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286)
매국노의 원수 자식-286화(286/773)
286_타인은 지옥이다 (2)
1924년 2월
만주국, 하얼빈
“···이건 무슨 악랄한 농담인가?”
“솔직히 그렇다고 해도 믿을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편지를 본 만주국 총리 이완용과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할 말을 잃은 채로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니콜라이 2세가 의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총리실 안에 천근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의 장막을 찢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어. 아무래도 잘못 읽은 건 아닌 게 맞지···?”
“···그런 것 같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 직후, 니콜라이 2세는 이완용의 설득에 굴복하여 자필로 레닌의 추도사를 써서 보냈다.
이완용 본인도 소련에서 이 추도사를 받은 볼셰비키들이 감사를 표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고인을 욕보이는 거냐며 편지를 찢거나 불태워버린다 해도 그러려니 할 준비가 되어있고, 오히려 그 모습을 외교적 결례라며 선전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소련에서 격식과 예의를 갖춘 공식 서신이 도달할 거라고는 만주국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불과 10년 만에 두 “제국”의 총리직을 맡으면서 별별 기묘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많이 겪어본 그였다.
그런데도 이번 일은 정말 격이 다를 정도로 그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소련 내부에서도 이 사실을 알면 깜짝 놀라는 자들이 적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를 어쩌지···”
만약 레닌이 소련으로 오라고 했으면 더 볼 것도 없이 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마침 요새 들어 보드카를 끼고 살아서 그런지 건강도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는 핑곗거리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완용에게 있어서 스탈린은 레닌이나 국방장관 레프 트로츠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미지수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만 서기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것 보니 나름 고위 인사인 게 틀림없었는데 왜 자신을 찾는 것일까.
‘이런 세상에, 나는 또 왜 부르는 거냐고···’
니콜라이 2세는 앓는 소리를 내며-검은 머리카락을 찾으라고 해도 찾아볼 수 없는-머리를 벅벅 긁는 총리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언제 고민했냐는 듯 환히 웃는 이완용이 내린 결정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이 스탈린이라는 자,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뭐-뭐라고? 리 백작, 지금 제정신인가?!”
“이대로 소련과 영원히 대치 상태에 있을 수도, 그렇다고 붕괴시킬 수도 없으니 국가 차원의 교류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소련 내에서는 만주국 자체를 정식 국가라고 인정하지 않고 괴뢰국가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자도 적지 않은 판국이다. 아니, 어쩌면 그게 주류일 가능성이 더 컸다.
물론 이완용 본인도 총리로서 공석에서는 부인할 뿐이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불려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팔랑
“폐하. 지금 이 편지에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서기장 스탈린이 ‘만주국 총리’인 저와 회담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습니다.”
“그 말은···?”
편지를 흔들어 보이던 이완용은 니콜라이 2세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이런 작자가 아직도 살아있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그 원흉이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고 말았다.
아마 그날 밤 그는 숙소-아니, 사무실로 돌아가 책상 밑에 있는 보드카를 또 보약처럼 들이킬 것이다.
“레닌과는 달리 이 스탈린이라는 작자는 최소한 저희를 국가로 대우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아. 아하!”
“게다가 모스크바나 페트로그라드 등 소련 내 지역으로 오라는 말도 없이, 만남의 장소를 제안하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는 저희 측 사정을 고려해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고 나니 이완용은 오히려 갑자기 더 의구심이 들었다.
왜 이렇게 호의적이고 공손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도대체 만주국에서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걸 얻어내려는 수단이 협박일까 아니면 회유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한 번 시도해볼 가치는 있는 도박이었다.
만주국에서도 패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가보겠습니다.”
“으음···”
레닌이 크나큰 빈자리를 남겼으니, 그 자리를 탐내고 공산당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당쟁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어쩌면 지금이 소련과의 관계를 정리해서 외부로서의 위협을 대거 줄일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조심해 리 백작. 절대로 소련 안으로 들어가지는 말게나.”
“당연히 저는 안 갑니다, 백치도 아니고.”
위치는 소련과 만주국 사이에 있는 중립국을 찾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소련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정치국에 붙잡혀 처형당하거나, 감옥 안에서 썩으며 죽을지도 모르니까.
“혹시 아나, 볼셰비키들이 자네의 능력을 높게 사서 공산당에서 일하라고 붙잡을지, 하하하!”
“그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
니콜라이 2세의 농담에 맞장구치던 이완용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그를 노려봤다.
아무리 눈치 없는 그도 그 정도 눈빛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음. 미안하네.”
니콜라이 2세가 사과를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 발언은 이완용에게 자신이 러시아에 억류되었다가 정신 차려보니 만주국을 건국하게 되었다는 현실을 아주 생생하게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만악의 근원이었던 그 망할 놈의 예언서 또한 떠올랐다.
도대체 그 저주받을 불쏘시개는 어떤 미친놈의 작품일까.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 살아있기나 할련지 궁금하군.’
제발 그자가 생존해 있기를 이완용은 기원했다.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중장에게 그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령할 수 있도록.
*****
11월
메릴랜드, 볼티모어
“어흑.”
“갑자기 왜 그래요, 대일?”
내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자 세레나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뇨, 갑자기 그냥 좀 추워서 그래요.”
누가 나한테 저주라도 걸었나 왜 이렇게 오한이 느껴지냐. 아니, 혼다 곶 재앙 이후엔 나름 사람들과 충돌도 안 하고 얌전하게 살았는데.
···아 글쎄, KKK는 사람 새끼가 아니니까 논외로 치자고요.
“저런. 핫초코 한 잔 더 마실래요?”
아내는 진수성찬이 차려진 달콤한 마시멜로가 사르르 녹아가는 핫초코 한 잔을 내게 건네줬다.
아, 뜨끈하고 좋네.
핫초코도 핫초코지만, 넓은 식탁 위에는 추수감사절 메뉴로 가득 차서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칠면조, 매시 포테이토, 그레이비, 옥수수 등 일반 미국인들 가정에서 이 시즌에 올리는 메뉴 외에도 아내는 나를 위해 불고기나 (뭔가 좀 왜곡된) 부침개 같은 한식도 올려줬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오레오의 크림에다가 고깔모양 사탕, 캔디콘을 꽂아 넣어 귀여운 칠면조 모양 과자도 만들어서 식탁을 장식해놨다.
아이고, 마님···
그리고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이 가득 찬 식탁 주위에 전부 모인 여섯 남매의 얼굴이 보니 눈물도 찔끔 나올 것 같다.
형제도 없었고, 아버지 얼굴도 기억 못 했던 내가 다음 생이라고는 해도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모르겠네.
어쩌면 감사의 시절에 그 어느 것보다 적합할 생각일지도.
감사함을 잊지 않은 채로 가족 기도를 올린 후, 식사하면서 아이들과 소소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리 재선이는 혹시 뭐 감사할 일 있어요?”
“음. 글쎄요···”
“뭐, 천천히 생각해봐요. 재익이는요?”
재선이가 여전히 고민하는 동안, 재익이는 내 질문을 듣고는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할 일이 있다기보다는, 있‘으’면 좋겠네요.”
“···뭐가요?”
“대일, 제이크가 버클리 공대에 원서 넣었어요. 내년 봄에 결과 나올 거에요.”
“세상에. 꼭 붙기를 바랄게요!”
어흑, 제이크가 문과도, 예체능도 아니고 제대로 된 이공계 쪽으로 들어간다니. 이 아버지는 정말 감동 받았다!
와, 그러고 보니 첫째 쌍둥이가 이제 슬슬 대학교에 들어갈 때도 됐구나.
맙소사,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거지.
···하, 아이들이 자라는 걸 계속 지켜보지 못하고 중간에 이 아이들의 삶에서 기억의 공백을 여러 번 만들었네.
가만있자, 재익이는 UC 버클리에 지원했고.
“재선이는 대학 어디로 갈 거예요?”
“흠.”
뭐, 괜히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좋으려나, 쓸데없이 아이들 간에 경쟁을 부추기는 건 피하고 싶으니.
어차피 학점 관리 잘하고 날라리처럼 살지만 않으면 어느 대학에서 무슨 전공을 하든 난 아이들을 지원해줄 생각도, 능력도 있으니까.
웨스트포인트만 아니면 돼.
웨스트포인트만 아니면.
“아, 말이 나와서 그런데, 감사할 게 확실히 있네요.”
자신의 차례가 다시 찾아오자, 이번에는 재선이는 당장 자신의 방으로 튀어 올라갔다.
미식축구 선수 아니랄까 봐, 덩치에 걸맞지 않게 엄청난 속도로 올라갔단 녀석은 계단을 제대로 밟지도 않고 점프하듯이 뛰어 내려와 식탁으로 돌아왔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는 재선이의 손에서 편지 한 통이 보였다.
어.
잠깐만, 너 이 녀석 설마.
“···우리 재선이. 지금 손에 있는 그거 내가 생각하는 거 맞아요?”
“넵, 웨스트포인트 추천서-”
“야 이 미친-!”
“-를 받는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서입니다만.”
“그거나 그거나!!!”
그 순간, 나는 모든 부모가 한 번씩은 다 경험해보게 된다는, 일종의 관례를 드디어 치르고 말았다.
결혼한 지 약 20년, 처음으로 자식 놈 때문에 뒷목을 잡았다.
“야. 이재선. 너 그거 뭐야. 그거 어디서 났어, 도대체 누가 준 거야?!”
“퍼싱 원수님이요. 뭐, 그냥 주시려고 했는데 제가 이제까지 준비해온 것도 있어서 정정당당하게 하고 싶다고 해서 시험치기로 했어요. 원수님이 참 대견하다고 하시더군요.”
“자랑이다, 이 녀석아!”
시발.
전에 내가 프랑스를 떠나기 전에 나한테 해 준 말이 빈말이 아니었을 줄이야-
어 잠깐만, 그 전에 뭔가 또 중요한 디테일을 하나 언급했던 것 같은데···
“시험을 준비해왔다고···?”
“말씀 안 드렸어요? 맥아더 장군님이 시험 준비 요령도 계속 보내주셨는데-”
“맥아더!!!!!!!!!!”
내가 평상시에 늘 쓰던 존댓말도 안 쓰고 씩씩대는 모습에 아이들은 약간 겁을 먹은 듯 했고, 아내는 내 손을 따스하게 잡아줬다.
“아이들이 뭐 하든 간에 다 응원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지금 만약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가서 인종차별의 수난을 이겨내고 퇴교 없이 무사히 육군 장교가 된다고 치자.
그러면 결국 얘는 2차 대전에 저기 유럽으로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도 최소 영관급 장교로서.
윌리엄 홀시가 알려줬다. 나치당이 부상하고 있다고.
빌리 미첼이 경고했다. 일본이 해군 항공대를 계속 키워나가는 중이라고.
하나는 확실했다.
시기와 판도 자체는 다르겠지만, 2차 대전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그리고 내가 준비해야 할 일은 많았다.
하지만 이제 급히 해야할 일이 하나 생겼다.
일단 더글러스 맥아더와 만나야겠다.
그리고 이 새끼 면상에다가 죽빵을 갈겨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