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84
제84화
욕조에 잠긴 유리는 배우고 싶은 것들을 머릿속에서 추려냈다.
검술, 마법, 정령술, 궁술, 암기 등등.
도서관에서 이론으로 외운 것들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외우지 못한 이론들은 잊어 먹을까 봐 도서관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적어놔서 방안에 종이뭉치로 한 가득이었다.
‘뭘 배우면 좋을까.’
그 동안은 티르빙과 마나의 순도만으로 어찌저찌 해결했다지만, 선택의 폭이 턱없이 좁았다.
무엇보다.
티르빙에게 의존할 수만은 없다.
이제부턴 이름이 알려진 이상, 티르빙 없이도 상황 대응이 가능해야 했다.
가령 메테오 같은 마법을 파훼할 다른 마법이 필요했다.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어. 가문의 비기를 배워야지.]“흑비(黑飛)라면 그것도 이론은 다 알아.”
[알면서 왜 안 익혀?]“생도가 벌써 흑비를 썼다간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자유의 관에 들어갔다고 가문의 검술이나 특유의 합격기를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유의 관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는 생도들을 모아서 선발하는 기관. 육성이나 훈련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선발된 자들만 수습기사로 기사단에 입단해서 본격적으로 가문만의 방식을 따라 훈련을 받았다.
나이트워커 대대로 전수되는 검술 ‘흑비(黑飛)’도 수습기사 때부터 배운다.
현존하는 검술들 중 이론상 10서클까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검술인 흑비.
유리도 흑비의 이론을 도서관에서 전부 외워서 나왔다.
그 흑비를 1티어 섹터에서 외운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흑비는 가문의 기밀 중 기밀. 내가 아무리 혈통을 인정받았어도 흑비만큼은 예외야.”
[몰래 하면 되지.]“검술 자체가 화려해서 안 돼. 방출되는 마나도 워낙 이질적이어서 들키기 쉬워.”
만에 하나 흑비를 훈련하다 들켰다간 엄청난 추궁을 들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외웠다는 핑계를 대도 오히려 왜 외웠냐고 혼날 테지.
그만큼 가문에게 흑비는 특별하고, 또 비밀스러웠다.
[마법은 어떠니? 그 동안 마법을 제대로 배웠던 적은 없잖아. 어차피 메테오 같은 무식한 마법을 대응하기 힘들어서 뭐가 더 배우고 싶은 거라며.]“으음, 마법이라…….”
그러네.
이제 보니 가문에는 제대로 된 마법사가 없었다.
밖에선 궁중마법사 대우를 받을 마법사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가르침이 아니라 기사단 소속 전투 요원들이었다.
그나마 가르쳐 달라고 할 만한 사람이라면…… 딱 둘.
끼익.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려는 순간.
욕실 문이 살짝 열렸다.
열린 틈으론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목소리만 저 너머에서 전해졌다.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릴림이었다.
유리는 목만 길게 빼고 답했다.
“어, 응. 방금 전에 깼어.”
“다행이다. 영영 못 일어나는 줄 알았어요.”
“미안. 나도 이럴 줄은 몰랐어.”
“우선…… 옷가지, 여기 둘게요. 갈아입으셔요.”
“고마워.”
“아아, 그리고오…….”
열린 틈으로 드리운 릴림의 그림자가 떠나길 망설였다.
할 말이 있나. 유리는 물속에서 조금 상체만 일으켜서 귀를 세웠다.
“마님께 잘…… 말씀, 해주세요.”
“엉? 뭘 잘 말해달라고?”
“……가볼게요.”
영문 모를 말만 남긴 채 릴림이 떠났다.
나가는 걸음걸이가 어째 도망가는 느낌인 건 착각일까.
‘뭐지. 왜 저래.’
[글쎄에에~. 뭘까?]‘뭐 알고 있으면 말해줘. 괜히 놀리지 말고.’
[이 언니는 몰라요. 안다면 저 애만 알겠지.]‘…….’
어쩐지 쎄한 느낌이 든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유리는 별 일 아니라며 가벼이 치부했다.
그보다는 얼른 열이 식혀서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 *
대충 옷만 편하게 갈아입은 유리는 곧장 샤를린느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가장 걱정했을 사람이 어머니였기에 우선적으로 만나서 안부를 전해야 했다.
똑똑.
“들어와요.”
노크를 하고 들어서자 유리는 멈칫거렸다.
집무실이라고 했지만 흡사 자신의 방과 상태가 비슷했다.
책장에 있어야 할 책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으며, 바닥엔 카펫보다 흐트러진 종이가 훨씬 많았다.
코끝을 찌르는 진한 잉크 냄새는 향수와 꽃을 대신했다.
그 가운데 책상에 앉아서 종이와 책을 번갈아 살피던 샤를린느는 뒤늦게 아들을 발견하고 한달음에 뛰어왔다.
그녀는 유리의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뜯어봤다.
“괜찮은 거니?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데는? 어지럽거나 속이 아프진 않아?”
“어머니.”
“말도 없이 하루아침 만에 쓰러져 있어서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거야.”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유리는 어머니의 손을 잡아서 조심스레 내렸다. 그리고 꼭 쥐었다.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작은 흔들림이었으나 어머니의 걱정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매번 걱정만 드리는 거 같네요.”
“하아.”
그제야 샤를린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떨림도 잦아든다.
그 동안 잘 못 먹어서 야윈 것만 빼면 아들은 멀쩡했다.
그녀는 시녀에게 “먹을 걸 갖다줘. 부담 없는 걸로.”라고 말한 뒤 유리의 손목을 잡아끌고 창가 테이블로 데려갔다.
오랜만에 마주한 아들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다.
“황녀 일 때부터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해서 놀랐어.”
“거듭 죄송해요. 말할 타이밍이 늘 없어서…….”
“타이밍이 없다 해도 무리하진 말렴. 뭐든 간에 건강이 우선이야. 알지?”
“네.”
“그래, 황녀 일은 뭐였니? 갑자기 엘라트리오 황녀가 널 가주로 지지한다고 했다면서.”
“아, 그게…….”
유리는 엘라트리오 납치 사건과 루이스에 관해서 전부 털어놨다.
애써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감추지 않았다. 어머니니까. 그녀도 전부 알 권리가 있다.
덤으로 2주 전 카이가 흑수정을 건네줘서 그걸 먹고 기절했다는 설명도 붙여야 했다.
이 부분에서 샤를린느는 카이를 혼쭐내 줘야겠다며 장난스러운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분위기가 풀어질 무렵이 되자, 릴림이 먹을 걸 들고 들어왔다.
“마님, 먹을 거요.”
“으응, 그래. 가져오렴.”
샤를린느가 손수 문까지 가서 쟁반을 받고 돌아왔다.
이번에도 릴림은 달아나듯 방을 벗어났다. 워낙 얌전한 그녀라서 달아난다는 발걸음이 티가 났다.
이상한 건 릴림만이 아니었다.
쟁반을 받아든 샤를린느도 릴림의 뒷모습을 골똘히 보다가 테이블로 왔다.
“자, 아들. 간소하지만 같이 식사나 할까.”
“그러죠. 근데 어머니. 저 기절한 동안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아니, 뭐랄까. 릴림도 그렇고, 방금 전 어머니도 그렇고. 다들 어색하다고 해야 되나. ……혹시 릴림이 사고 쳤어요?”
“사고까진 아니고. 으음……. 설명하자면, 네가 어떻게 목욕 가운을 입었을지……. 엄마는 잘 상상이 안 되더구나.”
“……네……?”
따듯한 스프에 빵을 찍던 유리의 손이 얼어붙었다. 아래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데도 손끝이 시렸다.
샤를린느는 능글스러운 웃음기를 감춘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렇잖니. 이 엄만 네 옷을 갈아입히지 않았어. 그러려고 했지만 벌써 누가 갈아입히고는 욕조에 넣었더구나.”
“…….”
“다른 시녀들 말로는 네가 쓰러진 날 릴림이랑 한 바닥에서 같이 잤다고도 하던데.”
“…….”식욕이 갑자기 사라졌다.
하아, 릴림이 잘 말해달라는 게 이거였네.
어쩐지 오면서 시종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긴 했었다. 학교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져서 그 소문의 주인공이 된 듯했다.
유리는 빵을 내려놨다. 지금 식사를 할 때가 아니었다.
“아니에요, 어머니. 뭘 상상하시는지 몰라도, 그거! 절대 아닙니다!”
“난 우리 아들 믿어.”
“목적어를 붙여주세요.”
“벌써 이렇게 자라줘서 고마울 따름이야.”
“아니, 아우. 하아……. 아닙니다. 아무튼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그래그래. 아무 일도 없었겠지. 없었고말고.”
어째 설득이 안 된 기분이 들었지만, 유리는 그냥 포기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유리 본인조차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으니 설명이 되질 않았다.
나중에 티르빙에게 따져보니, 릴림이 채럿에게 부탁해서 채럿의 토끼가 유리의 옷을 갈아입혔다고 한다.
물론, 그런 진실이 있어도 채럿의 드루이드 능력이 아직 비밀인 이상. 어머니의 오해는 영영 풀 수 없었다.
“어머니도 진짜…….”
에휴, 유리는 한숨을 지으며 빵을 우겨넣었다. 어머니도 얄궂은 웃음기를 밴 채 수저를 들었다.
이후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몇 더 주고받았다.
이번엔 어머니가 하는 일들에 관해서 들었다.
원래 겔런이나 빌이 맡아야 하는 가문의 회계 업무를 완전히 샤를린느가 맡게 되었다고 한다.
일전에 몇 가지 줬던 업무를 잘해 준 덕분이었다.
최근엔 가문의 상단도 맡아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받아서 이것저것 공부하느라 바빠졌다.
‘어머니도 노력하고 계시구나.’
무엇을 위해, 또 어떤 생각으로 샤를린느가 가문의 업무를 맡기 시작한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물으면 대답해주겠지만.
들을 필요도 없이 일거리를 하나씩 얘기할 때마다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분명 만족스러워 하고 계신 거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 맞다. 어머니.”
문득 유리는 화제를 바꾸었다.
어머니와의 대화에 흠뻑 취하는 바람에 물어보려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거야 말로 물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없었다.
괜히 치부를 건드리는 꼴이 아닐까 우려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법 가르쳐주실 수 있으세요?”
“마법? 나한테?”
샤를린느는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저번에 별빛나무 앞에서 마법 쓰시던 거,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께 잠깐 배운다고 나올 수준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사실인 걸.”
“무영창으로 마법을 쓰셨잖아요.”
마법진에 들어가는 룬 문자와 술식, 그리고 입으로 뱉는 언어는 마법을 완성시키는 공식이다.
무엇 하나 빠져선 안 되고, 하나라도 틀렸다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그런 마법을 샤를린느는 주문을 빼고 시전했다.
무영창 마법을 쓰기 위해선 언어 대신 다른 걸로 치환해야만 했다.
가장 쉬운 방법으론 아티팩트가 있다.
아티팩트는 설계 단계부터 주문 없이 마법을 발동시키도록 만들어져서 마나만 불어넣으면 작동했다.
다른 방법으론 마나를 음파 형태로 형성해서 대신 주문을 외우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나를 음파로 바꾼다는 건 마나에 대한 이해도, 친화력, 섬세함을 갖춘 고위 마법사만이 가능한 기술.
유리나 카이조차 엄두내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그런 무영창을 해낸 샤를린느는 엄청난 마법사임이 확실했다.
“다른 건 더 묻지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을게요. 마법만 가르쳐주셨으면 해요.”
“하지만 아들아. 나이트워커에선 마법에 시간을 쏟기보단 검이 더 인정받기 좋지 않겠니?”
“물론 그렇죠.”
유리도 되도록 검으로만 성장해서 검으로만 인정받길 원했다.
나이트워커는 대대로 검에 충실했던 가문이기도 하고, 벤헬링턴 또한 검에 많은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역사서에서 나오는 역대 모든 용가의 가주들은 검보다 마법을 통해 서클을 올렸다.
통상적으로도 마법이 서클 상승에 더 효과적이다.
근본적으로 마법이 마나를 다루는 학문이니 당연했다.
나이트워커가는 이런 법칙을 무시하고도 검만으로 최강의 자리에 올랐기에 더욱 높은 평판을 받았지만.
“그렇지만 검만으로 인정받는다면 미앵비슈 고모님이 가주가 됐을 겁니다. 할아버지라면 억지로라도 고모님을 가주에 앉히셨을 거예요.”
“마법을 익힌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거 같다만…….”
“크게 달라지진 않겠죠. 하지만 완벽에는 가까워지겠죠. 완벽은…… 가주의 덕목이고요.”
가주는 검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마법도 아니다.
적어도 용가의 가주는 완벽한 자가 되어야 한다.
완벽해지지 못하더라도 완벽을 끊임없이 추구하여 완성형에 다가간다.
그것이 나이트워커의 가주로서 어울리는 덕목.
샤를린느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고민에 잠겼다. 정적이 길게 흐른다.
고민과 고뇌 사이쯤에서 마음이 갈팡질팡 거렸다.
잠시 후. 그녀는 마지못해 결론을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