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88
제88화
카이 뒤로는 블레이크도 함께했다. 그는 카이와 달리 입구에 서서 경례를 올렸다.
“밤의 영광을. 늦은 시간에 송구합니다. 꼭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괜찮아. 식사는?”
“아직 안 했습니다.”
“그럼 같이 먹으면서 하지. 릴림, 귀찮겠지만 자리 두 개만 더.”
“네.”
릴림이 손짓하자 문밖에 있던 시녀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곧 식기류가 마련되고.
유리 오른쪽에 블레이크, 왼쪽엔 채럿, 맞은편은 이자벨, 그리고 제일 구석에 카이가 앉았다.
블레이크는 제 앞에 에피타이저용 스튜가 차려졌는데도 보고서부터 건네줬다.
“말씀하신 데이비드라는 자를 알아봤습니다만, 역시 영지 경계를 지나간 자들 이름 중에선 대조할 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교국 쪽에서도?”
“교국의 명단은 특별 관리를 하고 있어서 바로 확인해봤지만, 그들의 이름 중엔 데이비드가 없었습니다.”
카이가 교국을 특정하면서 유리는 모든 명단을 다시 조사해볼 것을 명령했다.
보고서대로 교국 사람들의 출입은 특별히 관리했다.
하급 신관이 영지를 넘었다면 따로 명부를 작성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녔다.
감시의 개념보단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괜히 영지 내에서 교국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문이 돌면 곤란했으니까.
“여기까진 특별할 거 없는 듯한데…….”
“대신 목격자를 발견했습니다.”
“목격자?”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던 병사가 확인했습니다.”
“아…….”
후반부 보고서부턴 글씨체가 달라졌다. 교국 신관을 수행하던 병사가 작성한 것이었다.
신관의 이름은 ‘팀’.
낮 시간 동안 팀은 평범하게 사람들을 치료하러 다녔다.
허나 밤이 되면 수행원까지 물리쳐가며 어디론가 자꾸 사라졌다.
이에 하루는 수행원이 상사에게 보고를 올린 뒤 미행을 했다.
“노엘의 오두막 근처에서 발견됐다고?”
“네.”
“이 놈일 확률이 제일 높네.”
아무래도 이 병사한테는 나중에 일만 마무리 되면 제대로 포상을 해줘야겠다.
덕분에 데이비드란 놈을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 녀석을 어떻게 추적해서 끌어내느냐 고민이 드는데, 건너편과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자벨과 채럿이었다.
“아, 미안. 둘한테는 말을 안 해줬구나.”
생각해보니 노엘 때 두 사람에게 가장 큰 도움을 받았었다. 그 이후로 전혀 경과를 알려주지 않았다.
유리는 사건 경과를 전부 설명해줬다.
하면서도 약간의 고민은 들었다.
‘이왕 이렇게 모인 김에 멸망에 대해서 말해야 되나.’
언젠가 말해야지, 말해야지, 하면서 정작 말할 기회가 없었다.
다만, 기회가 생겨도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바다 건너에서 일어나고 있는 멸망을 뭐라고 설득해야 좋을까.
멸망을 믿게 해도 우려스럽다.
유리가 아는 이들은 사명감, 책임감, 의무감 따위가 워낙 강했다.
멸망을 믿는 순간 자기 목숨을 불사를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일은 만들지 않게 하겠지만.
유리는 곁눈질로 카이를 살폈다.
‘저 녀석도 원작에서 이런 심정이었던 건가.’
원작 속 카이의 성격은 피폐해져서 타인을 배척하는 캐릭터였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랬다.
그러나 마냥 캐릭터 때문이 아니라고, 지금에서야 느껴진다.
이런 건 함부로 말하고 다니기 부담스럽다.
동료가 생기면 책임을 져야 한다. 악마와 싸우다가도 섣불리 동료를 이용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카이가 여러 번 환생한 건 동료 때문이기도 했지. 베아트리체가 그랬고.’
[꼬맹이.]‘……왜.’
[이 언니가 있어.]‘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외로워하는 거 같아서. 위로해주려고.]‘싱겁긴.’
딱히 외롭다거나 슬픈 감정은 아니었다. 카이에게 좀 더 공감했달까.
어쨌든 멸망에 대한 언급은 시기상조였다.
좀 더 신뢰가 쌓인 후에 말해도 충분했다.
팀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유리는 교국으로 대화 주제를 옮겼다.
“교국에다가 정식 수사 요청은 어려워. 증거가 확실해야 돼.”
“팀이라는 자가 노엘과 거래했다면서. 특정지어도 안 되는 건가?”
이자벨의 물음에 블레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교국은 용가도 쉽게 건드릴 수 없습니다. 외교적인 갈등만이 아니라 신앙심 높은 신도들로 인해서 여론에서 질타를 받을 겁니다.”
“맞아요, 언니. 원리주의자 같은 신도들은 특히 더 위험하다고요.”
아링턴이라는 교리 아래에 하나로 뭉쳐 있는 교국이라지만, 그 안에서도 여러 종파가 있다.
이단심문국이 대표적인 원리주의 집단으로 그들과 같은 교리 해석을 따르는 민간 신도들도 많았다.
이들을 건드렸다간, 폭도로 찍히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채럿 말이 맞아. 더군다나 내가 추측하기론 팀이란 신관도 어쩌면 이단심문국 사람일 수 있어.”
“카이 경이 발견한 부적 때문인가.”
“흑마법사들을 상대로 부적을 정상적으로 제공할만한 자들은 그들 밖에 없어.”
“그럼 뭐야. 실질적으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아니.”
유리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교국을 조사할 명분은 부족해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할아버지께 교국으로 보내달라고 할 수는 있게 됐지.”
“어, 음. 오라버니. 그게 그거 아니에요? 전 잘 모르겠어요.”
“가문 내에서 키메라 실험을 해서 거래를 한 정황이야. 교국으로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주실 거야. 내가 맡았던 의뢰기도 하니까.”
“그러니까요. 교국으로 가기만 하실 건 아니잖아요?”
“비밀.”
“네?”
카이만 빼고 모두 똑같은 표정과 말로 유리를 쳐다봤다.
‘아니, 잘 얘기하다가 비밀이라고?’ 묻는 얼굴들이었다.
“말 그대로 비밀리에 움직일 거야.”
“아아……. 아아?”
수긍도 얼마 가지 못했다. 다들 또 똑같이 되묻는 표정을 짓는다.
한 마디로 교국에 들어가서 비밀리에 움직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교국으로 들어가서 팀을 찾아낼 거야. 아무도 모르게.”
* * *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다들 교국에 들어가는 건 동의해도 단독으로 몰래 하는 행동에는 절대 반대했다.
들킬 우려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무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논리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우선은 채럿에게 교국 내에 팀이라는 사람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름과 인물이 특정된 이상, 채럿의 정보망에 무조건 걸릴 것이다.
이후로도 그들은 늦은 시간까지 교국 어디서 어떻게 움직일지 계획을 세우고 나서야 해산했다.
유리도 방으로 올라가려고 계단이 있는 코너를 도는 순간.
“카이? 안 가고 뭐해?”
“할 얘기가 있다.”
“…….”
식사 시간 내내 카이는 침묵한 채 식사에만 집중했다. 워낙 열정적으로 음식을 해치우고 있어서 딱히 말릴 마음이 안 들었다.
그랬던 그가 단둘이서 할 말이 뭐가 있다는 걸까.
유리는 뒤따라오던 릴림에게 고갯짓으로 오늘은 돌아가도 괜찮다고 표했다.
릴림이 사라지고 나서야 카이가 옆 벽에 기대서 말문을 열었다.
“낮에 재미있는 대련을 하더군.”
“있는 줄 몰랐는데.”
“일일이 구경하겠다고 알려야 하나?”
“그건 아니지만…….”
혹시 베아트리체의 마법 조합을 알아 챈 건가.
하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카이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당혹스러울 뿐.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마법을 배운 거지?”
카이는 직진으로 물어왔다.
눈동자에서 살기가 부글거린다. 구멍 하나 뚫었다간 분화구가 터질 기세였다.
“마법 서적을 찾아보다보니까 괜찮은 조합식이 있어서 봐뒀었어. 왜?”
“그게 누가 만든 조합식인지는 아는 건가?”
“베아트리체.”
직진으로 물어왔듯이 유리도 빙 둘러대지 않고 답했다.
살짝 용암이 튀어올랐다. 그러나 금방 가라앉았다.
“베아트리체의 조합식을 익혔다고?”
“마수대전의 영웅이잖아.”
“그녀의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아. 구전으로만 전해져서 동화처럼 이야기만 남았지. 근데 그녀의 마법을 배웠다고?”
“…….”
어중간한 변명으론 안 되네.
당장이라도 죽일 기세에 유리는 미리 준비했던 다른 말들을 꺼내려고 했다.
“실은―”
“그녀를 미래에서 본 건가?”
“……뭐?”
무슨 소린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카이가 더 낮고 힘 있게 물었다.
“그녀를 미래에서 봤냐고 물었다.”
뒤늦게 질문을 알아들었으나 마찬가지로 대답이 튀어나오질 못했다.
분노라고 여겼던 그의 감정은 그런 부정적인 것이 아닌, 순수하게 베아트리체를 향한 열정이었다.
‘미래에 베아트리체가 있냐고?’
당연히 없다.
그녀는 죽었다.
죽은 자가 돌아올 수 없는 법칙은 신과 드래곤마저 어기지 못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다를까.
그러나, 딱 한 장면.
‘베아트리체가 돌아올 기회가 있긴 했었지.’
악마들이 카이를 현혹시키려고 베아트리체를 불러오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육신에 깃들기까지 했었으나, 그녀는 자살을 택한다.
자신의 존재가 카이를 뒤흔들 걸 우려한 마음에서였다.
카이가 다시 죽는 그녀를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유리조차 모른다.
허나 굳이 원작을 안 봐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두 번씩이나 봐야한다는 충격은 알 수밖에 없었다.
“네가 그랬었지. 미래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그랬다간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거라고.”
“…….”
“묻는 건 자유지만, 대답은 해줄 수 없어.”
“네놈의 마법 조합식이 완벽한 대답은 아니라는 거냐?”
“그것도 대답할 수 없어.”
“네놈!”
꾸욱!
우악스러운 손길이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유리는 태평하기만 했다.
“네가 이러니까 말할 수 없다는 거야.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구원할 네가 어떤 한 사람 때문에 감정적으로 휘둘릴 거라면 내가 뭐 하러 알려줘야 해?”
“내 미래는 내가 선택한다! 이 질문도, 대답을 듣는 것도! 전부 다!”
“그럼 내 미래도 내가 택해.”
“여기서 너를 죽일 수도 있어!”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네가 감정적인 이유로 날 죽이겠다고? 그게 네가 계획했던 미래였던가?”
“계획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난 여태까지 그래 왔어!”
“그래 왔던 결과가 어찌 됐지? 악마들이 멸했나? 애꿎은 사람들이 죽기만 하지 않았던가?”
“과거를 모르는 네놈이 입에 담을 죽음들이 아니다. 베아트리체도 마찬가지야!”
“그래, 맞아. 과거에 대해 난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이 말은 할 수 있어. 네가 살린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있을 거라고.”
“……!”
멱살을 쥔 악력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유리는 살짝 그를 밀쳐서 거리를 벌렸다. 분에 찬 낯짝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카이에겐 마왕과 근접했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세계의 구원을 목전에 두고 종종 포기할 때가 많았다.
단연 타인 때문이었고, 그 중에는 베아트리체가 있었겠지. 결국 그녀를 구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반대로 산 사람도 있다.
카이가 살리고, 살길 바랐던 인물들.
그들이 아직 이 세상에 있다.
유리는 목소리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네가 멸망을 막으려는 이유는 뭐지? 무조건적인 사명감으로 세상을 구하겠다는 구원자 노릇은 아닐 거 아냐.”
“난…….”
카이도 그렇고, 유리도 그렇고.
두 사람 모두 거창하게 세상을 구하자는 정의로운 마음으로‘만’ 미래를 대비한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카이는 잃었던 사람들이 있어서 싸웠고.
유리는 잃을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싸운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동기였기에 유리는 카이의 분노에 분노로 맞서지 않았다.
대신 타이르고, 다독였다.
“베아트리체가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몰라도, 이 이상의 답을 줘선 안 돼. 그녀를 위해서라도 말이지.”
“…….”
“지금은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생각해. 그것만큼은 네가 시키지 않아도 할 일잖아.”
어깨 한 번 두들겨주곤 유리는 계단을 올랐다.
위로가 될 만한 이야기는 떠오르지 않는다. 애초에 카이한테 위로는 안 어울렸다.
그보다는 현실을 직시시켜주는 편이 나았다.
‘말로는 대답하지 않았을 뿐이지, 대답해준 꼴이 되었네.’
유리는 푸념을 하다가도 피식 웃었다.
아직 카이와 과거의 연을 맺은 누군가가 살아있다고 말해버렸으니.
허나 그들이 카이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