자신의 의지 하나 없이. 수치스럽게 말입니다.”
“이놈이!”
화를 내보지만.
때릴 기세로 손을 들어보지만.
거기까지였다.
가주의 명령이 먼저냐, 용인의 자존심이 먼저냐.
사실 답은 없다.
허나 벤헬링턴이라면 다이올드가 거부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거부했어야만 했다.
그게 용인다운 자세였으니까.
다이올드는 반박조차 할 수 없어서 안면이 벌게졌다.
유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재차 물음을 던졌다.
“백부님은 제가 황실로 올 줄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
“할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가문으로 복귀해서 벌을 받겠습니다만, 백부님께선 제가 올 걸 알고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아서요.”
“큼!”
튀어나오려던 말들이 차마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로서 한 가지가 확실해졌다.
벤헬링턴이 황실로 보냈을지언정 유리를 감시하거나 이런 치졸한 낚시나 하라고 보낸 역할은 아니라는 점.
거짓으로 ‘가주가 시켜서 널 감시하라고 했다!’라곤 못 하는 꼴을 보니 확실했다.
‘뭐, 이건 증거가 없으니까 더 따질 순 없겠어.’
더 할 말이 있을까, 다이올드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때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루이스가 소리 내어 웃으며 분위기를 깨고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하시죠. 다이올드 님. 유리 님께 보낸 편지는 순수하게 제가 만나보고 싶어서 보냈습니다. 마침 수도 경비대가 용가 사람이 왔다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죠.”
“쯧, 저딴 놈을 용인이라고!”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고. 술이라도 한 잔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늘 괜찮은 술이 들어와서 따로 자리를 마련해 놨습니다.”
루이스는 서둘러 시녀를 불러다가 내쫓듯 다이올드를 모시라고 지시했다.
끝까지 뭐라고 하려던 다이올드였지만 무소용이었다. 입으로 욕만 중얼대다가 결국 자리를 떠났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자 루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송구합니다. 그러니까…… 유리 님이라 했던가요?”
“유리 덴 나이트워커다.”
“루이스 베리온이라고 합니다. 모자라지만 남들은 절 황태자라고 부릅니다.”
“나도 그렇게 부르라는 건가?”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넉살 좋은 인상과 꽃 같은 미모를 지닌 루이스는 티 없이 웃었다.
동화에 나올 법한 잘생긴 왕자의 표본 같은 사내였다. 키도 크고, 체격도 괜찮고, 곳곳에 티 없이 가려진 근육은 단련의 증거였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루이스가 샴페인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뭘 탔을 줄 알고.
잠깐 동안 살펴본 루이스와 다이올드의 관계는 결코 평범치 않았다.
특히나 루이스가 다이올드를 잘 타이르는 모습.
[꼬맹아, 나만 이상하게 느꼈니?]‘아니. 나도 느꼈어.’
[그치? 저 루이스란 인간, 마치…….]‘다이올드를 부리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니, 착각이었으면 했다.
허나 다이올드에게 자리를 비워달라고 한 정중한 요청은 어째선지 요청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인 다이올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으나, 제 3자가 보기엔 마치 이랬다.
‘다이올드를 따르는 척, 그를 부려먹으려는 실세.’
가능성은 있다.
다이올드는 야욕만 넘칠 뿐 능력은 한참 부족했다. 눈치도 없고 아둔하기까지 하다.
괜히 차기 가주 후계 구도에서 물러난 미앵비슈가 부가주를 꿰차고 있겠는가.
설마 용인씩이나 되어서 황태자한테 휘둘리겠냐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유리는 최대한 표정을 고쳐지었다.
“백부님과 인연이 있어 보이는데. 무슨 관계지?”
“오래 전부터 저를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용인이 인간을 도왔다고?”
“용가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지는 않습니다. 다이올드 님 같으신 분도 있는 법이죠.”
루이스는 잔을 들고 난간에 기대어 밖을 구경했다.
늦은 밤이지만 밝은 빛이 가득한 거리가 별빛을 가릴 정도로 환했다.
“다이올드 님 덕에 그나마 나이트워커와 많은 교류를 하고 있지만, 현 황제 폐하께선 좋은 관계보단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로만 여기실 뿐, 그 이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이트워커와 좋은 관계라도 되고 싶다는 건가?”
“제국의 백성들이 더욱 번창하고 안전해질 수만 있다면요.”
선인 같은 대사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직 납치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는 없지만, 루이스가 납치 배후라는 추측이 유력했다.
그런 그가 백성을 위해서라고 지껄이는 꼬락서니가 실로 웃겼다.
유리는 울컥 솟구치는 신물을 삼켰다.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나한테 편지를 보내서 여기까지 오라고 한 이유가 뭐지?”
“별 거 없습니다. 그저 좋은 관계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백부님을 놔두고?”
“…….”
루이스는 말이 없었다.
대신 옅은 웃음기로 유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술을 뗐다.
“가주가 되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도와드리죠.”
“그걸 어디서 들었지?”
“다이올드 님으로부터 여러 얘기를 들어서요. 나이트워커에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인 혈통이 들어왔고, 활약이 범상치 않고, 또 이번에 황녀를 구했다고요.”
엘라트리오를 구출한 사람이 누군지 비밀에 부쳤거늘, 다이올드가 전부 불어댔을 줄이야.
이건 나중에 차차 따지기로 하고.
“가주가 되는 걸 돕겠다고?”
“나이트워커라 해도 제국 황실의 힘이 안 미치는 건 아닙니다.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방법은 알 바 아니야. 그보다 공짜로 해주는 봉사는 아닐 텐데.”
“바라는 건 없습니다.”
“없다고?”
“없습니다. 아무것도요.”
“그럴 리가.”
유리는 더욱 비죽거리다가 갑자기 웃음기를 지웠다.
“난 분명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장부를 없애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
순식간에 치고 들어가자 은은하게 유지하고 있던 미소가 잠깐이나마 비틀렸다.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면 그대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이번엔 유리가 지긋이 웃었다.
“겸손 떨지 않아도 된다. 대충 사정을 알고 왔으니까.”
“후우,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이렇게 대놓고 말씀하실 줄이야.”
억지로나마 웃는 낯짝이 퍽이나 우스꽝스러웠다. 애써 괜찮은 척 굴어봤자 별 수 없었다.
그래도 겨우 온전함을 되찾고는 말했다.
“맞습니다. 그 장부를 가지고 계셔서 도와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럼 장부를 없애달라고 해야지 나를 돕겠다며 거래를 해?”
“도움을 드린 뒤에 보상으로 요구할 생각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속보이면 첫인상 점수가 나쁘니까요.”
유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장부를 까발린다고 해서 루이스를 바로 몰아세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장부엔 흰꼬리 상단이라고 적혔을 뿐, 직접적으로 루이스가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방금 전 실토로도 불안정했다. 유리가 황태자를 몰아세울 형편이나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좀 더 확실한 것이 필요했다.
“내기를 하지.”
“내기…… 말입니까? 갑자기 무슨 내기를…….”
“내가 이기면 그대를 죽이겠다. 자백은 필요 없어. 장부고 뭐고 내겐 백부님과 같은 편인 자는 적이나 마찬가지거든.”
루이스에겐 그 무엇보다 불편한 제안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거짓이었겠으나, 상대는 용가의 사람이다.
죽이겠다면 정말로 죽이고도 남을 터. 그래도 황태자는 신중했다.
“만약 제가 이기면요? 장부를 없애주시는 겁니까?”
“아니.”
그렇게 싱거우면 수지 타산이 안 맞지.
유리가 말했다.
“장부와 더불어 황녀까지 없애주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