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91
제91화
“아?”
유리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눈을 번쩍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회색빛 천장과 벌어진 벽돌 틈에서 떨어지는 이슬 방울이었다.
뺨을 때리고 흐른 물기는 귀 뒤로 넘어가면서 으스스하게 등골을 파고들었다.
‘여기, 어디지?’
간신히 어지럽던 머리를 추스르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턱! 묵직한 무게감이 가슴팍을 짓눌렀다.
덕분에 고개만 들었다가 내려야만 했고, 천천히 턱을 당겨서 몸 아래를 살폈다.
“무게추?”
배와 가슴에 널찍한 판자가 올라가 있었으며 그 위로는 무지막지한 쇳덩이들이 무게를 더했다.
어지간한 무게쯤은 이겨내는 유리였지만, 그보다 주변부터 살폈다.
괜히 저항해선 안 될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추를 얹은 꼴이 딱 봐도 ‘압슬(壓膝)’이라 불리는 고문 방식으로, 교국에서 이단자들을 심문하거나 죽일 때 쓰는 방법이었다.
‘심문보단 구속하려고 얹어놓은 거 같은데. 그렇다는 건 날 아직 죽일 마음은 없는 건가?’
[죽일 거였으면 벌써 죽였겠지.]티르빙이 샐죽한 목소리로 따졌다. 유리는 편안하게 뒤통수를 땅에 대고 물었다.
‘나 살아있긴 하지?’
[이쯤되면 이 언니는 네가 차라리 더 죽을 고비를 겪어봤으면 해. 그래야 정신 좀 차리겠지.]‘살아있나 보네.’
[죽었으면 나랑 대화를 할 수 있었겠니.]아, 하긴.
죽었으면 티르빙은 이승에 남을 테니까
‘그럼 다행이고. 그보다 여긴 어디지?’
[아마도 교국일걸?]‘아마도?’
[여기 오는 동안 꼬맹이 네 얼굴을 가려서 아무것도 못 봤어. 확실한 건, 그 사람이 널 구했어. 나를 보고도 말이지.]‘널 봤다니. 마검을 들켰다는 거야?’
티르빙은 유리가 기절하기 직전 자신이 했던 일들과 목격담을 말해줬다.
피로 된 실을 뽑아 수면 위로 올렸고,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실을 당겨서 유리를 구했다고.
또한 실을 당긴 장본인은 유리를 건지자마자 머리에 두건을 씌워서 소리와 시야를 막은 채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아마 그 사람은 내 존재를 알고도 도와준 걸 거야. 세상에 누가 물 밖으로 튀어나온 빨간 실을 잡아당길 생각을 하겠어?]‘궁금해서 잡아봤을 수도 있지.’
[호기심만으로 물속 깊숙이 처박힌 우리 꼬맹이를 건졌다고? 그래놓고 살려서 움직이지 못하게 추까지 얹고?]‘으음.’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까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유리는 외부 침입자다. 원칙대로라면 성기사단 혹은 이단심문국에 넘겨져서 심문당하다가 죽어야 했다.
허나 그는 아직 살아있다.
심문도 없다.
물론 유리의 근력을 오판해서 무게추가 터무니없이 가볍긴 했지만.
어쨌든 침입자 대우치고는 여러모로 허술한 면들이 넘쳤다.
‘애초에 타이밍 좋게 날 건졌다는 게 말이 안 돼.’
스틱스에서 뚫은 벽은 교국의 하수도와 이어져 있다.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어서 카이는 그곳을 비밀 통로로 애용했었다.
혹시 누가 기다리고 있었다면 또 모를까.
‘돌이켜보면 망자가 된 락타샤가 갑자기 공격을 받았지. 대체 누가?’
그때 갑자기 오른쪽에서 걸음걸이와 여자 목소리가 같이 들렸다.
“잘 자고 있네.”
시선을 돌려봐도 갇힌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벽이 안 보였다.
짙은 어둠만이 드리워진 저 멀리서 발걸음이 급하지 않게 다가왔다.
이윽고 코앞까지 다가와서야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생기 없는 낯으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흐응, 깨어있네? 심지어 멀쩡히 살아있네? 죽으라고 올려놨더니 팔팔해서 아주 보기 싫어.”
야박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한 인상 평가에 유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물결처럼 굽이치는 가느다란 금발에 백색 플레이트와 금으로 장식된 성기사 갑주를 입고 있었다.
사파이어보다 푸르고 투명한 눈동자와 기다란 속눈썹, 어딘가 모르게 연약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얼굴에선 무심함이 철철 흘러넘쳤다.
나이는 많아봤자 10대 후반?
등에는 그녀 키보다 크고 옆으로도 넓은 대검이 매달려 있었다.
‘누구지. 원작이나 설정에서도 저 정도로 무시무시한 사람은 없었는데.’
뿐만 아니라 어떠한 기운도 안 느껴졌다.
마나라든가 성력, 하다못해 그녀의 기척 자체조차 미비했다.
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존재를 영영 몰랐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락타샤를 베고 익사에서 구해준 사람이라고.
“존재감이 전혀 없군. 내가 보고 있는 게 귀신은 아니겠지.”
“그게 중요한가.”
그녀는 귀찮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밀리샤.”
“뭐?”
“내 이름. 밀리샤라고.”
“교국의 성기사들은 자기소개를 이렇게 하는 건가?”
“어떤 게 불만인 거지? 다짜고짜 이름부터 말하는 거? 아니면 돌에 깔아놓고 소개하는 거?”
“불만은 없어. 그보다 내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까.”
“글쎄, 어떻게 된 걸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다니.
그리 말해놓고 밀리샤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발로 무게추들을 밀기 시작했다.
쾅! 쿵! 쾅!
제각기 다른 크기의 추들이 가벼운 동작만으로 쉽게 움직였다.
존재감이 없어도 가진 내력(?)은 엄청난 모양이다.
쿠우웅!
마지막 추가 떨어지고, 유리는 그제야 나무판을 치우며 일어섰다.
멀쩡하게 선 그의 모습에 밀리샤는 아쉬움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이런 걸로 죽지 않다니. 나름 고생해서 나른 돌들이 허망해졌어.”
“내 걱정은 안 해주는 건가?”
“내가 왜?”
“일부러 살려둔 거 같아서.”
“살린 건 맞지만 멀쩡하게 살려두라는 말은 없었어.”
그리 말하며 “사지라도 자를 걸.”이라고 중얼대는 그녀.
만만치 않은 성격이네. 무뚝뚝함의 대명사인 카이보다 더 까다롭다.
‘근데 누가 살려두라고 명령했다고?’
살려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달리 말해 유리의 정체를 간파한 사람이 미리 수를 써뒀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누가 날―”
휘익!
입을 열기 무섭게 콧등 위로 칼날이 지나갔다.
살짝 허리를 뒤로 젖혀서 피하긴 했으나, 정면으로 마주치고 있지 않았더라면 목이 잘렸으리라.
그리고 일격의 주인은 당연히 밀리샤였다.
유리가 서늘하니 낮게 음성을 깔며 물었다.
“뭐 하자는 짓이지?”
“시험. 과연 네가 그분과 만날 자격이 있는지 봐야겠어.”
“날 살리라고 했다며.”
“아직 살아 있네.”
“방금 전엔 죽이려고 했었잖아.”
“지금부터 죽일 거야.”
이상하게 밀리샤와 대화를 하다보면 자꾸 다투는 분위기가 되고 만다.
지금은 그 다툼이 진짜 검으로 번졌다.
뭐가 되었든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을 만나기 위해선 밀리샤를 이겨야만 했다.
그래서 허리춤에 손을 대니, 있어야 할 물건들이 전부 사라졌다.
“내 검, 네가 가져갔어?”
“잘 보관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난 뭘로 싸우라고?”
“마검.”
“……뭐?”
“시작한다.”
키이이이잉!
짤막한 선고를 시작으로 밀리샤의 대검에 하얀 성력이 모였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몸집보다 큰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유리는 그제야 그녀에게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감옥 전체를 마나로 감싸고 있었군!’
그 증거로 감옥을 채우고 있던 어둠이 그녀의 검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면서 어두웠던 곳에 빛이 물감 번지듯 퍼졌다.
다만, 그녀가 끌어모으는 기운을 마나라 해야 좋을지 불분명했다.
[무슨 마나든 간에 그게 중요하니? 저 여자애, 일격에 끝내려 하고 있어.]‘어떻게든 마검을 꺼내게 만들겠다는 건가.’
결정권 따위 없었다.
좋든 싫든 의도대로 따르는 수밖에.
그렇지 않고서 맨몸으로 그녀의 일격을 받아냈다간 그녀가 원하던 대로 사지가 잘린 채 살아남을 게 빤했다.
“티르빙!”
추륵!
시험이라고 했으니까 방어만 할 생각은 없었다.
유리는 갑옷이나 방패가 아니라 검으로 티르빙을 뽑았다.
마검을 본 밀리샤가 인상을 구겼다.
“진짜 마검……!”
유리는 온 신경을 티르빙과 다가올 공격에 쏟느라 그녀가 하는 말과 표정을 보고 듣지 못했다.
마검이 없었을 때 생겼던 불안감이 마검을 들면서 사라졌다.
그 정도로 밀리샤의 공격은 강력했고, 마검의 주인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디바인 슬래셔!”
대검에 모인 마나가 폭발하며 유리를 덮쳤다.
그녀의 일격엔 검과 같은 날카로움은 없었다.
대신 태산처럼 육중한 고압이 전신을 찍어 눌렀다.
이에 질세라 유리도 온 마나를 단숨에 끌어모았다.
무게에는 무게.
면에는 면.
“5식, 어둠검!”
아칸 검법이 발현되고 머리 위를 향해 티르빙을 휘둘렀다.
까만 어둠이 빛무리를 삼킨다. 빛무리는 어둠에 먹히지 않기 위해 위에서 아래로 어떻게든 힘으로 눌렀다.
그러나 상쇄하던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삐끗거리자 삽시간에 어둠이 빛을 덮었다.
빛들은 천장으로 몰리다가 하나의 점으로 모여들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유리의 승리였다.
“후우.”
그가 가벼운 호흡을 토하자 티르빙과 어둠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처음 눈을 떴을 때보다 감옥은 더 밝았다.
저 멀리서 반지하 창문처럼 자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외부에서 햇살이 들어와서 물기가 젖은 벽돌에 굴절과 반사를 반복했다.
유리는 밀리샤를 바라봤다.
내려친 대검의 끝이 땅에 박힌 채 그녀는 꼼짝도 안 했다.
“내가 이겼네.”
유리가 상큼한(?) 한 마디를 던지자 그녀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진다.
“칫.”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인 그녀가 돌아섰다.
따라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그녀와 거리를 둔 채 유리도 걸음걸이를 옮겼다.
[쟤 왜 저래?]“글쎄다.”
사실 어떤 반응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잔뜩 토라지고 화가 났다.
그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을 뿐.
* * *
밀리샤는 한참 동안 지하도를 따라 걸어서 유리를 이끌었다.
처음엔 이단자들을 가두는 감옥인 줄 알았던 공간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듯했다.
녹슨 창살들이 부서져 있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면서 반질반질해야 할 복도엔 이끼가 가득했다.
그렇게 더 걷고 나서야 밀리샤는 문이 아닌 벽의 교묘한 이음새를 밀고서 출구를 열었다.
밖은 예상했던 곳과는 달랐다.
“여긴…….”
가장 먼저 널찍한 광장과 가장 자리에 일정 간격마다 자리한 탑들이 보였다.
탑은 총 13개.
거대한 상아처럼 솟은 탑들은 햇살에 반짝거렸다.
이와 같은 장소는 유리가 아는 한 단 한 곳 뿐이었다.
“일명, 성언(聖言)의 기둥.”
교제를 보좌하는 13명의 추기경들이 거주는 탑들로, 고위 신관들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런데 그런 탑 아래에서 올라왔으니.
“멍하니 있지 말고 따라와. 여기서 길 잃으면 진짜 죽어.”
앞서 가던 밀리샤가 경고하자 괜히 발길을 서둘렀다.
이윽고 그녀는 한 탑으로 뛰어 들어갔다.
탑 앞에 있던 성기사들은 그녀를 향해 예를 갖춰 경례를 올렸다.
가도 되는 걸까.
혹여 제지당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도 이미 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경례만 없고 흘깃 쳐다보긴 했어도, 그들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유리는 밀리샤를 보냈다는 사람의 정체에 대해 확신을 가졌다.
그 사람은 탑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서 확인할 수 있었다.
투박하고 오래된 문을 밀자 고풍스러운 방이 먼저 보였다.
곳곳에 화초가 가득했고, 엔틱한 가구들과 붉은 융단 카펫이 푹신하게 발바닥을 받아들였다.
그 너머로는 햇살을 바라보던 한 노파가 있었다.
그녀는 인기척을 듣곤 돌아서며 유리를 반겼다.
“어서오세요, 마검의 주인이시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몰락한 신의 대리인.
계시자.
그리고 과거 카이의 전생 시절에 그를 도와 서쪽 대륙으로 넘어가는 걸 돕고 악마의 존재를 믿은 사람.
13번째 추기경, 엘카.
그녀가 당당히 마검의 주인을 맞아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