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92
제92화
작품 속에선 젊었던 엘카였으나, 이제는 세월의 흔적이 주름으로 남은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풍채마저 좋아진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 몸을 의지했다.
상상과는 다른 그녀를 보곤 유리는 멍하니 서 있다가 물었다.
“엘카 하모니 추기경이군.”
“이 늙은이를 바로 알아보시다니. 전 아직 마검의 주인 성함도 모릅니다만.”
“……유리 덴 나이트워커다.”
“유리라, 아하! 엘라트리오 황녀가 지지 선언을 했다던 그분이시군요!”
그녀는 박수를 쳐가며 유리를 반가워했다.
유리도 그녀가 반갑긴 했으나, 사실상 초면인 사이라 크게 티를 내지 못했다.
‘엘카 하모니, 계시자라서 날 알고 있는 건가.’
그녀는 서쪽의 악마들을 믿은 몇 안 되는 사람으로, 카이가 고위 신관으로 지냈던 전생 시절 동고동락했던 동료였다.
동쪽에서 아무도 악마를 믿지 않을 때.
그녀가 카이를 믿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신의 계시’가 있어서였다.
이번에도 그 계시로 알아본 걸까.
“마검의 주인께서 용인이었을 줄이야. 놀랍네요. 아, 서 있지 말고 이리 오세요. 괜찮아요. 해치지 않습니다.”
“…….”
유리는 멈칫거리다가 그녀와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엘카는 밀리샤에게 손짓했고, 밀리샤는 휠체어를 유리 앞으로 끌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엘카에게선 한시도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가까이서 마주치니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용인인데 용인이 아니군요. 하지만 제가 봤던 어떤 용인보다도 훤칠하시고요. 음, 공자라 불러야 하나요?”
“날 알고 있나?”
“알다마다요. 괜히 공자를 여기로 데려온 게 아니랍니다.”
손짓을 한 번 더 하자 이번엔 밀리샤가 차를 타러 구석으로 걸어갔다.
고압적인 태도가 온데간데없어진 그녀는 고분고분 차를 내렸다.
“우선 갑자기 끌고 와서 미안합니다. 부디 이 무례를 용서하시길.”
“날 왜 데리고 온 거지?”
“설명하자면 깁니다만. 이것부터 보시겠습니까.”
엘카는 테이블 위에 미리 올려져 있던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촛농으로 봉인한 두루마리를 풀자 엘카가 받은 기다란 내용이 드러났다.
……교국으로 용인이지만 용인이 아닌 자, 마검의 주인인 자가 찾아올 것이다.
그 자는 미뭉의 주인을 도울 조력자이니. 계시자여, 너도 그 자에게 작지만 보탬이 되어주어라.
그것이 세계를 건질 사명이다.
또한…….
일종의 계시문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계시가 아닌 유리와 카이를 정확히 지칭한 계시였다.
“이래서 날 알아봤었군. 밀리샤 경이 타이밍 좋게 날 구한 것도…….”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신의 계시는 처음이었답니다, 후후.”
말마따나 계시문은 상당히 디테일했다.
가령 유리가 스틱스 강에 빠져서 하수도로 나올 거라는 문구까지 적혀 있었다.
“정작 신께선 시간까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아서 밀리샤가 몇 달 째 하수도를 지켰죠.”
“그냥 무작정 기다렸다고?”
“계시란 원래 그런 거랍니다.”
신의 부름에 답하여 신의 말씀을 전언하는 존재.
그것을 이 세계에선 계시자라 칭했다.
계시자는 예언자와는 다르다.
신이 들려주는 말만 들을 수 있으며, 신의 전언에는 현재, 과거, 미래, 모든 시간대가 담겼다.
신이 무엇을 가르쳐 줄지는 자기 마음대로기 때문에 예언자와 달리 모든 걸 알 수는 없었다.
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알기론 몇 년 동안 계시를 못 받았다고 들었다.”
“몰락했다고 해서 신마저 절 버리진 않으셨답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차마 죄송하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엘카의 미소는 화사했다.
결국 유리도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엘카에겐 여러 이름이 있지만, 세간에는 몰락한 대리인으로 더 유명했다.
과거 악마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카이의 도움을 받아 추기경이 된 그녀는 당시만 하더라도 계시자로서 교제(敎帝)만큼이나 신도들에게 추앙받았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악마 토벌을 나서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엘카는 악마가 실재(實在)한다고 사람들에게 설파했고 성기사단 차출을 요청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악마의 혼을 믿는 자들은 있어도 실존한다고 믿는 이들은 없었다.
악마가 강림했다는 사례가 역사적으로 전혀 없을뿐더러, 악마뿐만 아니라 천사의 실체를 증명한 경우도 없었다.
그 때문일까.
엘카의 주장은 전부 묵살당하고 만다.
도리어 사람들은 서쪽 대륙의 일을 그녀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었다.
그럼에도 엘카는 카이를 도우려 물심양면으로 애썼다.
자금을 지원해서 용병들을 모으고, 항해에 필요한 배와 물자들을 사들였다.
당연히 토벌은 실패했다.
성공했다면 카이가 환생하면서까지 악마 토벌에 힘쓰고 있진 않겠지.
이후 엘카의 지원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추기경이 신도들의 헌금을 헛쓴다며 비난했다.
그리하여 엘카는 몰락한 대리인이라는 오명을 썼다.
그 때문일까.
엘카는 그 이후로 계시문을 밖으로 알리지 않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신께서 그녀를 버렸다며 손가락질했으나, 이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미안하군. 괜한 소리를 했어.”
“아니에요, 공자. 공자는 세계의 멸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난 오히려 날 믿어줄만한 사람을 만나서 반갑답니다.”
“…….”
유리는 그녀의 미소 속에 감춰진 다른 감정을 읽고 말았다.
외로움.
혼자만 아는 진실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은 세월들이 만들어낸 거짓된 미소.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미소의 뜻을 알고 나니 속이 쓰라렸다.
엘카도 그런 유리의 감정을 읽기라도 한 듯 화제를 돌렸다.
“밀리샤가 험하게 다루진 않던가요?”
“아, 그건. 뭐.”
차마 돌을 얹어서 구속하고 대련까지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상황만 보면 분명 엘카가 잘 데려오라고 한 모양인데 그러질 않았으니…….
무엇보다 차를 우리고 있는 그녀가 엘카의 뒷통수 너머에서 죽일 듯이 바라봤다.
“밀리샤도 공자와 미뭉의 주인처럼 멸망을 믿는 아이랍니다. 그러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밀리샤 경이 바로 믿진 않았을 텐데.”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공자를 봤으니까 이젠 진짜 믿겠죠.”
계시문에는 마검에 대한 언급도 같이 있었다.
마검을 믿지 않았을 밀리샤에겐 그 실체를 확인한 순간 계시도 믿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도 그렇지. 마검 확인하겠다고 디바인 슬래셔를 쓴 거야?’
성기사 검술은 기사단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 중 교제와 추기경을 지키는 상아빛 여명회 기사단의 검술이 제일 체계적이고 위협적이었다.
밀리샤가 쓴 디바인 슬래셔도 상아빛 여명회의 검술로, 고위 신관에 버금가는 성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었다.
거기다 유리는 마검의 주인으로 상성이 맞지 않아서 자칫 위험했었다.
물론, 별빛나무가 완전히 흡수되면서 더 이상 성력이란 상성도 의미가 없지만.
“여기요. 차.”
밀리샤는 무심한 눈길과 다르게 얌전한 손길로 찻잔을 주고는 엘카 옆에 섰다.
“공자. 그 사람…… 그러니까 지금은 다시 태어나서 이름이 바뀌었겠지만. 잘 지내고 있나요?”
“이름을 묻지 않는군.”
“안부만 물어도 충분합니다.”
선 긋기인가.
그렇다기엔 말투에서 카이를 향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어쩌면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다.”
“그렇군요.”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잠시 동안 엘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물며 카이와의 관계라든가 멸망을 어찌 알게 됐느냐고도 안 물었다.
‘나 같았으면 묻고 싶은 것투성이일 텐데.’
카이가 전생에서 죽고 난 이후, 엘카에겐 혼자서 믿어왔을 멸망이었다.
그 감정, 더불어서 멸망이라는 죽음을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기력감을 어찌 버텼을지.
그 회한을 풀고 싶을 욕구가 분명히 있으리라.
헌데도 조용히 고개를 내린 채 과거를 떠올린 듯 피식피식 웃고만 있었다.
찻물이 살짝 기울어질 즈음이 되어서야 그녀가 퍼뜩 얼굴을 들었다.
“아, 미안합니다. 그 사람이랑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서 이 늙은이가 주책맞게도 회상에 잠겼었네요.”
“괜찮다.”
“자, 이제 할 이야기를 해봐야겠죠. 계시에선 공자께서 찾아온다고만 나와 있었습니다만. 무슨 용무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유리는 그간 용가에 일어났던 키메라 실험과 데이비드, 팀, 그리고 이단심문국의 연관성까지 전부 설명해줬다.
그리고 팀이라는 자를 찾으러 왔다고 하자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참 아이러니하군요.”
“왜지?”
“안 그래도 이단심문국 과장이 몇 달 전 이 늙은이에게 악마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악마를 왜……?”
“모르겠어요. 제가 악마가 있다고 주장해서 정말로 그런지 궁금해서 그랬다곤 하는데. 정작 악마가 없다고 반박했던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악마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몇 십 년 전 아무도 엘카를 믿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그것도 하필 이단심문국이라서 더 수상쩍었다.
‘혹시 엘카를 몰아내려고 하는 건가?’
가장 먼저 스쳐 가는 시나리오는 악마를 믿는다는 엘카를 이단으로 몰아서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가정은 빠르게 제외시켰다. 원작에서 엘카는 나이를 다해 죽을 때까지 추기경으로 남았다.
여전히 그녀를 추앙하는 신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엘카 추기경, 이런 질문이 실례일 수도 있으나. 최근 추기경의 입지가 위험한가?”
“어떤 의미로 한 질문인지 알 거 같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좋은 시선을 받지 않고 있는 건 맞지만, 제가 악마를 숭상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원리주의자들은? 이단심문국이 그대를 몰아내려고 하려는 낌새도 없었나?”
“전 한낱 늙은이입니다. 추기경 자리만 가지고 있을 뿐, 힘이 없죠.”
다소 자학적인 평가였지만, 그 말이 맞다.
기껏해야 그녀는 추기경이라는 직함만 가지고 있지, 실질적으로 영향력은 없었다.
‘무엇보다 엘카를 몰아낼 이유가 없어.’
이단심문국은 교국 내에서 추기경과 버금가는 강한 권력을 가졌다.
제 13과 레콘기스타가 대표적이다.
그때, 잠자코 있던 밀리샤가 한 마디 뱉었다.
“원리주의자들이 소동을 일으킨 적은 있어.”
“무슨 소동?”
“용가랑 자주 충돌할 때마다 항상 용가에 깨갱거리니까, 그게 싫다면서 교제 폐하께 애들마냥 이르러 갔던 적이 있었지. 최근엔 고성도 오갔다고 해.”
교국이 유일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국가로는 용가와 그 산하에 있는 봉신 가문들 밖에 없었다.
이 때문일까.
용가와 맞지 않는 사안들이 벌어질 때마다 용가는 강압적으로 나왔고, 교국은 마지못해 물러서곤 했었다.
“무슨 고성이 오갔는지 알 수 있을까?”
“용가가 아링턴 교를 믿지 않으니 그들은 이 세계와 창조주를 부정하는 거라며, 이단이라며, 개××, 쌍×―”
“밀리샤.”
“아, 죄송해요, 추기경님. 더 한 욕도 있었는데, 하지 말까요?”
“그만하면 되겠구나.”
못난 손녀와 이를 돌보는 할머니 같은 광경에 실소가 나왔다.
그러다가도 의아한 마음에 표정이 굳었다.
‘원리주의자, 용가, 대립, 악마…….’
용가가 아링턴 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질타를 받는 일들은 그야말로 흔했다.
애초에 아링턴 교는 창조주를 믿는 종교이며, 그 창조주가 태초에 빚어낸 생명체가 드래곤이었기에.
용가 입장에선 굳이 종교적으로 이를 믿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다.
용가에게 신이자 창조주는 그냥 ‘있는 것’이었다.
유리가 물었다.
“오래전만 하더라도 원리주의자들의 발언권이 교국 내에선 미약하지 않던가?”
“맞습니다. 몇 대 이전의 교제들께선 그들의 폭력적인 방식을 싫어했었죠.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사명감에 어긋났으니까요.”
교제가 싫어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는 카이가 전생에 교국을 들쑤신 결과물이었다.
‘슈레빌 참사.’
몇 번째 카이의 환생이었을까.
아득히 먼 시절.
극단적 원리주의자들이 한 마을에서 봉기해서 기존의 신도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당시 이를 진압했던 사람이 카이였다.
부랑자 신세였던 그는 극단주의자들을 하룻밤 만에 모조리 죽였다.
이 일을 계기로 원리주의자들이 뭉치기도 전에 수습이 되었고.
교제는 극단적 원리주의의 대표 격이었던 이단심문국을 축소 시켰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포기했을까?’
아니, 유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기엔 지금의 이단심문국은 덩치가 컸다.
과거의 당시보다도 훨씬 더.
그리고 슈레빌 참사 때와 지금의 형국이 너무나 똑같았으며, 미래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또 다시 벌어진다.
유리는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계획보다 할 일이 더 많아지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