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381)
매국노의 원수 자식-381화(381/773)
381_폭풍이 불기 전 (2)
1936년 9월
일본 제국, 도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부키 극장, 가네마루좌 (金丸座) 안이 무대를 제외하고는 엄숙한 어둠으로 채워졌다.
얼굴에 붉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분칠을 한 배우들은, 최근 가부키 극장에서 퍼진 대유행인 ‘추신구라 (忠臣蔵, 충신장)’의 내용을 정열적으로 연기하고 묘사했다.
주군이 모욕받은 무사들이 저지른 피비린내 나는 복수와 끔찍한 자기희생을 주제로 한 공연이 관객을 사로잡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제 끝나지.’
그 와중에 무소속 의원 오자키 유키오는 나무로 된 악기와 목에 핏대를 세운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만 가득한 극장에서 무표정하게 연극을 관람할 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과는 달리 다른 관객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부키 공연을 훨씬 더 몰입해서 관람하는 모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관동 대지진이 도쿄를 일어난 뒤에 그랬던 것처럼 600만 명이 넘는 도쿄 시민의 마음은 안심은커녕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감으로 짓눌려 있었다.
다만 그때는 대지가 일으킨 재앙이었고, 몇 개월 전에 일어난 건 인간이 일으킨 재앙이라는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힘들 때일수록 연극과 영화가 흥하는 건가.’
리 다이이치 제독 부부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이미 두 자릿수가 넘어간) 사업 중, 영화사업이 대공황 당시에도 어마어마하게 흥했다고 들었던 게 기억났다.
대공황이 제일 극심한 시절에도 미국에선 매주 6천에서 8천만 정도의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아갔다는 걸 안 오자키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더니만···’
몇 년 전, 리 다이이치가 보내왔고 아직도 집에 남아있는 금괴를 떠올렸다. 그런 식으로 지원을 받는 반전주의 정치인들 또는 저명인사들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게 너무나도 소름 끼쳤다.
역시나 식품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대공황에도 타격받기는커녕 오히려 더 흥하는 사업을 여러 굴리고 있는 자만이 가능한 씀씀이가 아닐 수 없었다.
“이요오오옷!”
무대 위에서 도검 소품을 들고 무사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기합과 함께 그들의 적을 내리쳤고, 희생자들은 비명과 함께 품에서 피와 창자처럼 보이는 붉은 천을 풀어내면서 쓰러졌다.
과장된 연기였으나 오자키는 육군 장교들이 일으킨 2.26 사건을 다뤘던 신문기사에 실려진 사진을 떠올리고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래도 육군 내에서 이런 식의 돌발상황과 혼란의 대안처럼 보이는 통제파를 향한 지지가 점점 늘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던 것 같다.
물론 통제파 또한 만주국을 향한 침략을 옹호하고 주장하는 것 다른 바가 없었지만, 파벌의 이름만으로도 규율의 필요성과 약속을 설파하는 시늉을 하기엔 충분했다.
5.15 사건 때와는 달리 대중은 반란군에게 크게 공감하지 않았다. 예상외로 반란군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이 거의 만장일치로 나왔고 군대 내에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이누카이가 살해됐을 때, 사람들은 군국주의 및 국가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 단호한 물리적 행동으로 부패한 정당 정치와 사회적인 비리를 박살 내버릴 거로 믿었었다.
‘다들 참으로 순진했단 말이지.’
그러나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부패와 비리는 지속되었고 2.26 사건의 종결 후엔 국민은 그들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는 대신 ‘질서 정연’한 일상이 회복되기를 바랐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를 하는 걸 보며 박수치는 대신 오자키는 먼저 극장에서 빠져나왔다. 가장 뜨거웠던 열기가 가시고 조금은 시원해진 밤공기가 거리에 쾌적하게 가라앉았다.
바스락
열심히 호객 행위를 하는 가게들과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에서 비추는 불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거리를 걷는 그의 발에 종이 하나가 밟혔다.
오자키는 새롭게 총리로 임명된 외무대신 출신 히로타 고키 (廣田弘毅)의 정책을 다루고 있는 신문을 주워들었다.
“···”
일단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순수 문관 출신 총리였기에, 어쩌면 문민통제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까 희망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가 친미파 외교관으로 알려진 요시다 시게루 (吉田 茂)를 새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발탁한 건 정말 바람직한 출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육군이 그의 임명을 열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그의 지명을 철회했고, 히로타의 타협, 아니, 순응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향후 육군대신의 임명은 육군 고위 장성들의 승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요구를 수용하기까지 한 걸 보면 문민통제는 이미 물 건너갔다.
현시점에 국가 예산의 60%가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오로지 국방비로만 가고 있는 현 상황 또한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쯧.”
오자키는 신문을 구겨버려 집어던지고 집으로 향했다.
“당신은 이미 보고 계십니까···”
그 어떤 신문에서도 공식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풍문에 의하면 2.26사건 당시 살해당했던 전 총리, 사이토 마코토 예비역 해군 대장은 사망 직전에 기묘한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리 다이이치.”
가족을 지켜달라는 애원, 천황 폐하 만세, 암살자를 향한 규탄 등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왜 하필 마지막으로 그 이름만을 읊어댔을까.
정답을 알 것 같은 오자키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관동 대지진 이후에 힘겹게 재건한 도쿄의 야경을 둘러봤다.
“과연 이 모든 것이 다시 무너지는 날이 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
두려움과 체념에 사로잡힌 채로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오자키의 육체와 정신은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날이 오면 리 다이이치가 온 일본인의 생살여탈권을 거머잡을지도 모를 것 같다고.
그리고 지금 이 와중에도 그는 냉정하고 흉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고
*****
1937년 1월
워싱턴 D.C.
“으윽!”
털썩
내 바로 옆에서 해군부 장관, 클라우드 스완슨 (Claude A. Swanson)이 쓰러졌다. 아니 이건 또 뭐여, 왜 이래?!
“아이고 세상에!”
그의 몸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난 다른 귀빈들처럼 완전히 당황했지만 동시에 제일 먼저 몸을 움직였다.
“정신 차리십시오, 장관님!”
몇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손은 반사적으로 그의 맥박과 호흡을 먼저 확인하고 간단한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으헉?!”
다행히도 응급처치가 통했···다기보다는 그렇게까지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았는지, 스완슨 장관은 얼굴이 창백하고 식은땀을 흘려대는 채로 의식을 되찾았다.
“여긴 어디고 난 누구지···”
“백악관의 이스트룸에 계십니다, 클라우드 스완슨 해군부 장관님.”
“아···그렇지, 그래. 이런. 요즘 너무 무리했더니···고맙네, 리 제독.”
스완슨이 멋쩍은 표정을 지은 채로 내 부축을 받고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뜬금없이 나를 향해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타이태닉호 때도 그렇고 인명 구조에는 도가 텄군!”
게다가 하필 근원지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본인이었고, 그 때문에 나를 향한 호불호를 떠나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따라 박수쳤다.
아니, 잠깐만요, 어차피 내가 응급처치 안 했다고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고요, 이런 것 가지고 그러지 마, 사람 민망하게!
행사가 다 끝난 다음 날, 여전히 민망함을 씻어내지 못한 루스벨트를 알현하러 나는 신임 해군참모총장 윌리엄 리히 대장과 함께 오벌 오피스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에게 들어보니 스완슨은 무려 남북전쟁 당시에 태어난, 그러니까 70이 넘는 고령의 관료였음에도 불구하고 격한 업무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하였고, 보통 이런 상황이면 해군부 차관이 장관 대행으로 업무를 맡아야 하는데···
“아니 뭔 이번 정부 해군부에는 마가 끼었습니까.”
“그런 것 같지?”
(또 다른) 루스벨트 일가 출신 해군부 차관, 헨리 루스벨트 (Henry L. Roosevelt)는 스완슨보다 더 젊었건만 작년에 먼저 사망했다.
그리고 그다음 차관으로 온 건 하필 다른 인물도 아니고 바로 그 토마스 에디슨의 아들인 찰스 에디슨 (Charles Edison) 되시겠습니다, 짜잔.
“그 애비에 그 자식일 거라며 테슬라 씨가 지켜보라고 했는데 역시나···”
“음···”
애석하게도 에디슨은 차관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저 순전히 아버지 인맥빨로 그 자리에 들어온 무능아로 밝혀졌다 이겁니다.
···테슬라는 신이 나서 내가 뭐랬냐며 깔깔거리고 있겠군.
자, 솔직히 일반적으로는 해군부 수뇌부가 뭐 어떻게 되든 내가 해군 제독으로 일하는데 큰 의미가 없었다.
조지퍼스 대니얼스나 에드윈 덴비처럼 정말 인종차별주의나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나한테 시비 거는 빌런 같은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논외로 치자고.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이거 참 내가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지겠어.”
해군부 장관은 제 기능을 못 하고 해군부 차관은 무능해서 해군부 장관은 사실상 공석이나 다름없었다.
“참모총장님은 잘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그거 참 고맙군.”
즉, 한 마디로 지금 리히가 해군참모총장 외에 실질적으로 해군부 장관도 겸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와.
와 세상에.
물론 2차 대전 당시에 해군총사령관 (COMINCH)까지 맡았던 어니스트 킹까지는 아닐지라도 리히는 지금 역대 최고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해군참모총장에 등극한 것이다.
“잘 부탁하네, 대일 리 제독.”
“아니, 그건 제가 참모총장님께 드려야 할 말씀 아닙니까.”
“그게 말이야···난 임기 끝날 때까지 무사할 것 같나? 자네가 워싱턴에 있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해군부 장관들한테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말이야.”
리히는 나에게 농담과 진담이 반쯤 섞인 눈빛을 날렸다. 참모총장님, 저 이번 일과 관련 없습니다, 진짜로요.
아니 뭐 그래, 이제까지 내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장관이랑 대통령 각각 3번씩 제끼긴 했지만, 이번은 아니라고!
“농담일세. 그건 그렇고 각하가 무슨 일로 자네를 보자고 했는지 듣긴 들었나?”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뭐, 곧 알게 되겠지.”
끼이익
오벌 오피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절그럭, 절그럭
“아, 리 제독. 먼 길까지 와줘서 고맙군.”
···20kg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아령으로 열심히 펌핑하고 계신 루스벨트가 나와 리히를 맞이했다.
야이씨 저 근육 좀 봐, 선거 유세에 상체를 유난히 강조한 사진을 많이 썼는데 합성이나 편집이 아니었다니, 젠장할.
그리고 나랑 팔씨름하면 5초 컷 낼 것 같은 양반이 나에게 손을 내밀자 솔직히 약간 두려웠다.
꽈아아아악
“그어어어허헠!”
“이런, 악력이 왜 이런가, 리 제독. 근손실이라도 왔나?”
FDR의 악력은 내가 감히 따라 할 수 있는 경지를 아득이 넘어섰다. 아니, 이쯤 되면 아령 2주간 압수해야겠는데요?!
설마 이 양반 나중에 2차 대전 터지면 처칠이나 스탈린하고 악수할 때도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겠지···
“어···각하에 비하면 조금 상체 운동은 소홀히 한 것 같긴 하고, 조금 부끄러워질 지경입니다.”
“어제 스완슨 장관 일도 그렇고 제독은 업적에 비해서 참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단 말이지. 어쨌든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데 궁금할 만도 할 거야.”
드르륵
루스벨트가 내 앞에 문서 여러 장을 꺼내는 순간, 난 내가 워싱턴으로 호출된 이유와 진짜로 부끄러워야 할 일이 뭔지 깨달았다.
“자네가 운영하는 기업과 후원하는 국가가 최근 들어서···새로운 거래를 하기 시작했더군?”
아, 이런.
올 것이 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