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85
제85화
“안 되겠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하지 못한 단호함이었다.
사정이 있을 테니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샤를린느는 그보다 더 강단 있는 답을 줬다.
“이 엄만 마법을 가르칠 수 없어.”
“그렇군요.”
유리는 낙담하지 않았다. 왜 그러냐며 묻지도 않았다.
아무리 어머니이자 가족이어도 그녀 개인 사정도 있는 법이니까.
정작 샤를린느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아들이 신경 쓰였다.
“이번에도 궁금해 하지 않는구나.”
“묻지 않겠다고 했었으니까요.”
“차라리 물어봐준다면 대답해줄 수 있어.”
“어째서요?”
“넌 내 아들이니까.”
그리 말한 샤를린느가 완전히 수저를 내려놓곤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너희 아버지께 마법을 잠깐 배웠다는 건 거짓이 아니란다. 하지만 네가 본 대로 무영창으로 마법을 쓴 것도 맞지.”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내가 마법사라면 말이 안 되겠지. 하지만 마법사가 아니라면?”
마법사가 아니면서 무영창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경우라.
더 말이 안 되어서 선뜻 떠오르질 않는다.
아니, 떠오르긴 하지만. 감히 상정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유리를 사로잡은 가능성은 그의 시선을 황망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조금이나마 호기심 해소에 도움이 됐니?”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 *
유리가 마법을 배울 스승으로 점쳤던 사람은 어머니 샤를린느, 그리고 이자벨이었다.
비록 서클 면에선 유리와 비슷할지라도.
솔리드녹스에서 촉망받았기도 했고, 불의 영혼 계승자이기도 한 그녀는 마법 면에선 유리보다 이론과 실전 모두 빠삭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워 하던 그녀였지만, 역으로 유리에게 검을 배우기로 하면서 거래(?)가 성사되었다.
그렇게 마법을 제대로 배우는 첫날.
서재에 찾아온 이자벨은 책들을 한아름 들고 왔다.
그것들을 책상에 내려놓자 근처에 있던 종이들이 펄럭거렸다.
상상도 못한 양에 유리는 실소를 흘렸다.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책으로 퉁 치려는 건 아니지?”
“가르치는 건 가르치는 거고. 외워야 할 것들이 먼저다.”
“음.”
유리는 맨 위에 있던 책부터 집었다.
아는 표지였다. 혹여 내용이 다른 건가 해서 펼쳐봤지만 도서관에서 전부 외우거나 이미 필사를 한 내용들이었다.
다음 책, 다음 책, 그 다음 책도 마찬가지.
“이거 다 아는 거야.”
“이걸 다 안다고?”
“응. 몇 가지는 다시 읽어야 하지만…… 거의 다 알아.”
“이해는…… 했겠지?”
“마법을 이해도 못 하고 다 안다고 하면 허세지.”
기껏 준비를 해 왔더니 다 안다는 말에 이자벨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탈한 감정은 둘째 치고, 이 많은 서적을 읽은 것도 모자라 이해까지 했다고 하니 내심 놀랍기만 했다.
‘나도 몇 년 동안 겨우겨우 이해하면서 외운 걸 벌써 다 봤다고?’
마법 서적 대부분은 암기만 해도 읽기 힘들었다. 이해하지 못하면 외울 수 없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즉, 이해와 암기가 같이 이뤄져야지만 서적을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유리는 그걸 다 이뤄낸 셈.
이자벨은 의자에 주저앉으며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이러면 내가 가르칠 게 없지 않은가.”
“준비 많이 한 거 같은데, 미안.”
“아냐아냐. 전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잘됐어.”
“응? 잘됐다고?”
“이거.”
이자벨은 제일 밑에 있던 책 몇 권만 쏙 빼내서 건넸다.
표지와 제목조차 없는 책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얇았다. 대신 안에 든 내용은 처음 봤다.
기괴한 문양, 기하학적 마법진, 특이한 룬 문자의 배열.
언뜻 봐도 비범한 마법서가 확실했다.
그런 와중, 정갈한 글씨체는 어디서 본 기억이 있었다.
“네가 필기한 거야?”
“바로 알아봤군.”
그녀도 공책 하나를 집어서 촤라락 넘겼다.
“솔리드녹스에 있을 때 베꼈던 것들이다. 그곳에만 있는 마법서들이라 밖에선 알려지지 않은 마법들이지.”
“솔리드녹스 마법이라고? 잠깐만, 이걸 나한테 가르쳤다가 그쪽 가문에서 문제 삼으면 어쩌려고.”
“나랑은 상관없다.”
“…….”
칼 같은 태도에 더 이상 뒷말을 잇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아도 잠깐의 말투 속에서 적대감이 비쳤다.
그녀한테 솔리드녹스는 아직 아픈 손가락이겠지.
그녀는 한순간 무거워진 공기를 느끼고 표정을 고쳤다.
“아아, 미안하다. 괜히 날을 세웠군. 아무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문에서 쫓아낼 때 이런 일까지 예상 못 할 자들은 아닐 테니.”
“뭐, 그렇다면야.”
이는 서클 상승보다 더 좋은 기회였다.
솔리드녹스의 마법은 1서클 파이어볼을 쓰더라도 형식부터 다르기로 유명했다.
훨씬 효율적이면서 위력도 컸다.
소위 최적화가 잘 되어서 낮은 서클로도 고위 마법사 못지않은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면 내가 부담스러워지네.”
“이러려고 내게 가르쳐 달라고 했던 건 아니고?”
“솔리드녹스의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뭐어…… 아니라곤 못하지.”
그리 말하면서 유리도 미리 준비한 서적 몇 개를 책상 아래서 꺼냈다.
이자벨이 준 노트처럼 도서관 1티어 섹터에서 필사해온 검술서였다.
“솔리드녹스의 마법서……까진 아니지만, 너한테 어울릴 만한 검술이 하나 있어서 챙겨봤어.”
“으음…… 뤨르? 뤠러? 뤼럴?”
첫 장에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적혔는데도 발음이 꼬여서 나온다.
유리가 또박또박 말해줬다.
“렐름. 렐름이라고 읽어.”
“아하, 렐름. 그렇군. ……렐름? 잠깐만, 이거 마리 님이 쓰신……?!”
“어, 맞아.”
“허어어억!!!”
놀란 이자벨은 못 만질 걸 만진 듯이 책을 고이 내려놓고 황급히 물러섰다.
나이트워커의 봉신 가문이자 또 다른 용가 스테이트 가(家) 출신인 마리.
스테이트 가에는 그들 고유의 검법이 따로 있었으나,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를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마리였으며, 그녀는 자신이 완성한 검법을 서적으로 남겼었다.
원작에선 나이트워커가 멸문하면서 렐름 검법도 명맥이 끊긴다.
그 명맥을 잇게 할 의도는 아녔으나, 마법과 레이피어를 쓰는 이자벨에겐 렐름 검법이 제일 알맞았다.
이자벨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이이이이이이이, 이걸 내가 배워도 되, 되돼, 대, 되는 건가?”
“할머님께는 말씀드려 놨어. 그랬더니 해볼 테면 해보라고 하시더라고.”
“오오!”
렐름 검법은 흑비만큼 화려하면서 좀 더 경쾌함과 속도에 중점을 뒀다.
다만, 레이피어 특성상 방어가 취약해서 흘리기와 반격이 방어술을 대체했는데, 이게 상당히 난이도가 높았다.
마리도 나름 이걸 누구한테 가르쳐보겠다고 했었다가 포기해버렸다.
“일단 암기부터 하자고.”
“그그, 그러지! 나도 얼른 보고 싶다!”
둘은 각자의 노트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유리는 의자에 좀 더 깊게 기대어 눕다시피. 이자벨은 창가 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읽는 스타일도 달랐다.
조용히 글자를 읽고 입으로 곱씹는 유리와 달리, 이자벨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감탄사를 내 뱉었다.
그렇게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솔리드녹스의 마법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유리도 감탄을 내지를 뻔했다.
‘역시 마법사 가문. 같은 마법도 전혀 다르게 해석이 가능하구나.’
당장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했다.
솔리드녹스가 추구하는 마법은 추상적이면서도 근본적이었기 때문이다.
마나를 모으고 운용하는 법, 하물며 코어에 필터링하는 방식까지. 기존에 알던 것들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가 달랐다.
유리는 마법서를 보면서 그들의 마법이 무언가 닮아있음을 알았다.
“이자벨.”
“으응? 뭐지? 궁금한 거라도 있나?”
“읽다 보니까 느낀 건데, 마법보단 정령술에 가까운 거 같아서. 이게 맞는 건가?”
“제대로 이해했다.”
정령술.
자연에는 여러 형태의 마나가 존재한다.
불, 물, 땅, 바람, 나아가 하늘이나 바다, 어둠까지도 저마다 에너지원이 있으며 이를 마나라 부른다.
그리고 이런 원초적 형태의 마나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
이 영혼들을 소환해서 다루는 걸 정령술이라 불렀다.
그러나 정령술은 용언 마법만큼이나 다룰 줄 아는 이들이 극히 드물었다.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아야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엘프족 중에서도 소수 정도.
현재의 용인들 중에서도 정령술을 쓸 줄 아는 이는 없었다.
이자벨은 상체만 유리 쪽으로 내밀었다.
“정령술을 누구나 쓸 수 있도록 만든 게 마법이란 건 알고 있겠지?”
“고대 드래곤들이 다른 종족들을 위해서 지금의 마법을 만들었다는, 그거?”
이자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등받이에 몸을 받쳤다.
“드래곤들이 창조해낸 마법은 세월이 흐르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강력하고, 빠르고, 편리하게. 하지만 솔리드녹스는 고대의 마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써왔지. 정령술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배우긴 어렵지만 효율이 좋기도 하고…… 가주가 말하기론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더군.”
“전통이라…….”
나이트워커도 똑같다.
선조 블랙 드래곤은 검을 잘 다뤘다.
블랙 드래곤의 첫 자손이자 용인이었던 초대 가주도 그 영향을 받아 흑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한 전통이 오늘 날의 나이트워커와 솔리드녹스까지 만들었다니.
“솔리드녹스엔 정령술을 익힌 사람이 있어?”
“있을 리가. 그랬다면 대륙 전체가 난리 났을 거다.”
정령술은 배움의 문제가 아니다.
선천적으로 정령과 친화력이 좋아야지만 그들을 소환할 수 있다.
엘프족이 여전히 정령술을 다루는 건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엘프가 아닌 종족에서 정령술사가 나왔다면, 대륙이 난리 나는 정도가 아니라 쟁탈하려고 전쟁이 났으리라.
환생을 거듭한 카이조차 정복 못한 영역이 정령이었으니.
“정령술은 무영창이지?”
“정령과의 대화에 언어는 의미 없다. 교감만 되면 어떤 의사소통이든 가능하다.”
“…….”
유리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 천장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어머니.
무영창.
마법사가 아닌데도 쓴 마법.
티르빙에게 물어봐도 어머니가 쓴 마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정말로 정령술이라면…….’
나아가 어머니가 솔리드녹스의 용인이었다면…….
유리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그녀가 용인은 아니지 않은가. 누가 보더라도 그녀는 인간이었다.
유리도 그런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고.
‘됐다. 그만 생각하자. 이 이상은 어머니께 폐만 끼쳐.’
이 이상은 정말로 고민하기 싫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다짐했었다.
하물며 진짜 더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정말로 어머니가 정령술사이며 이 사실이 밖으로 알려졌다간 정말로 전쟁으로만 끝날지.
알 수 없었다.
* * *
이틀이 지났다.
자유의 관에서 실시하는 정기 훈련을 마친 생도들은 10kg씩 빠진 얼굴로 대형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다들 오늘도 지옥 같은 훈련에서 살아남은 걸 감사하며 나가려는데.
유리와 이자벨은 옆에 있던 소형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련을 위해서였다.
“안 봐줄 거다.”
이자벨이 장난스러운 엄포를 놓았다. 유리도 맞장구를 쳤다.
“나도 안 봐줄 거야.”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대련에 빠져나가던 생도 몇몇이 관심을 보였다.
교관들도 흥미를 갖고 멀리서 그들을 지켜봤다.
구경꾼이 모이는 동안, 둘은 거리를 벌려 가슴에 검을 쥔 손을 얹고 경례했다.
시작은 이자벨의 검이었다.
탓!
한 번의 도약으로 미간 앞에 검끝이 다가왔다. 얇은 레이피어가 하얀 불꽃으로 넘실거린다.
유리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흡!”
그는 마나를 끌어 모아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손으로 이자벨의 검신을 쥐어서 막았다.
유리의 손에선 검은 불꽃이 넘실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