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83
제83화
릴림은 한동안 제 주인과 침입자를 번갈아봤다. 빠르게 굴러가는 눈동자에 동요가 스민다.
천하의 카이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
용가를 적으로 만들어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이거야말로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저 여자를 죽여라.]순간 미뭉이 괜찮은 답을 줬다.
그래, 릴림을 죽여서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있었다.
운이 나빠서 유리가 정말로 죽는다면 릴림에게 뒤집어씌우는 방법도 있다.
미뭉을 뽑으려고 손을 아래로 뻗었다.
“쉿.”
릴림이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그녀는 떨어진 초콜릿을 주워 쟁반에 돌려놓고 침대에서 이불을 끌어왔다.
그리곤 유리를 조심스레 바른 자세로 잡아주고 덮어줬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흑수정 조각은 그녀의 조막만한 손이 살살 쓸어서 모았다.
“흑수정, 준 거죠?”
“흑수정을 알고 있나.”
“알죠.”
어떻게 아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안다면 아는 것이지 정보의 출처는 무의미했다.
그보다는 릴림이 이 상황을 받아들여준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녀는 유리 옆에 주저앉았다. 이대로 기다릴 요량이었다.
“도련님, 진짜 무식.”
“제 주인을 흉보는 건가.”
“흉봐도 돼요. 도련님 보면, 가끔 제 심장이 아플 정도에요.”
“심장이 아프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유리가 학대라도 하는 걸까? 아니, 녀석의 성정을 따져보면 남을 쓸데없이 해칠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해? 하지만 릴림이 자해할 이유가 무어가 있겠는가.
일전에 유리와의 관계를 보니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녀는 나름 현재 생활을 만족했다.
레벤나로 인해 받았을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극복한 듯했고.
카이는 그들을 보다가 물었다.
“어째서 날 바로 공격하지 않았지?”
“흑수정 드신 거, 알았다니까요.”
“처음엔 몰랐지 않았나.”
초콜릿이 쟁반에서 떨어질 때.
분명히 릴림에게서 짤막한 살기가 흘렀었다. 괜히 미뭉을 꺼낼 준비를 했던 카이가 아니었다.
“넌 나를 바로 죽였어야 했다.”
“왜 그렇게 싸우려고만 해요?”
“왜 소리 소문 없이 습격한 사람을 안 죽이지?”
“습격 안 한 거, 다 알았다고요.”
“생각보다 몸이 먼저여야 한다.”
“훈수, 하지 마요.”
“…….”
좀처럼 릴림이 이해되질 않았다.
카이는 만약 습격자를 보면 묻지도 않고 죽였을 것이다. 뭐가 되었든 가문에 몰래 들어왔으니까.
흑수정을 이용해서 유리를 암살하려 했다는 판단도 충분했다. 그 편이 자연스러웠다.
더구나 릴림은 유리를 향한 충성도가 높았다.
제 주인이 쓰러진 걸 보고 암살이라 판단하는 편이 훨씬 옳았다.
“도련님이 당신을 믿으니까요.”
릴림이 한숨을 지으며 답했다.
“도련님께서 당신을 구한 건 믿어서예요. 전 도련님을 믿으니까, 그래서 당신도 믿어요.”
“어이가 없군.”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믿음이라니.
그딴 걸 믿고 살아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믿어서 얻는 것보다 믿었다가 잃은 것이 더 많았던 전생에서 카이는 타인을 배척하기로 결심했었다.
그렇기에 릴림에게 한 마디라도 해주고 싶었다.
유리도 필요하다면 그녀를 버릴 거라고. 멸망의 미래를 알고 있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다며.
그런 카이의 심경을 알아챈 걸까.
“전 도련님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어요.”
“갑자기 뭔 소릴…….”
“내 믿음을 의심하지 말라고요.”
“유리도 너와 똑같이 생각할까?”
“똑같지 않겠죠. 그래도, 괜찮아요. 전 도련님께 한 번 구원받았는걸요.”
카이도 그렇고 유리도 모르겠지만.
릴림은 유리에게 큰 감사를 느꼈다.
그저 자신을 스승과 호위로 뽑아 곁에 두었을지라도, 그녀에겐 이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친하게 말을 걸거나 비밀을 나누었던 사람도 전혀 없었으니.
남이 보기에 유리의 행동은 작지만 릴림에겐 더할 나위 없이 컸다.
그러니 유리를 믿었고, 유리가 믿는 카이도 믿었다.
“그리고 당신이 도련님을 죽이려 했다면, 당신도 날 죽였어야 했어요. 근데, 안 죽였잖아요.”
“…….”
그녀의 말이 맞았다.
평소의 카이대로였다면 의심의 여지를 남기기도 싫어서 릴림을 어떤 식으로든 제압했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한 걸까.
“네놈이나 네놈 주인이나 하나같이 짜증나는군.”
“싸울 거예요? 귀찮은데.”
“나도 귀찮은 건 질색이다.”
휙!
카이는 그대로 창가로 가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멀어지는 소리마저 없어지고 나서야 릴림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하아. 힘든 사람.”
실은 릴림도 카이를 봤을 땐 절로 긴장했었다.
쓰러져 있는 유리와 돌아서려던 카이. 당연히 ‘혹시?’라는 불안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즉시 싸울 준비를 했으나.
‘당황해했어.’
카이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지 모르겠다.
그는 엄~청 당황해 하고 있었다.
마치 부모님 몰래 단걸 찬장에서 빼먹다가 들킨 아이 같은 표정이랄까.
결국 그런 카이도 다시금 날카로워졌으나.
그래도 카이를 믿었다.
“우으, 피곤해.”
긴장이 풀리자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자러 가고 싶었지만 밤새 유리를 지켜봐야 했다.
릴림은 무릎을 끌어안고 그 안에 얼굴을 묻었다.
* * *
흑수정을 먹고 한동안은 온몸의 열기와 통증을 고스란히 느꼈다.
뼈까지 녹는 고통에 차라리 살을 잘라서 뜨거워진 뼈를 도려내고 싶었다.
몸은 꼼짝을 않았으며 감각만 살아있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지는 또 다른 괴로움을 선사했다.
격통에 격통을 거듭하며 죽고 싶다는 욕구와 버티자는 의지가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러다 죽음의 수면이 넘실대는 그 순간.
[우리…… 도와…….] [……서 안 돼.]갑자기 통증이 확 가시더니 동시에 여성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고통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풍경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 왔다.
색이 없는 공간. 검은 공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색이 없는 세상.
빛이 통과할 수조차 없는 어둠으로 휩싸인 세계에서 유리는 몸뚱어리 없이 부유했다.
소리는 계속 들렸다.
[……미 없어. 불행…… 기다…….] [그래…… 도와……고?] [……마음 아니었……?] [과실을 먹…… 그 아이 의지. ……그뿐.]뭐라고?
두 사람의 말들이 마디마디 끊겨서 들렸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물어보려 했으나 목소리가 안 났다.
애초에 그녀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확실한 건 두 명 다 어디서 들어본 음성이었다.
두 사람은 시시한 실랑이를 주고받았다.
한 명이 무언가를 요구하면 다른 한 명이 왜 그래야 되냐는 식으로 튕겼다.
대화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반복되다가 결국 한쪽이 포기했다.
[별 수 없네.]이번 음성은 선명했다.
선언과도 같은 말소리에 까맣던 세상은 껍질이 깨지듯 금이 가면서 빛이 파고들었다.
빛은 곧장 유리를 덮쳤다. 눈앞이 흑에서 백으로 전환된다.
겨우 사라질 줄 알았던 고통들이 느껴지지 않는 동안 축적되었던 것처럼 배가 되어 밀려왔다.
유리는 기어코 잡고 있던 끈을 놓쳤다.
“아…….”
찰랑.
몸이 깨어나자 수면에 뜬 얼음 조각들이 흔들렸다.
눈을 뜬 유리는 제 몸이 얼음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다.
도리어 몸에 남은 열 때문에 목 위가 후끈거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알몸은 아니다. 목욕 가운을 입은 채였다.
아직, 살아 있었다.
“으으!”
욕조 틀을 힘주어 잡자마자 잠잠하던 두통이 이마부터 뒷골까지 자극했다.
무너지려던 근육에 간신히 힘을 주었다.
[좀 더 누워 있으렴.]티르빙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유리는 자연스레 욕조에 몸을 기댔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
[대략 15일.]“저체온증 안 걸리고 용케 살았네.”
[피를 다루는 이 언니가 있는데 저체온증은 얼어 죽을. 오히려 얼음 아니었으면 정말로 뇌가 녹아서 죽었을 걸. 그 정도로 심각했어.]전혀 기억이 없다.
아픈 감각이 기억이라면 그것이 유일했다.
그밖에 까만 세상, 어떤 여자들의 대화, 빛, 다시 고통, 그리고 지금.
멍한 유리의 정신을 깨우려는 듯 티르빙이 핀잔을 늘어놓았다.
[내가 자는 동안 카이랑 뭔 짓을 한 거니? 둘이 싸웠어? 설마 그 애가 죽이려고 했니?]“흑수정을 먹었어.”
[……내가 잘못 들었길 바라.]“흑. 수. 정. 먹. 었. 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겠어.]“잔소리야, 아니면 비꼬는 거야?”
[둘 다.]유리가 키득 웃었다.
하긴, 흑수정을 먹고 괴로워하던 카이를 묘사한 장면에서도 그는 죽고 싶다는 말을 수도 없이 뱉었었다.
그 정도로 괴롭다는 걸 알면서도 흑수정을 삼켰지만, 역시 텍스트와 체험은 격이 달랐다.
“카이는 한 번 죽고, 두 번째에는 두 달 만에 깨어났으니까. 15일이면 양호하네.”
[대체 어쩌자고 흑수정을 먹은 거니?]“전에 말했었잖아. 언젠가 필요하다고.”
흑수정에 관해선 카이보다 유리가 더 잘 알았다.
일종의 소화제 역할이라고 알려졌으며, 카이도 그 정도로만 알고 있을 터.
그러나 먼 미래에 마법학회와 솔리드녹스가 흑수정 광산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진다.
‘흑수정이 악마들이 다루는 검은 마나에 내성을 길러줬지.’
카이가 처음 흑수정을 먹었을 때 죽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악마와 대적하던 카이는 검은 마나에 오염이 되면서 이를 중화시킬 목적으로 흑수정을 먹었었다.
하지만 깊게 오염되는 바람에 흑수정의 내성 효과가 도리어 오염된 카이마저 죽였다.
카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솔리드녹스가 마법학회와 다투면서였다.
[그러니까! 악마한테 내성이 있는 걸 알면서! 악마랑 비슷한 내가 있는 것도 알면서! 그런데도 먹었다는 게 이 언니는 불만이라고.]“전에는 먹자고 동의했으면서.”
[적어도 말을 하고 먹어야지!]“귀찮다며 잤잖아.”
[그건 카이가……! 에휴, 됐다. 내가 뭘 바라니.]말싸움에서 진 티르빙은 혀를 찼다.
티르빙이 말렸어도 결국 달라지는 건 없었다. 흑수정을 먹었을 거고, 사경을 헤맸겠지.
[덕분에 그 15일 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긴 하니. 그 여자가 얼마나 날 싫어하던지.]“여자? 설마…… 그 대화?”
정신을 잃는 동안 들렸던 한 대화.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다 했다.
그러면 다른 여자는?
[나랑 별빛나무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어.]“아…….”
뇌리에 한 여자의 얼굴이 스쳤다.
별빛나무 과실을 먹었을 때 만났던 그 여자. 티르빙은 그 여자를 만난 것이었다.
[흑수정 영향 탓인지 별빛나무의 의식이 내 의식으로 끌려오더라고. 그래서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어.]“무슨 얘기 했어?”
[그냥, 뭐 이런저런 얘기.]“……그게 다야?”
[여자들만의 비밀이란다, 꼬맹이. 나도 사생활이 있어.]“난 너한테 사생활이 없잖아.”
[나 몰래 흑수정 먹어놓고?]“…….”
[별 얘기 안 했어. 그러니까 인상 구기지 마. 말했다시피 그 여자가 날 싫어해서 설득하던 것뿐이야.]“마검이라서 싫대?”
[싫은 정도가 아니라 경기를 일으키던데?]티르빙이 서러운 말투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별빛나무 입장에선 마검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유리에게 흡수되었었다.
어디 입주를 했더니 다른 입주민이 있는 꼴이었으니. 심지어 그것도 보기 싫었던 입주민이라면…….
확실히 싫을 만도 했다.
[그래도 잘 설득해서 같이 으쌰으쌰 하자고 했지. 어쨌든 우리 둘 다 너한테 의지하는 삶이잖니.]“그럼 별빛나무의 의식은?”
[나랑은 달리 계속 잠들어 있을 거야. 깨우려면 흑수정을 더 먹던가. 아니면 별빛나무가 완전히 흡수 될 때까지 기다려야지.]“음…….’
눈을 감고 단전과 육체에 돌고 있는 마나에 집중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비하면 따로 놀던 별빛나무의 마나 중 6할이 코어로 들어왔다.
코어 크기는 당연히 커졌고, 이전보다 순도도 훨씬 높아졌다.
‘완벽히 녹아들면 드래곤 하트에 버금가는 순도가 나오겠어.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나량과 순도는 높아졌을지언정 여전히 6서클이었다.
물론, 당장 서클을 올리긴 어렵다.
남들은 몇 년 동안 겨우 수련해야지만 서클을 올렸으며, 이미 유리는 같은 나이대에 비해 높은 경지를 이뤘다.
그러나 아직 한참 부족했다.
특히 카이.
강해져서 돌아온 그를 보니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한없이 치솟았다.
유리는 턱 아래까지 물속에 잠겼다.
“슬슬 다른 걸 배울 때가 됐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