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77
제77화
엘라트리오는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표정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녀가 말했다.
“두 분 다 뭐 하시는 거예요.”
“엘라트리오, 난…….”
“아무 말 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기껏 축하해준다는 연회를 열어놓고 칼부림이라니.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계시잖아요.”
“…….”
“…….”
당사자들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루이스가 찌릿 유리를 노려봤다. 마치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곤 엘라트리오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구나. 미처 거기까지 헤아리지 못했어.”
루이스가 미안한 마음을 잔뜩 담아 용서를 구하니 이번엔 그녀의 시선이 유리를 향했다.
“유리 님도요. 이쯤 해두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지, 뭐.”
마지못해 유리도 검을 회수했다.
결국 대련의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
관객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이번 대련의 승리자가 루이스라고 수군댔다.
대련 내내 공격만 하는 쪽이 루이스였으니까 당연했다.
유리는 끝까지 승부를 보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정작 루이스는 달아오른 감정을 감추느라 온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유리가 말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그만하지. 아! 아까 얘기했던 건 여전히 유효하니까 필요하면 연락하도록. 나도 때가 괜찮으면 연락하지.”
“……알겠습니다.”
결국 루이스는 다른 사람들 틈으로 도망가듯 걸음을 옮겼다.
유리에게 얼굴로 피어난 감정을 들키기 싫었다.
패배도 짜증났고, 내기를 들먹이면서 속았다는 심정에 다시 한 번 화가 나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유리의 손에 놀아났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가 갈렸다.
‘유리……! 네놈을 언젠간 쳐 죽여 주마!’
그런 각오를 하면서도 루이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귀빈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엘라트리오는 유리에게 다가오더니 작게 말하되 입모양을 크게 해서 다그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기별도 없이 입궁은 언제 했고요!”
“말하지 않았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한다고.”
“그게 사람들 앞에서 대련이었어요?!”
“다 사정이 있었다.”
유리는 슬쩍 주변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듣는 귀가 없다는 걸 알고 ‘내기’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기가 막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날 죽이기로 작당모의를 했다고요? 대체 왜요?”
“진짜로 황태자가 그대를 죽이려 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괜히 헛짚어서 쫓으면 곤란해서.”
“그게 다예요?”
“더 있지. 루이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어. 그리고 다이올드 백부님과 접점이 있어서 나에 대해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도 궁금했고.”
“그런 거라면 저한테 묻지……. 후우, 그래서 어떤 사람 같았나요.”
“전형적으로 고귀한 신분을 타고난 자였어.”
알려졌다시피 루이스는 귀족가에서 유명했다.
이는 평판이 좋다는 뜻이고, 역설적으로 루이스 입장에선 평판을 신경 써야만 했다.
엘라트리오가 백성들의 지지를 열혈히 받고 있는 이상, 귀족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니까.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랬더니 루이스는 확실히 주변 시선과 명예를 중시한 나머지 무기를 버린 상대로 끝까지 싸우지 못했다.
내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셨네요. 오라버니가 납치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썼지만, 그래도 물불 가리는 성격이긴 해요.”
“루이스 황태자의 평판이야 밖에서도 유명하니까.”
애초에 귀족이나 황족은 이미지를 신경 쓰기 마련이다.
황태자는 오죽하겠느냐만.
유리가 본 루이스는 특히 주변 시선을 많이 의식했다.
“그런데도 납치를 했다는 건, 음. 꽤나 급했던 일이 있었나보군.”
“제가 납치되기 전에 귀족 몇몇이 폐하께 뭐라고 했다곤 하더라고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오라버니가 그 얘기를 듣고 엄청 화를 냈다더군요.”
그리 말한 엘라트리오는 차분해진 눈동자를 루이스 쪽으로 돌렸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분노와 더불어 씁쓸함도 덧묻었다.
언제 그랬냐며 그는 귀빈들과 하하호호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게까지 오라버니를 알아보셨으니, 이젠 어쩌실 거죠?”
유리도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갔다.
“당분간 황태자와 같은 편으로 움직일 거다.”
“저를 배신하려는 건가요.”
“아냐.”
유리는 단호했다.
“배신이 아니라 낚시질이야.”
“낚시라. 대충 뭔지 감이 오긴 하는데, 그냥 용병단을 추적해서 정보를 얻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용병단 건은 기대하지 마.”
“기껏 사람 부려 놓고 기대 말라고요?”
“용병단 추적은 무얼 기대하고 하는 추적이 아니야. 황태자를 조급하게 만들려는 거지.”
“아…….”
그제야 엘라트리오는 유리가 무슨 일을 한 건지 제대로 이해했다.
사실 루이스가 납치 사건을 꾸몄다고 했을 때, 유리는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굳이 납치를 해야 했을까?’
비록 차기 황제에 엘라트리오가 많이 언급됐어도, 엄연히 황태자는 루이스였다.
황태자 자리를 빼앗긴다면 몰라도. 그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엘라트리오의 말만 들어보면 그녀는 황제와도 사이가 나빴다.
그랬을진대.
납치라는 무리를 해가며 경쟁자를 제거하려 했고, 이는 급한 심경을 대변했다.
그리고.
용병단을 좇게 해서 다시 한 번 루이스를 급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내가 장부를 가지고 있잖아.”
“용병단 추적에 장부까지……. 오라버니라면 애가 타겠어요.”
“그렇지.”
따지고 보면 루이스는 유리에게 초대장을 보낼 이유는 있어도 명분이 부족했다.
초대장을 보낼 거라면 직접 도움을 받은 엘라트리오가 보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과장을 보태자면 루이스 입장에선 이미 유리와 엘라트리오가 한편이라 추측했으리라.
하지만 장부의 존재 여부를 알아내고 회수하기 위해선 유리와 직접 만나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접촉했고.
“미끼는 던져졌어.”
입질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 * *
연회 이후로 한 달이 흘렀다.
그 동안 유리는 계속해서 루이스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엘라트리오를 어떻게 끌어내릴지 의견을 나눴다.
물론, 유리는 루이스가 보내는 의견에 전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쓸모없는 정보를 전해줬다.
반면 루이스로부터는 의견만이 아니라 황녀의 일거수일투족도 전해졌다.
엘라트리오의 일상은 하나도 흠 잡을 것이 없었다.
연회 이후 바로 국정에 복귀했고, 여러 안건을 처리하느라 하루하루를 보냈다.
워낙 바쁘고 완벽하게 시간을 보내서 정치적으로 빈틈을 찾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결국 허황된 시간만 보내던 중.
한 소식이 전해졌다.
유리는 창가에 앉아서 저 밖에 다이올드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회에 갔다 온 이후로 다이올드는 툭하면 유리의 거처를 찾아왔다.
그렇게 와서 매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갔다.
종종 시종들을 붙잡고 루이스로부터 편지라든가 뭐가 오지 않았냐며 묻긴 했으나, 그때마다 시종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했다.
릴림이 입단속을 해둔 덕이었다.
마침 루이스에게서 온 서신을 전하려고 방에 온 릴림은 유리와 함께 창밖에서 멀어져 가는 다이올드를 구경하고 있었다.
“매일 오시네요.”
“신경 쓰일 거야. 황태자라는 줄까지 놓치긴 싫을 테니까.”
다이올드는 루이스와 유리의 관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루이스가 일부러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며, 유리도 루이스에게 당분간 비밀로 해놓자고 했다.
하지만 루이스와 단독으로 밀담을 나눴던 모습을 목격했기에 뉘앙스마저 지우진 못했다.
“오늘은 황태자가 뭐라고 보냈어?”
“엘라트리오 황녀님이 지방 파견을 간대요.”
“벌써?”
납치 사건 때문에 그간 엘라트리오는 지방 파견의 ‘지’자도 꺼내지 못했었다.
황제가 엘라트리오의 지방 파견을 그 동안 만류했었다고 한다.
걱정해서 만류한 게 아니라, 주변을 의식해서 안 보낸 거였지만.
어쨌든 한 달 만에 엘라트리오는 다시금 지방 파견에 나섰다.
이 소식을 황태자가 보내 왔다는 건…….
“기습하자고 하네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납치야? 암살이야?”
“학살이요.”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추진력 좋은 건 황족 전통인가. 다들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한지.
유리는 릴림이 읽고 있던 편지를 집게손으로 집어서 빼냈다.
엘라트리오가 언제 어디로 출발하고, 루이스는 이미 호위 병력을 포섭하고 기습할 병력까지 따로 고용했다고 알렸다.
다만, 많은 병력을 고용하지 못했고 렉슬러가 호위대 담당이라서 유리의 도움을 요구했다.
“한 번의 실패가 있었으니 불안해서라도 날 동원하려는 모양이네.”
“황태자 주제에 도련님께 요구하다니. 괘씸해요.”
“어쩌겠어. 우리 둘이 동맹 관계인 가장 큰 이유가 이거인 걸.”
“근데 황태자는 어째서 벌써 황녀를 없애려는 걸까요? 뭔가, 조급해보여요.”
“글쎄.”
유리도 황태자가 이렇게까지 무리하려는 이유가 궁금했었다.
첫 납치 때야 기회가 좋았거니 했어도, 이번 파견은 렉슬러까지 동행해서 여러모로 변수가 컸다.
헌데도 무리하려는 태도를 봐선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황태자를 조급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는 듯했다.
“일단 릴림, 블레이크를 불러와. 이자벨이랑 채럿도.”
“가실, 거예요?”
“부름에 응답해 줘야지.”
“네.”
릴림은 별 물음 없이 방을 나섰다.
유리는 자신이 쓸 수 있는 최선의 정예를 끌고 갈 생각이었다.
* * *
루이스는 고용한 용병 50여 명과 기사 몇을 데리고 숲에 몸을 숨겼다.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내려다보니 널찍한 길이 숲을 가로질렀다.
“이번엔 반드시 죽인다.”
유리에게 기습 작전을 기별하고 다시 몇 주가 지났다.
엘라트리오의 이번 파견 업무는 단순한 지방 파견이 아니라, 이웃 국가 왕자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장거리 여행에다가 비싼 선물을 마차 단위로 꾸리느라 본의 아니게 파견단의 규모가 커졌다.
루이스는 엘라트리오가 이번 여정에서 돌아오는 길을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황태자 저하.”
그때 정찰을 갔던 부하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뒤에서 접근했다.
“곧 황녀의 마차가 도달할 것 같습니다.”
“좋아. 유리는?”
“언덕 너머에서 대기 중입니다.”
숲길을 벗어나려면 매복을 지나 언덕을 넘어야 했다.
그 언덕에 유리와 그가 데려온 병력이 매복한 상태.
소수 정예이긴 하지만 나이트워커의 기사까지 대동했으니 적을 놓칠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부관은 걱정스러웠다.
“저하, 정말로 유리 님께서 저희를 도와주겠습니까?”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
“무례한 발언인 걸 알지만, 실상 유리 님께선 확인도 되지 않은 장부로 저하를 겁박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장부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제 말은, 겁박을 하고 있으면서 도와주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분께는 저희끼리 처리하라고 하는 게 속 편할 텐데요.”
“내가 비굴하게 도움을 청했다는 걸 꼬집고 싶은 거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그저…….”
부관의 말처럼 유리가 이번 기습을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반대로 루이스는 유리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래서 기습 작전이 세워진 뒤로 계속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헌데 유리에게서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전에는 주고받았던 편지가 기습에 대해 언급된 뒤로는 일방적으로 루이스가 보내고만 있었다.
마치 구걸하듯.
기약 없는 편지를 쓸 때마다 루이스는 형언할 수 없는 굴욕을 맛봤다.
그러다 엊그제가 되어서야 답장을 받았다.
“유리 입장에서도 내 힘이 필요하다. 내가 황제가 되어야지만 그 자도 가주가 될 수 있어.”
루이스는 그리 믿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그러니까 싫어도 도와야 한다고.
협박으로 움직이고 있긴 하나, 어찌됐든 둘의 관계는 상부상조가 우선시 되었다.
“걱정마라. 황녀만 죽으면 오늘부로 그딴 놈의 협박 따위 끝이다.”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루이스는 진득하니 웃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평소 젠틀한 미소만 봐왔던 부관으로썬 처음 상관의 잔악한 이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질겁했다.
제 얼굴에 그려진 감정을 전혀 모르는 루이스가 으름장을 놓듯 읊조렸다.
“오늘 유리까지 전부 죽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