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93
제93화
“슈레빌 참사에 대해 알고 있나?”
유리가 묻자 엘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폭력성이 짙은 극단주의자들이 일으킨 봉기였죠.”
“그때 괴소문이 같이 돌았었다. 그것도 알고 있나?”
“소문이라면…….”
“악마.”
슈레빌 참사는 단순히 원리주의적 교리에 의한 학살극 따위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정교한 계획이 있었으며, 그 배후는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음모론처럼 추측만 무성했다.
그 중 가장 많이 퍼진 소문 중 하나가 ‘악마’다.
“슈레빌 마을 사람들이 살아있었을 때, 마을에서 종종 악마의 형상을 보았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들어본 적 있어요. 그래서 신관이나 성기사들이 파견되었었죠. 선대 교제께서도 예의주시했다고 들었습니다.”
엘카가 추기경이 되기도 전의 사건이라 그녀도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반대로 유리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니었어도, 원작과 설정을 통해 알고 있는 것들을 털어놨다.
“결국 슈레빌 참사가 벌어지고 뒤늦게 성기사단이 급파됐다. 사람들이 이미 다 죽고 난 뒤에.”
“…….”
“그런데 성기사단이 진짜로 악마의 형상을 발견했다. 잿더미가 돼서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동물의 사체라고 판별했지만, 사람들은 진짜로 악마가 있다고 믿게 되었지.”
“공자께선 그 악마가 진짜라고 믿으십니까?”
“아니, 그 악마가 가짜라는 건 엘카 그대도 알지 않은가.”
“…….”
악마는 시체 따위를 남지 않는다.
그들이 이 세계에 강림하면서 육체를 갖게 되지만, 원래 육신이 없던 그들은 다른 생명체의 것을 강탈해서 나타난다.
그렇게 강탈당한 육신은 악마의 혼을 감당하기조차 벅찼다.
이때 육신의 생명을 끊으면 그 껍데기는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린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이는 유리와, 카이, 엘카 정도뿐.
“애초에 동쪽 대륙에선 아직 악마 강림이 불가능해.”
진짜 오류는 이거다.
육신을 빌려 강림하는 과정에서 육신 자체가 버티질 못한다.
서쪽 대륙에선 이것이 성공했기에 악마들의 침공이 시작됐지만, 동쪽 대륙엔 이러한 사례가 전혀 없었다.
교국과 아링턴 교, 창조주를 향한 믿음이 강하게 남아있는 덕이었다.
악마도 결국 신적인 존재로, 믿음과 신앙심이 있어야만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아링턴 교의 영향력이 강한 동쪽 대륙은 악마가 ‘있다’고 믿을지는 몰라도 ‘신앙심’이 부족했고.
악마 강림의 대전제는 절대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했다.
‘원작의 미래가 벌써 도래했다면 모르겠다만.’
그럴 리가.
적어도 악마 강림을 성공시키는 건 흑마법사나 교국이 아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가짜 사체였다는 거군요.”
엘카가 그리 말하자 유리는 턱을 주억거렸다.
누군지 몰라도 ‘그들’은 그렇게 만들어낸 악마로 사람들에게 악의 실존을 믿도록 했을 것이다.
부랑자였던 당시의 카이가 슈레빌에 찾아가게 된 경위도, 이런 악마에 관한 소문이 돌아서였다.
‘카이는 악마가 만들어진 원인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았어. 어차피 관련된 자들을 다 죽였으니까.’
그러나 그 카이도 생각지 못한 게 있을 수 있다고, 그런 직감이 유리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 악마, 키메라로 만들었을 거다.”
“키메라로 악마를……?”
“악마를 믿게 만들 좋은 방법이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상일 테니까.”
“이단자들이 그랬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아니라고 봐.”
유리는 창밖의 먼 곳을 바라봤다.
탑 꼭대기서 보는 풍경은 교국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멀리서도 북적이는 신도 무리가 보였다.
수많은 신도가 신전이나 석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유리는 무거운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이단심문국이 키메라를 만들어서 악마로 오해하게끔 유도했다면?”
“네?”
“아링턴 교는 본래 악마와 적이지 않던가. 마신, 마왕, 모두 창조주와 대립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성립이 되었지.”
아링턴 교의 시초는 들끓는 마수들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믿음을 통해 만들어졌다.
마수는 신의 실패작이라 여겼고, 마수와 악마, 마왕, 나아가 마신과 마검까지 이와 동일시했다.
하지만 마수대전을 기점으로 더 이상 마수로부터 큰 위협을 받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명목이 많이 흔들렸다.
아링턴 교도 변화가 필요했고, 마수와의 대립보다는 평화의 상징처럼 남고자 했다.
그것이 주요했기에 아링턴 교가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링턴의 원리주의는 결국 악마나 창조주에게 대립할 존재가 필요해. 그게 평화로운 세상이 되면서 흔들렸고, 용가를 새로운 적으로 취급했지.”
“하지만 용가를 악마와 동일시할 순 없습니다. 공자를 비롯한 모두가 신의 피조물. 그 논리는 맞지 않아요.”
“그래, 그러니까 가짜 악마를 만든 거야. 기존의 교리에 맞게 사람들이 행동하길 바라면서.”
“대체 왜…….”
“그건 아무도 모르지.”
같은 신을 믿더라도 종파와 신념의 대립은 항상 제각기 명분이 다르다.
정말로 순수하게 종교의 근본적 교리를 따르고 싶어하는 걸 수도 있고.
교국의 막강한 권력을 쥐고자 거짓된 신앙심을 꾸며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 생각엔 이단심문국이 슈레빌 참사에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군. 이번에도 놈들 이름이 섞여 있으니까.”
“신이시여. 어찌 이런…….”
엘카는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를 밀리샤가 급히 부축했다.
슈레빌 참사와 연결 짓기에는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들이 빈약했다.
하지만 유리가 아는 미래라면 이 모든 게 아귀가 맞았다.
‘제 2차 슈레빌 참사.’
현재 슈레빌은 더 큰 도시로 발달했다.
참사 이후 많은 구호가 들어오고 그 과정에서 통행하기 좋게 길이 개척되면서 무역로 한 가운데 자리잡은 덕이었다.
그런 슈레빌에 한 번 더 참사가 벌어진다.
사망자는 더 많이 늘었고, 악마에 대한 소문이 또 다시 퍼진다.
다만, 첫 참사 때와는 가해자가 달랐다.
‘2차에선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악마들이 사람들을 죽였지.’
첫 참사에선 원리주의자들이 학살을 벌였다면, 2차에선 악마로 위장한 마수가 사람들을 죽였다.
이때는 워낙 구체적으로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대륙 전체에 공포감이 솟았다.
그나마 카이가 제일 먼저 슈레빌을 찾아가서 생존자를 구해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진짜로 도시 전체가 하룻밤 만에 유령도시가 될 뻔했었다.
‘2차 때 악마들은 시체가 없었다. 그래서 카이도 악마라 믿었지. 나중에 가서야 이단심문국이 배후라고 알려졌지만, 딱히 처벌하지 못했어.’
처벌하지 못한 사연은 간단하다.
‘진짜’ 악마가 침략했으니까.
이단심문국 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논의가 길어진 탓도 있지만, 결과적으론 진짜 악마의 침략으로 모두의 힘을 합쳐야만 했다.
물론, 가장 먼저 희생당한 건 이단심문국이었다.
‘이단심문국이 배후인 건 거의 확실하다. 문제는 놈들을 양지로 끌어낼 명분이 없어.’
[그냥 저 추기경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안 되니?]‘교제 앞에서 욕을 뱉을 정도로 권력을 쥔 놈들이야. 추기경의 힘으론 부족해.’
[시도라도 해보는 거지.]‘추기경이 나서서 자신들을 곤란하게 만들 걸 예상하지 못할 바보들은 아닐 걸. 그 정도 대비도 안 하고 힘을 쥐었을까.’
[흐응, 그런가.]‘뭣보다 지금 교제는 너무 어려.’
한때 성녀 후보였던 릴림.
참고로 엄연히 성녀와 교제는 다르다. 성녀는 기껏해야 상징적인 의미만 가졌다.
물론, 성녀 대부분이 교제가 되기도 한다.
아마 릴림도 성녀로 추앙받으며 성기사단에서 지냈더라면 언젠간 교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그녀의 자리에 다른 교제가 앉았다.
그는 나이가 어렸고, 국가의 왕으로서도 권력이 약했다.
아마 이단심문국 사람들이 교제 앞에서 고성을 지른 것도 교제의 나이가 한 몫 했으리라.
허나.
계획이 조금 바뀔지라도 뭐가 되었든 유리가 가진 목표는 같았다.
“엘카.”
“말씀하시지요.”
“지금부터 내가 할 일들은 교국을 뒤집을 수도 있다. 신도들의 신망을 없애버리고, 자칫 다른 국가들의 무시까지 받을 수도 있어.”
“…….”
“그대에게 나를 막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막더라도 난 우리 가문을 건드린 놈들을 가만히 둘 마음이 없어.”
“허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연유가 뭡니까.”
“날 막으면 적으로 삼겠다는 경고지.”
엘카와 카이의 관계가 어떻든.
엘카가 신으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았든.
설령 그녀가 마검의 주인을 좋게 본다 한들.
유리가 여기까지 온 목적은 분명했다. 엘카나 교국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악마 대비에 성기사단이 중요하긴 했어도, 교국 없이도 그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해준다.
엘카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시선을 피했다.
“……난 우리 아이들이 행복해졌으면 합니다.”
그러다 밀리샤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유리를 쳐다봤다.
“오랜 시간 행복에 대해서 고민했으나, 답을 찾지는 못했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요.”
“뭐지?”
“난 카이, 그 아이만큼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봐요.”
엘카는 처음 카이를 만났던 시절을 떠올렸다.
미뭉의 주인.
서쪽에서 악마와 싸워 수없이 죽음을 반복한 자.
그에게선 삶에 대한 미련과 의지가 없었다. 죽어도 좋으니 악마만 멸하길 바란다는 강박만이 가득했다.
차라리 분노나 복수심 같은 어두운 감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마저도 무뎌지게 보였던 카이였기에, 엘카는 남모를 연민을 느꼈다.
동시에 위험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정말로 인간적인 면모가 다 닳아버린 카이라면 그것을 구원이라 불러도 좋을지…….
“그러니 공자에게 한 가지 바란다면, 부디 카이를 올바르게 이끌어주세요.”
엘카의 간절한 한마디는 묵직하고, 또한 애처롭기까지 했다.
* * *
엘카는 성언의 탑 중간층에 있는 빈 방을 유리에게 내주었다.
그녀가 지내던 방보다 투박했지만, 용가 못지않게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꼬박 반나절 동안 잠을 자며 보낸 유리는 밤이 되어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미리 준비해온 암기와 단검을 차고, 가볍게 하기 위해 갑주는 벗었다.
“싫어.”
갑자기 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밀리샤였다.
달빛이 만든 그림자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싫다고 말하는 표정치곤 여전히 무심했다.
“뭐가 싫은데?”
“너랑 같이 움직이는 거.”
“난 길 안내만 해주면 된다고 말했어.”
엘카는 유리에게 밀리샤를 붙여줬다.
교국 안이 워낙 복잡한 데다가 이단심문국을 털어먹기(?) 위해선 반드시 길잡이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싫다는 거야. 길잡이 없이 헤매고 있을 걸 생각하니까 짜증 나서.”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해?”
“우리 어머니.”
“어머니?”
“추기경님 말이야.”
비혼을 지켜야 하는 추기경의 특성상 친딸은 아닐 테고.
수양딸인가.
어쩐지 얼굴이나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싶었다.
“지금 날 못돼먹은 ×이라고 생각했지?”
“대체 너한테 난 뭐냐?”
“못돼먹은 놈.”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우리 어머니한테 슬픈 표정 짓게 했으니까 못돼먹은 놈이야.”
“아하, 그런 뜻이었군.”
유리는 그냥 수긍해버렸다.
확실히 그가 보기에도 카이를 떠올리던 엘카의 얼굴은 몹시도 슬퍼 보였다.
그런 어머니를 모시는 딸이니.
못돼먹게 보여도 할 말이 없다.
“아무튼 길만 알려주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싫어.”
“이번엔 또 뭐가 싫은 건데.”
“분명 이 전개는 뻔해. 안내만 해주려고 했다가 모종의 함정에 빠져서 같이 헤쳐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겠지.”
“그러다 한 공간에 갇혀서 사랑에 빠지고?”
“……진짜 못돼먹었네.”
이번엔 진짜 싫은지 살기가 스멀스멀 기어왔다.
유리는 시치미를 떼며 모른 척했다.
그보다는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이단심문국 내부를 제대로 아는 자는 교국 내에서도 드물었다.
밀리샤의 길 안내도 그녀가 아는 선까지만이다.
“진짜로 길 안내만 해. 그 이상 도와선 안 돼.”
유리는 그리 말하며 마지막 단검을 허리춤에 끼웠다.
“잠입이 아니라 침입이 될 거라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