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397)
매국노의 원수 자식-397화(397/773)
397_배신과 야만 (1)
1937년 3월
소비에트 연방, 할힌골 서쪽
보편적인 상식이란 객관적인 통계와 긴 역사의 증명 없이는 쉽게 형성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상식”이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도 바뀌고, 다양한 출생 배경과 걸어온 삶의 발자취에도 천차만별 독특한 모습을 취하는 법이었기에.
그러나 지금 만주군의 방어진에 돌격했다가 막대한 손상을 입고 다시 할하 강 서쪽으로 잠시 물러난 소련군 극동군 사이엔 어느새 보편적인 상식 두 가지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그들을 상대로 초인적인 방어를 펼친 만주국과 만주군은, 그딴 관념 따위는 개한테나 줘버린 존재라는 것.
또 하나는 소련의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절대로 약점과 실패를 쉽사리 용납하지 않는 자이며, 이제 그들 중 최소 1할은 숙청대상에 올랐다는 사실을.
스탈린과 오랜 친분 덕분에 – 불과 몇 개월 만에 우주적 진리의 경지에 도달한 – 두 번째 부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극동군 사령관 그리고리 쿨리크 대장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끼릭, 끼리릭
퐁
만주국의 야포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는 막사 안에서, 쿨리크가 왼손으로는 플라스크를 열고 기울여 쿨리크의 바짝 말라가는 입으로 독한 내용물을 흘려보냈다.
미국 대기업 태평양상거래개발조합의 주력 상품 중 하나인 코카콜라를 아직도 몰래 마셔대는 일부 불순분자와는 달리 자신은 떳떳하게 업무 중에 보드카만 마셔댔다.
툭, 투두둑
쿨리크가 두 손을 얼마나 떨어댔는지, 술의 절반 이상은 그의 입이 아니라 손을 타고 내려와 아직도 갈라져 있는 대지로 흘러버렸다.
꼴불견인 모습이었으나, 그는 – 왼손보다 더 떨고 있는 – 오른손에 쥐어진 물건의 존재감 때문에 도저히 신경 쓸 여름이 없었다.
“이···이건 또 대체 뭐야.”
붉은 군대를 무정하게 배반하고 오랜 숙적인 만주국에 합류한 제2대 “만주군 총사령관”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가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는 누가 보내온 건가···?’
‘아군 중에 만주군에 포로로 잡힌 자에게 이걸 주고 돌려보낸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가지고 온 포로의 상태가 멀쩡한 모습에 쿨리크 휘하의 병사들은 적잖게 동요하는 듯했다.
‘미친 남작이 손가락 잘라서 목걸이 만들고 목 잘라서 탑 쌓는다던데, 쟨 어떻게 살아왔냐···?’
‘아무래도 운게른 그놈이 다른 전선에 있었던 거 아닐까?’
‘이 새낀 며칠 동안 처 졸고 있었나, 그 새끼가 우리 유인했잖아!’
오른손에 있던 편지를 한참 동안 멍하게 쳐다보던 쿨리크는, 당장 이 편지를 찢어버리는 대신 마음을 굳게 먹고 편지를 뜯어봤다.
‘친애하는 그리고리.
자네와 이런 식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네. 할 말이 정말 많다만, 그걸 일일이 다 적으면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다 합친 것보다 굵어지겠지.
우선 그 무엇보다도 내가 이번 전투를 포함해, 소련에서 탈출한 이후부터 일어나버린 모든 얼빠진 과정 중에서 그 어떤 즐거움도 얻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네.
오히려 매일매일 내 손으로 죽인,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죽이게 될 동포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을 청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지-’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쓴 편지로 보였으나, 쿨리크는 조금도 감동을 하지 않고 그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지금이라도 소련으로 돌아와서 심판을 받으시지, 그래. 추하게 혓바닥만 긴 비겁자 녀석 같으니라고···”
그런데도 쿨리크는 한때 자신이 나름 존경했던 장군이 친히 써서 보낸 편지를 계속 읽어나갔다. 정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자네를 포함해서 소련의 모든 전사가 꼭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다네. 스탈린은 우리 붉은 군대를 단 한 번도 인격체로 대한 적이 없어. 우리가 모두 전부 도구였을 뿐이라고.
그는 붉은 군대 사령관들의 부인과 바람을 피워댔고, 정작 자신의 부인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하고 무례하게 대해서 결국 자살로까지 몰아넣었지.
친애하는 그리고리. 그대에게 나는 그저 붉은 군대를 배신한 매국노로 보일지도 모르겠군. 물론 나는 절대 그 혐의를 일절 부정하지 않고, 역사에 오명을 남길 준비가 되어있다네.
하지만 생각해보게. 지금 이미 직장 동료, 친구, 그리고 가족관계를 불문하고 소련의 인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살해하고 있어.
군대라고 예외는 아니라는 걸 알겠지. 만인의 만인을 향한 배신의 열풍이 과연 누구 때문에 일어났을 것 같나.’
투하쳅스키의 질문에 쿨리크의 머릿속에선 반사적으로 답이 튀어나왔다.
“그거야 뭐 예조프 그 녀석 때문 아니겠나.”
붉은 군대의 일부 고위 간부들은 – 누가 엿들을 걱정이 없는 곳에서 – 몇 개월 동안 일어난 대규모 체포를 보고 예조프시나 (Yezhovshchina, 예조프의 통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었던 그는 잠시 그 자리에서 굳은 채로 고민했다.
겐리흐 야고다도 그렇고, 니콜라이 예조프도 그렇고, 지금껏 스탈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따르지 않은 자가 있었던가.
과연 예조프가 지금껏 일어나는 대규모 유혈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찌그덕
툭
표정이 매우 불편해진 쿨리크는 곧바로 편지를 꾸겨서 집어 던져버렸다. 주변을 다급하게 둘러보는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감정이 피어났다.
아마도 두려움, 불안함, 그리고 의심 이 중 하나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젠장할.”
그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뭐였든지, 이런 편지를 보낸 투하쳅스키의 의도가 뭐였든지, 쿨리크가 어마어마한 대패를 당한 무능한 지휘관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를 어쩌지, 어쩌면 좋냔 말이다···”
우유부단하고 근심에 가득 찬 쿨리크가 결정을 하는 것보다 모스크바에서 보낸 전보가 그에게 도착하는 게 훨씬 더 빨랐다.
그렇게 할힌골 전투가 일어난 지 몇 주도 되지 않아 쿨리크는 모스크바로 끌려갔다.
*****
4월
스페인, 부르고스 (Burgos)
국민파의 총사령관, 프란시스코 프랑코 바하몬데는 스페인 곳곳에 각종 거점을 설치해왔다.
슈우우웅
끽, 끼이이익
그중에서 대규모 비행장도 갖출 정도로 제일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인 도시, 부르고스에 여러 대의 수상한 비행기가 도착했다.
스페인의 대부분 시민, 그리고 상당수의 군인조차 본 적 없는, 독일 공군의 비행기들은 착륙하는 비행장에 적지 않은 구경꾼을 끌어모았다.
“읏차.”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메서슈미트 (Messerschmitt) Bf 109 전투기에서 한 프로이센 귀족 출신의 장교가 내렸다.
“여어, 볼프람.”
“붉은 남작 어서 오고.”
콘도르 군단의 공군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중령은 그의 사촌 형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대령을 반갑게 맞이했다.
프랑코군의 일부 장교들은 푸른 눈, 금발 머리, 군인다운 몸가짐, 그리고 건강한 신체를 가진 두 융커 장교를 보며 히틀러가 그렇게도 강조하던 “아리아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아니 뭐 설마 사령관직 인수인계하러 온 건 아니지?”
“글쎄, 딱히 그런 지시는 안 받았지만, 솔직히 나도 계급이 좀 신경 쓰이긴 해. 그건 그렇다 치고, 야, 여긴 아비시니아보다는 훨씬 더 좋은걸?”
“그래도 여기도 안 좋을 때는 안 좋아. 얼마 전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오고, 또 비가 왔더라고. 공항 활주로는 완전히 물에 잠기고, 얼음도 얼고 안개까지 끼더라고.”
“스페인에도 겨울이 있긴 있었구나···”
사촌 동생의 경험담에 고개를 끄덕인 만프레트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어 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여긴 뭐 보급은 잘돼?”
“···이 인간 또 시작이네, 아놔.”
아비시니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지원(…)하러 갔을 때 리히트호펜은 그들의 실착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여러 가지 배운 게 있었다.
한 번은 이탈리아군의 양해를 구해 실험을 한 번 해본 결과, 역시나 사막에서는 탱크 엔진 및 부품 마모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걸 관찰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본토에선 그 한계까지 실험해본 적이 별로 없었지만, 최소한 10,000km는 버텼던 반면, 사막에서는 5,000km 정도 운행하면 엔진이 완전히 마모되는 경우가 많았다.
만프레트는 그의 사촌에게 모래의 바다 위에선 속도, 행동력, 그리고 주도권을 쟁취하는 자가 승리를 거머쥐며, 차량화 부대와 기계화 부대 중심의 기동전이 핵심이라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선 문제점이 있지. 전투 위치가 항구에서 멀어질수록 부대는 경량화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대대적인 병참부대가 없다면 전투를 시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초월적인 교환비를 보여줘 온 세계를 놀라게 했던 아비시니아가 끝내 패배한 이유 중에서 결국엔 포탄 외에 야포를 이동할 수단 또한 모두 고갈된 것도 컸었다.
나름 소중한 교훈이라고 본인은 생각해서 열심히 설명했건만, 볼프람은 정말 지겹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형은 왜 전술이랑 전략 얘기할 때마다 시작은 뭐로 했든 간에 결국엔 병참으로 끝나는 건데?”
“그게 그만큼 중요한 걸 나보고 어쩌라고···”
자신을 이해 못 하는 사촌 동생에게 한탄하며 만프레트는 융커 52 폭격기를 바라보며 중요한 질문을 했다.
“그래서. 이걸로 폭격한다 이거지···?”
“그렇지.”
볼프람은 만프레트를 자신의 숙소로 데려가 지도를 한 장 펼쳤다.
“공화파군의 도주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도시 내부에 있는 대규모 무기공장을 완전히 박살낼 예정이야.”
“그래···?”
만프레트는 지도에서 폭격 경로를 슥 따라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이 피어났다.
뭔가 이번 폭격에는 그가 모르는 다른, 더 악랄한 사정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
워싱턴 D.C.
“하, 이런···”
“처음도 아닌데 왜 그러나.”
해군참모총장 윌리엄 리히 대장에게 붙들려 난 백악관의 오벌 오피스로 향하는 중이었다.
리히는 지금 현재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각료 중 그 누구보다도 그와 많이 만나는 귀하신 몸이지. 정말 대단하긴 해. 그런데 안 대단한 게 뭔지 아나?
“처음이 아니란 점이 제일 문제입니다, 참모총장님···”
내가 실제 보직은 해군 정보국장이건만, 사실상 리히의 참모장에 가까운 신세가 되어버려서 그가 루스벨트를 볼 때마다 나도 같이 끌려간다는 점이요, 싯팔!
“영광인 줄 알라고. 특히 이번에는 칭찬해주려고 자네를 부르는 거니까.”
아, 네, 그러십니까···
쩔그럭, 쩔그럭
“잠시만 기다리게, 리히, 리. 이번 세트만 끝내고.”
오벌 오피스 안에 들어가니 역시 그러면 그렇지, 루스벨트가 수십 킬로짜리 아령으로 열심히 펌핑을 하고 계셨다.
차마 할 말을 잃은 나의 귀에 리히가 조용히 속삭였다.
“요즘에는 그래도 일이 좀 바빠서 좀 운동시간이 줄어들었다고 하시더군.”
“그래서 대신 중량을 높였다 이겁니까.”
우리가 속삭이는 걸 듣기라도 했는지 루스벨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세트 완료와 함께 아령을 내려놨다.
“참으로 힘차고 강해 보이십니다, 각하.”
“고맙네. 하지만 지금 이런 나보다 더 강한 게 누군지 아나?”
그리고 난 아마 물이라도 마시고 있었으면 루스벨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고 뿜었을 것이다.
“소련군의 첫 번째 공세를 막아낸 만주군 병사들이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잘 믿기지 않습니다, 각하.”
“그렇지. 절대로 만주군 자체가 그렇게 강해서 이뤄낸 승리는 아닐 거야.”
루스벨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랍에서 서류 몇 장을 꺼냈다.
“자네가 대숙청에 관해 쓴 보고서는 잘 읽었어. 자세한 규모는 여전히 파악 중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내부 혼란이 막심한 것 같군.”
“그렇습니다.”
사실 난 지금 재익이가 스페인에서, 그것도 하필 다른 곳도 아니고 “그 도시”에서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에 속이 타들어 갔지만, 최대한 엄숙하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다만 리히가 나에게 보내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면 생각보다 표정 관리를 잘 못 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스탈린의 실책도 있지만, 리 제독 자네가 그토록 오랫동안 만주국을 지원해온 것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것 같군.”
“절대 그렇게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소련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데 기여했으니, 자네와 PCDA가 순수한 공산주의자라는 모함은 피할 수 있겠군.”
그 대신 진영 불문하고 그저 피와 돈에 굶주린 무기상이라는 소리를 듣겠지만, 뭐, 공산주의자 소리 듣는 것보다는 낫긴 하네.
“슬슬 러시아 관련해서 세워놓은 계획의 실행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겠어.”
“···잘 못 들었습니다?”
“내가 전에 샌디에이고를 방문했을 때···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와도 만난 거 기억하나.”
쓸데없이 헬창근육 vs 실전압축근육 대결하신 것도 기억하지, 암.
“그때 내가 정확히 그와 무슨 논의를 했는지 혹시 얘기한 적 있나?”
그리고 루스벨트의 입에선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른, 경악스러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재익아.
너 진짜로 살아 돌아와야 한다···
*****
스페인, 게르니카
“하···”
록히드 에어크래프트 컴퍼니의 엔지니어 (이자 동시에 니콜라이 2세의 사위) 제이크 리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유럽에 가족과 함께 조금 늦은 신혼여행을 온 그는 PCDA와 관련된 업무 때문에 아내와 딸 둘을 먼저 캘리포니아로 돌려보냈다.
…아니. 이젠 세 명이었을 것이다.
“위버멘쉬 타령을 했던 내가 미친놈이지···”
유럽으로 떠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얼굴이 새빨개진 아버지가 말리는데도) 제이크와 제이슨 둘 다 대백색함대 중에 만들었다는 정말 낯부끄러운 소리를 했다.
제이크는 아버지처럼 이런 망언을 못 들은 척했으나, 애석하게도 러시아의 전 황녀이자 여전히 현역 여배우인 아나스타샤는 매우 귀 기울여 듣고 말았다.
언니 중 하나가 수도원에 들어가 버렸으니, 그녀의 몫만큼 더 힘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걸까.
“이럴 때가 아니지.”
민망한 생각을 떨쳐낸 제이크는 게르니카 시에 있는 대규모 무기공장에서 자신에게 건네준 서류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PPS 기관단총, 대공포, 그리고 나이트스토커 복엽기 등, PCDA 계열사들은 만주국을 통해서 스페인 공화파에 각종 무기를 지원했었다.
하지만 소련이 만주국에 선전포고하면서 그 경로가 막혔기에 새로운 경로가 필요했고, 마침 유럽에 있었던 제이크는 그 경로를 뚫는 작업에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슬슬 저 공장부터 생산에 들어가면 되려나.”
긴 실랑이 끝에 새 수출경로를 개척했으니,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면 그에게 떨어지는 커미션만 해도 두둑할 터. 마침 둘째도 들어설 테니, 집을 더 큰 곳으로 이사하는 것도 좋을 듯 했다.
뎅, 뎅, 뎅
싱글벙글 웃으면서 도시를 떠나려던 제이크의 귀에 불길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스페인어를 잘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 주민들이 웅성거리는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는 있었다.
“아이고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무슨 일 났나.”
재난에 대해서는 미국 최고 전문가 중 하나인 아버지가 강조한 점이 하나 있었다. 만약 현지인들이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면 긴장하는 게 좋고, 그들이 도망치면 따라서 튀라고.
우우우웅
그리고 곧이어 종소리보다 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
그 순간 제이크의 온 신경이 곤두서고 주변의 시간이 늦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전쟁 당시, 독일군의 에이스 파일럿 오스발트 뵐케와 마주쳤을 때 아버지가 이런 기분이 들었다고 설명했던 게 떠올랐다.
제이크가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 그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저 하늘에서 최소 20대의 폭격기를 포함한, 약 30대의 독일 비행기가 도시에 스산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비행했다.
본능이 그를 움직였다.
“모두 피해!!!”
제이크가 다급하게 외치며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한 지 몇 분 뒤.
폭격기가 투하한 폭탄에서 일어난 거대한 불길이 게르니카의 건물과 인간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