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221)
매국노의 원수 자식-221화(221/773)
221_제국의 붕괴 (3)
1918년 2월
벨기에, 이프르
크리스마스 이후로 상황은 제법 좋아 보였다.
다른 걸 떠나서 미국이 독일에 더 빨리 선전포고한 건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공공정보위원회가 열심히 일하고, 이제까지 한 번도 미군이 심각한 인명피해를 겪은 적이 없어서 미국 시민 입장에선 이번 전쟁이 일종의 대규모 오락거리라도 된 듯하다.
전쟁 관련 여론이 영 부정적이진 않았던데다가, 원래는 그냥 프랑스나 영국에서 물자를 다 구매할 생각이었던 의회도, 전쟁 특수가 제법 쏠쏠하다는 걸 파악했는지 군수물자 생산과 수출에 필요한 예산을 더 많이 승인해줬다.
이 두 가지가 맞물려서 벌써 미군 병력을 꽤나 많이 보낼 수 있었고, 장비도 비행기와 탱크를 오히려 우방국보다 더 열심히 찍어내는 덕분에 2차대전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천조국의 쇼미더머니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들의 훈련 수준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의 모습이 한심하지?”
“음,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맥아더와 우리 둘 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어디서 소란이 일어나서 보니, 100명 정도 되는 병사들이 하사 한 명 주위에 몰려들어 있었던 게 기억난다.
다음 전투를 준비하느라 2주 가까이 보충병들을 훈련시킨다고 피땀을 흘리던 맥아더는 안 그래도 바빠죽겠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며 빡침을 표출했다.
그랬더니 그 하사가 병사들에게 총알을 장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중이었다는 소리를 들은 맥아더는 기가 막혀서 한동안 말을 못 했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리, 네가 이제까지 맥아더가 본 군인 중에서 제일 멀쩡한 녀석 중 하나라면 믿겠나.”
“···전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진짜로.”
이 정도 처참한 실태가 미국 원정군에서는 그렇게까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졸지에 2사단 소속의 네이비 씰 부대는 급격히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내가 빡세게 키워낸 덕분에 씰 대원들은 신체 능력이 평균 이상이고, 명령 잘 이해하고 따르고, 여러 종류의 무기와 장비 잘 다루고 사격 실력도 뛰어났다.
여기에다가 사고도 잘 안 치니,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군의 최고 엘리트 중의 엘리트 취급을 받으며 여러 지휘관의 부러움과 탄식을 자아내는가 보다.
솔직히 이 모습을 보니 나도 어처구니없긴 했다.
그래도 역시 물량은 물량이었는지, 독일군이 영혼까지 끌어올려서 시작한 춘-아니, 추계 공세의 페이즈 1을 점점 더 풀 컨디션에 가까워지는 미군은 크나큰 피해 없이 막아냈다.
여기서 페이즈 2만 막아내면 이제 드디어 독일이 아니라 우리 측에서 수월하게 공세를 펼치는 게 가능해지고, 진짜 이 지겨워 죽을 것 같은 1차 대전을 드디어 끝낼 수 있다!
···라고 생각했건만, 인생이란 원래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고 어느 현자가 말했었지.
“콜록콜록!”
“저놈의 몸에는 독감이 가득하구나. 의무병은 뭐하나, 저놈을 격리의 방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런 젠장할.
독감이 서부전선에도 상륙하기 시작했다.
시기상 보아하니 1차 대전의 전투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낸 그 스페인 독감이 틀림없네, 세상에.
그래도 내가 미첼과 맥아더를 통해 퍼싱에게 이걸 보고하니, 얼마 있지 않아 미국 원정군 전체에 긴급 위생 규정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손 자주 씻고, 마스크 착용하고, 물과 음식은 데워 먹고, 비상시를 제외하면 밀집을 피하기, 등등.
크게 복잡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전생에 배웠던 전염병 확산 및 전파를 차단하기 위한 기본적인 수칙만 일단은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퍼싱 장군이 나의 위생 관련 경고를 받아들여 주고 그대로 시행한 게 정말 불행 중 다행이면서도, 너무 쉽게 수용해서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네가 올린 보고니까 이번에도 믿을 만하겠지.”
“어, 감사합니다, 총사령관님···?”
퍼싱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신용하고 있었다.
파스샹달 전투 때는 그 전에 올린 전장 분석서 덕분에 미군이 전투에 참여해서 무모하게 갈려 나가는 걸 막았고.
개인적으로는 프리시디오에 소방서를 설치한 덕분에 아내는 어쩔수 없었지만, 그의 아이들을 화재에서 구해냈고.
그리고 그 외에도 대지진, 타이태닉, 대전쟁 발발 등 여러 가지 정확하게 예언(…)한 게 많아서 일단 “재난 한정”으로 내 신용도는 매우 높았던 모양이다.
마침 이번 재난을 대비해서 설치해놨던 마스크와 손 소독제 생산시설이 풀가동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 물량이 유럽까지 도착해 미군에 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대는 군대였고, 미군, 그것도 20세기 미군의 수준은 정말 처참하기 짝이 없었으며, 얘네들한테 그 위생 수칙을 준수하게 만드는 것만 해도 일이었다.
“이거 마스크 꼭 착용해야 합니까? 너무 갑갑한데 말입니다.”
“숨이 잘 안 쉬어져서 활동할 수 없습니다!”
특히 다른 건 몰라도 마스크 착용시키는 게 정말 어려웠다.
한 번은 몇몇 병사들이 계속 호흡이 곤란하다고 하자, 난 상의 탈의하고 마스크를 두 겹이나 착용한 채로 거의 1시간 동안 아나폴리스 미식축구 선수 시절처럼 운동을 해 보였다.
“야, 야, 봤지? 두 겹을 끼고도 이 정도로 할 수 있어.”
“···리 소령님 지금 죽기 직전으로 보이십니다.”
“이 새끼들아, 독감 걸리면 이것보다 더해!”
사병들도 사병들이었지만, 장교들을 설득시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장군님, 마스크 착용하십시오.”
“독가스도 두 번이나 흡입하고도 멀쩡한 맥아더가 굳이 그게 필요한 것 같나?”
“아니 그래서 두 번 다 중독돼서 실려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더글러스 맥아더처럼 가오가 온몸을 지배한 고위 장교들은 더더욱.
“···그래, 확실히 맥아더 장군님에게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은 장군님처럼 신체와 정신이 강인하지 않단 말입니다.”
“음, 그건 사실이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장군님보다 더 나약하고 하찮은 자들을 위해서라도 착용해주십시오.”
의외로 이게 통했는지, 맥아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스크를 착용했다.
“아, 코도 덮으셔야 합니다. 사실 그 부위가 제일 중요합니다.”
“이거 정말 번거롭군그래.”
한편 예상과는 달리 조지 S. 패튼 중령(···하, 인생 진짜)은 오히려 더 설득하기가 쉬웠다.
“이건 또 뭐냐?”
패튼의 마스크를 받은 나는 조심스럽게 그 위에다가 펜으로 어린 시절에 봤던 캐릭터의 이빨을 그렸다.
“아아, 이것은 ‘붉은 악마’라고 합니다. 한때 한국이 저기 핀란드와 전쟁을 벌이던 시절에 오로지 가장 용맹하고 정열적인 장군들만 갑옷에 새겨넣을 권리가 생기는 문양입니다.”
“오오오, 그렇단 말이지, 이리 줘!”
진실이란 단 한 구절도 없는 순수한 구라에 속아 넘어가서 악마 이빨이 그려진 마스크를 착용한 패튼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일 정도다.
파스샹달 전투 직전에 뿌렸던, “독일군보다 독일‘균’이 더 위험하다!”라는 선전도 본토에 연락해서 다시 열심히 뿌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게 독일이랑은 진짜 관계가 하나도 없으니,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어쩌겠냐, 이렇게라도 미군에게 경각심을 심어줘야 하는데.
그리고 이 제리놈들아, 어차피 미군이 이 대규모 역병을 덜 퍼트리면 너희들한테도 이익 아니겠냐고.
어찌 됐든 이렇게 이빨을 까면서 사방을 뛰어다닌 결과, 마스크 착용률을 어느 정도 높이는 데 성공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또 전혀 상상도 못 한 정신 나간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탁탁탁탁탁
와장창
“아니 또 왜 그러십니까?!”
“고만해 이 미친놈들아!”
어떻게든 캘리포니아의 화학자들을 돈과 함께 갈아 넣은 덕분에 PCDA는 에틸알코올 함량이 70%가 넘는 손 소독제를 만들어내고야 말았고, 절찬리 서부전선으로 보냈다···
“혹시 리 소령님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어떻게 그걸 마실 생각을 할 수가 있어!”
···그랬더니 소독제의 알코올 함량을 알아낸 일부 병사들이 소독제로 술을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증류주로라도 만들어 마시는 놈들은 그나마 정상인이었고, 분명히 병의 표지에 큼지막하게 “손” 소독제라고 적어 놨건만 그것도 못 읽었는지 그냥 마시는 놈들도 보였다.
아니 이게 무슨 포션도 아니고, 아. 내 뒷목. 아아아.
하여간 땅개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려다가, 내가 해군 장교로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백색함대의 항해 와중에 수병들하고 현지인들과 술집에서 패싸움 일어난 적도 있었고, 조지퍼스 대니얼스 해군부 장관이 해군 함선과 기지 내의 음주 금지령을 내리자 난리도 아니었지.
애초에 술을 퍼마신다고 할 때 쓰는 표현 중 하나가 ‘수병처럼 마신다 (drinks like a sailor)’니 말 다했네. 뭐, 최소한 해군은 식용수 확보라는 원인도 있긴 한데···
허 참 그나저나 이상하네. 왜 이렇게 스페인 독감이 벌써부터 퍼지기 시작한 거지?
내가 기억하기엔 1918년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된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스페인에서 뭔 일이 생겼나?
···
······잠깐만.
스페인 독감이 더 빨리 창궐했는데, 마침 미국도 참전과 파병이 빨라졌지?
어.
어 시발 잠깐만.
맙소사.
내가 ‘스페인’ 독감에 대해 결정적인 착각을 하나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멘탈이 나가려는 걸 겨우 붙들어 잡고 당장 PCDA에 긴급 전보를 하나 보냈다.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면서 오들오들 떠는 나에게 답장이 오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 잠시 독감을 잊고 말았다.
“아니 뭔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정말 오래도 해 먹었군.”
PCDA의 경영자, 안창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샌프란시스코에 약 20년 전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젊은 모습은 없어지고, 백발과 주름이 곳곳에 보일 정도로 폭삭 늙어버렸다.
이제 회사는 자신처럼 경영에 소질이 없는 자의 손에 맡기기엔 너무나도 사업과 자산 규모가 커지고 말았다.
마침 이대일 회장이 손수 정한 후계자의 교육도 다 끝나가는 중이겠다, 슬슬 은퇴하고 대한제국으로 복귀할 때도 온 것 같다.
“정말 은혜를 많이 입었지···”
그동안 누려왔던 걸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의 생각을, 대한제국에서 보낸 전보 한 통이 방해했다.
전보의 첫 몇 줄을 읽어 본 안창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전 총리님께서는 왜 대한제국 내 PCDA 관련 시설을 정리하라고 하시는 거지···?”
눈살을 찌푸리고 의아해하면서 전보의 내용을 읽던 그였으나, 마지막 몇 문장을 본 그는 경악하고 곧바로 유럽에 있는 이대일에게 전보를 날렸다.
다급히 전보를 직접 보낸 안창호는 초조한 마음으로 답변을 기다리며 중얼거렸다.
“나라가 정말로 위기에 처했는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