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245)
매국노의 원수 자식-245화(245/773)
245_나의 투쟁 (1)
1918년 9월
메릴랜드, 볼티모어
왜 모르고 있었을까.
인간의 마음엔 악의와 무지가 가득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건 탐욕과 증오라는 사실을.
이제까지 몰랐다면, 최소한 아직은 대한제국으로 부를 수 있는 곳으로부터 늦은 밤에 급박하게 보내진 전보를 받은 지금 이 순간 확실히 깨달았다.
작년 1월에 미국 원정군과 함께 다시 유럽으로 간 지 1년 반 만에 다시 미국 본토로 복귀했다.
이제부터는 해군 내에서 항공을 총괄할 기구, 해군 항공국 (BuAer) 창설을 보조해야 했으나, 잠시 그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1달 정도의 (무급) 휴가가 주어졌다.
단순히 행정상 오류였는지, 아니면 대니얼스가 나를 워싱턴에서 보는 게 싫어서 인사이동을 하기 전에 임시로 취한 조치였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느 쪽이었든 간에 별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좋았다.
오래간만에 아이들이 성장한 모습도 제대로 보고, 아내와는 화끈한 시간을 보낼 기회였으니까.
그랬건만 이완용이 보낸 긴급 전보를 읽는 순간 온, 내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과 마음 둘 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친일파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과 “한일상호방위조약”이라는 명목상으로는 군사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무슨 정신머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영국과 프랑스도 의문을 가지는 이 조약을 승인하고 말았다.
쏴아아아아
찬물로 세수를 했다.
혹시나 이게 꿈인가 싶어서. 이게 꿈이었으면 해서.
몇 번이나 얼굴에 물을 끼얹었으나, 충격적인 소식에 넋을 잃은 듯한 거울 저편의 내가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한 나를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통곡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절규하는 쪽이 좋았을까.
하지만 가슴 속 그 어디에도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쨍그랑
주먹으로 거울을 내려치자 파편이 여러 개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헉···헉···”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분노가 심장과 폐를 단단히 움켜잡아 호흡하는 것도 너무 힘들 지경이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이젠 표면의 절반 이상이 싱크대와 바닥으로 훌뿌려지고 몇 조각만 남은 거울을 노려봤다.
얼마 남지 않은 조각에서 내 얼굴이 일그러져 비쳤다. 눈동자에선 방향을 찾지 못하는 살의가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처음에는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그다음엔 동부전선 파병을 간접적으로 부추기고.
마지막엔 기어이 일본이 한국에 손을 뻗는 것도 허용하는구나.
“스트라이크···아웃.”
끼이익
“대일···?”
침대에서 기다리다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세레나는 손에 피를 흘리는 채로 깨어진 거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잠시 입을 가렸다.
“···”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천근처럼 무거운 정적이 숨 막히게 내려앉은 화장실 안에서 나와 함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세레나는 뭐라 말을 하고 싶었으나, 발치에 점점 피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 제일 먼저 화장지로 내 주먹을 감싸줬다.
나를 아무 말 없이 거실로 데려가 구급상자를 꺼내어 손을 소독하면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생겼어요?”
“아주 큰 일이 일어났죠.”
이 상황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난 그저 내가 받은 전보를 그녀에게 전해줬다.
전보를 건네받으면서도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은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일그러졌다.
“세상에. 믿기지 않네요.”
이건 무슨 2차 대전 직전에 영국이랑 프랑스가 나치 독일한테 체코슬로바키아를 넘긴 거나 다름없잖아. 아니, 그거랑 비교할 수도 없는 외교적 실책이다
왜. 어째서. 얻는 게 뭔데.
개인적으로 나나 한국에 악감정이라도 있나.
고종이고, 이병무고, 일본이고, 윌슨이고, 왜 다들 선을 지키고 사는 게 이리도 힘드냐고. 아니면 그저 21세기의 상식으로 20세기를 재단하는 내가 잘못된 것인가.
속에서 너무 많은 생각과 감정이 복잡하게 옥죄어 오는 나에게 아내는 정신 차리라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꼭 껴안아 줬다.
얼마나 긴 정적이 지났을까.
냄비에서 넘쳐흐를 기세로 끓어오르는 물도 언젠가는 잠잠해지듯이, 내 의식 또한 평정을 잠시나마 되찾았다.
그리고 반석처럼 자리 잡은 평정 위에는 새로운 삶의 목적이 굳건하게 일으켜 세워졌다.
내 심정을 눈치라도 챘는지, 세레나는 다시 내 손을 잡고 침실로 데리고 갔다.
끼릭, 끼리릭
옷장 안에 있는 묵직하고 단단한 금고를 열자 기본은 수백 장은 넘는 서류 더미가 가죽 끈에 묶인 채로 그 위엄찬 모습을 드러냈다.
“읏차.”
그녀가 침대 위에 서류 더미를 올려놓고 끈을 풀자, 종이가 눈사태처럼 미끄러져내려 이불 위를 덮었다.
“공공정보위원회가 맡은 역할 중 하나는 전쟁 관련 외에도 윌슨 행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모두 검열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이건 제가 지금까지 검열당했던 개인과 단체명을 전부 모아놓은 거예요.”
“맙소사.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거죠?”
“음, 아마 최소 7,800명은 될 거에요. 한 번 더 말하지만, ‘최소’요.”
“와.”
몇 년간 수집해온 방대한 명단에 감탄할 틈도 주지 않고, 세레나는 나에게 또 목록 하나를 건네줬다.
“윌슨이 당선된 이후로 이번 정권 내에서 일어난 모든 대형 사건 사고에요. 제일 최근엔 독감 대규모 감염사태가 있고, 몇 년 거슬러 올라가면 4년 전에 일어난 러들로 학살도 있죠.”
“내가 부탁한 것보다 훨씬 더 분량도 많고 내용도 상세하네요.”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윌슨이 점점 내 신경을 거슬러서, 언젠가부터 만일을 위한 카드를 준비해놓기는 했지만, 이걸 진짜로 쓰게 될 줄이야.
그냥 계속 갈기만 하다가 쓸 데가 없어서 어디 창고에다가 박아놓기만 했으면 좋았을 걸, 기어이 꺼내게 만드는구나.
그런데 어쩌겠어.
어느 이름 없는 현자가 시대를 관통하는 지혜를 경건하게 입에 담은 적 있었지, 만일 누군가가 너를 아무 이유 없이 싫어하면 이유를 하나 만들어주라고.
그리고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오히려 너무 오래 참은 게 문제면 문제였지.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정리해야 할 게 하나 있긴 있었다.
아내의 두 손을 꽉 잡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마치 11년 전에 청혼했던 때처럼 그녀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세레나.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으면서 내가 아무리 미친 짓을 벌이고 다니며 무리한 부탁해도 다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알고 있긴 해서 다행이네요.”
“그리고 이제까지 저질렀던 그 어떤 일보다 더 규모가 크고 위험한 일을 저지를 생각이에요. 이번에도 함께 해주겠어요?”
실패할 시 우리에게 미칠 후폭풍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은 듯, 아내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내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나라가 제 나라고,
당신의 꿈이 제 꿈이며,
당신의 적이 제 적이에요.
당신이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옆에서 함께 걷겠어요.”
결의에 가득 찬 그녀의 선언을 듣자 내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불안함이 흔적도 없이 모조리 없이 증발했다.
전투를 앞두고 살생을 머뭇거리던 앨빈 C. 요크 병장에게 들려줬던 성경 구절을 속으로 다시 떠올렸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하늘 아래에 일어나는 일마다 적합한 때가 있다.
총과 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이 사그라지고, 피의 강이 말라서 바닥에 쌓인 시체가 드러나는 종전이 왔다.
이제 살아남은 자들이 상처를 안은 채로 고향으로 돌아가 미래를 건축하는 때가 매서운 겨울 뒤의 봄처럼 도래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무기를 내려놓을 수 없다. 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맞다, 그나저나 전보 끝까지 읽어봤어요?”
“···뭐요?”
세레나는 내가 그녀에게 건네줬던 전보를 다시 내 손에 쥐여 주며, 맨 밑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이런.”
첫 몇 줄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나머지 부분을 읽을 생각도 못 했던 나는 이번에는 글자 하나 놓치지 않고 끝까지 읽어봤다.
···허.
허참.
아놔 미치겠네, 이 새끼 진짜.
“아버님의 발상이 참···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시네요.”
이완용은 드디어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렸고, 한반도 역사상 유례없는 짓거리를 저지르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에 내 도움이 필요하다며, 처음으로 나에게 간절히 요청했다. 미국에서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오로지 나밖에 없다고.
그래. 이쯤 와서 뭘 숨기랴.
꼴리는 데로 다 들이받고 깽판이나 쳐야지.
원래 경험상 사람이란 살리는 게 어렵지, 죽이는 건 너무 쉽다.
윌슨 네놈이 내가 쌓아 올린 걸 모든 걸 무너트리겠다면 나도 호응해주는 게 합당하지 않겠나.
네가 이뤄낸 모든 업적은 다 묻어버리고 네가 저지른 모든 악행은 다 까발려주마.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선동과 날조를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제 어찌할 거예요?”
“대통령 각하께 성의를 보여드려야죠.”
윌슨의 팔다리를 천천히 하나씩 잘라서 반신불수로 만들어버린 후엔 바로 모가지를 쳐버려야지.
마침 그 새끼가 프랑스에 가 있겠다, 시기도 너무 완벽하잖아.
“우선 해군부 장관부터 밟아버리고 시작합시다.”
“예스! 저도 그놈 진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내가 한 번 보여주마.
소방관이 불 지르기 시작하면 얼마나 태워버릴 수 있는지.
*****
다음 주
워싱턴 D.C.
“어떻게 된 거지···?!”
해군부 장관 조지퍼스 대니얼스는 책상 앞에 놓인 워싱턴 포스트 (The Washington Post)를 포함한 여러 일간지의 1면을 보고 동공이 요동쳤다.
전부 다 자극적이고 강렬한 제목으로 특정 인물을 규탄하고 있었다.
‘뉴포트의 성추문 (Newport Sex Scandal)!’
‘도를 넘은 함정수사 (Entrapment Gone Too Far)’
‘대니얼스가 제대로 정신 나갔나 (Is Daniels Absolutely Mad)?’
뉴포트 군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란한 일을 캐내려고 비밀리에 진행한 특별 수사가 발각되어 언론에 퍼진 참사를 마주한 대니얼스는 식은땀을 흘려댔다.
몇몇 기사는 민간인과 장정들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과 그 심각성에 잠시 초점을 두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수사 방식을 거세게 비판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마치 대니얼스가 미 해군의 자랑스러운 장정들을 더러운 성범죄자들에게 팔아먹는 악랄한 포주라도 되는 듯한 묘사와 함께.
“젠장···젠장할!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야?!”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위화감이 그의 신경을 벌레처럼 갉아 먹어갔다.
누군가 자신, 정확히 자신만을 노리기 위한 덫이라도 펼친 걸까.
똑똑똑
“장관님, 부르셨습니까?”
해군부 차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노크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오자, 얼굴이 창백해진 대니얼스는 워싱턴 포스트 1부를 들어 보였다.
“크-큰일이야, 루스벨트, 우리의 수사가 들켰다고!”
“저런.”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는 대니얼스와 달리 루스벨트는 신문을 읽으며 기사의 논조에 동의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를 탓하는 내용은 별로 없군.’
대니얼스는 억울하다는 듯이 루스벨트를 쳐다봤으나, 차관은 그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루스벨트는 이 사태에 대해 벌써 감이 오는 게 있었으나, 결론을 내리는 건 잠시 보류해두기로 했다.
“어느 놈이야···대체 어느 놈이 입을 함부로 놀린 거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리고 장관님, 어,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망할, 이번엔 또 뭐야?!”
루스벨트는 착잡하게 한숨을 내쉬며 미국 상원에서 보낸 공문 하나를 꺼내어 대니얼스에게 보여줬다.
“상원해군위원회 청문회 (Senate Committee on Naval Affairs)에서 장관님을 소환하셨습니다.”
“뭐-뭐라고···?!”
이제 자신이 끝장났다는 걸 실감이라도 했는지, 대니얼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