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444)
매국노의 원수 자식-444화(444/773)
444_제 2차 대전의 서막 (3)
1937년 9월
대영제국, 런던
조지 5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는 바람에 조지 6세가 즉위하면서, 1936년의 대영제국엔 한 해에 무려 3명의 왕을 모셨다.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비극의 향연으로부터 약 10개월이 지났건만, 그로 인한 혼란과 후폭풍은 여전히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매캐한 연기처럼 남아 있었다.
여러 종류의 불쾌한 냄새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런던의 공기는, 한 정치인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메이페어 거리의 유명 5성 호텔에도 퍼져나갔다.
“흐음···”
클레리지스 (Claridge’s)의 식당에서 식사하던 중인 윈스턴 처칠은 늙은 불도그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테이블 가장자리엔 얼마 전에 자신이 세간의 관심을 갈구하며 집필하고 출판한 저서 ‘위대한 동시대인 (Great Contemporaries)’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식사를 다 끝낸 처칠은 식탁 중앙에 놓여 있던 크래프트사의 위스콘신 치즈와 크래커가 담겨 있는 접시에 손을 뻗었다.
바스락
“···나쁘지 않군.”
신선한 크래커에 부드러운 치즈를 발라 한 입 베어 물은 처칠은, 그 풍미를 음미하며 마지못해 인정했다.
팩스턴 & 휫필드 (Paxton & Whitfield)의 치즈만큼은 못해도, 세계 최대의 식품 기업 중 하나가 아니랄까봐, 크래프트 치즈의 품질 또한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
처칠이 크래커와 치즈 접시를 즐겁게 다 비우자마자 급격히 평생 앓으며 살았던 우울증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퇴위 직전의 에드워드 8세를 최후의 순간까지 지지하는 바람에 그의 정치적 생명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남은 인생은 그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 (Randolph Henry Spencer-Churchill)의 정치적 유산을 모두 탕진했다는 손가락질을 당하며 초라하게 보낼 수밖에 없을 터.
“인생이란 참.”
나치 독일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전 유럽을 집어삼키기 직전이건만, 정계에서 사실상 물러난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의 무게가 그의 가슴을 짓눌려왔다.
씁쓸한 한숨을 내쉬며 처칠은 치즈 포장지에 적혀 있던 로고로 다시 눈을 돌렸다. 대서양 건너편에 있을, 회사의 주인이 들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는 중얼거렸다.
대전쟁 당시 독일 공군 최악의 천적, 대일 리 소령이 자신에게 의도치 않게 여러 차례 망신을 줬던 걸 처칠은 잊지 않았다.
“최소한 자네는 나와 동의해줘서 고맙긴 하군.”
그러나 황인종이라는 게 많이 걸리긴 하다만, 최소한 미국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그것도 해군 장성이 있다는 건 알게 모르게 다행이었다.
갈리폴리 실패 등 여러 불명예스러운 사건을 일으켰다고는 해도 해군장관 출신으로서, 그가 영국 해군에 전수해주는 항공모함 관련 기술에도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리 제독이 – 본인의 부인이 소유한 – 타임지를 통해 기고한, 나치 독일의 위협을 경고하고 무솔리니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규탄하는 글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같은 미국 여자인데 어찌 저렇게 극과 극인지···”
누구는 리 부인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유능한 여자를 만나 인생이 윤택해졌건만, 왜 에드워드 8세는 그 망할 이혼녀 심프슨 부인 (Wallis Simpson)를 만나서 그런 파국을 일으켰을까.
계산하고 나오는 처칠의 머릿속엔 그 외에도 별별 쓸데없는 생각이 복잡하게 맴돌며 시끄럽게 울려댔다.
“그으으으으으···”
호텔 근처의 어두운 골목에서, 얼굴이 초췌하고 몸이 빼빼 마른 약물 중독자 하나가 빈 약통을 붙들고 벌벌 떨며 신음했다.
쓰레기통 속의 주삿바늘처럼, 어느 정도 인구 밀도가 높은 영국의 도시에서 이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을 처칠은 애써 무시했다.
“문제가 심각하군.”
예전의 청나라와 19세기 말 미국의 차이나타운에서 아편굴이 생겨났듯이, (일본에서는 히로뽕이라고 부르는) 메스암페타민은 영국 전역에서 급격히 퍼져나갔다.
대전쟁 당시 일본이 얼마나 많은 물량을 영국에 (그리고 그만큼은 아니지만 프랑스에도) 뿌렸는지, 정부는 아직도 중독자들을 완전히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중국이라면 모를까, 어째서 일본이 아편 전쟁의 복수를 대신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털썩
아직 처칠의 시야 안에 있던 중독자가 앞으로 고꾸라져 움직임을 완전히 멈춰버렸다.
참으로 안쓰러운 몰골이었으나, 처칠이 보기엔 철저히 중독자들 개별의 선택이었고 동정을 받을 일이라고 보지는 않고 있었다.
“···아.”
정작 그러면서도 본인이 대공황 직전에 월스트리트에서 잃어버린 거액의 투자금을 떠올린 처칠은 속이 쓰라렸다.
*****
워싱턴 D.C.
미합중국 육군참모총장 멀린 크레이그 대장은 40년에 가까운 복무 기간 동안 세상의 풍파와 인간의 광기를 모두 다 맛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대전쟁에서 제3군 참모장을 맡았고, 전임 참모총장이 그 악명 높은 더글러스 맥아더 소장이었는 데다가, 지금 대통령은 정치계의 이단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아니었던가.
하지만···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해군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육군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뽀각
···지금 자신의 앞에서 해군 정보국장 대일 리 소장이 내뱉은 정말 흉악하기 짝이 없는 소리에 크레이그는 닦고 있던 안경의 렌즈를 깨트리고 말았다.
오늘이 금요일이긴 했는데, 13일의 금요일이라도 됐던 걸까.
“아이고, 저런. 괜찮으십니까?”
안경을 착용하지 않아 시야가 흐려진 크레이그의 동공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보통은 일개 소장이, 그것도 육군도 아닌 해군이 자신 보고 이런 식으로 대담한 질타를 가하는 걸 용납할 크레이그가 아니었다.
어디서 감히 타 군종의, 그것도 참모총장이라는 까마득한 상급자에게 간섭하냐며 내쫓고, 당장 해군참모총장 윌리엄 리히 대장을 찾아가 항의했을 것이다.
“난 신경 쓰지 말게. 일단···일단 설명이나 한번 들어보자고.”
애석하게도 하필 바로 그 리히 제독이 크레이그에게 리 제독이 할 말이 있으니 들어봐달라며 특별히 부탁한 것이었다.
명목상으로는 같은 참모총장이었으나, 리히는 실질적으로 해군장관을 겸직하는 데다가 대통령과도 오랜 친분을 자랑하는 사이였는지라 그의 권위가 훨씬 더 높았다.
게다가 대전쟁 발발 불과 몇 개월 전, 당시 전쟁장관 린들리 개리슨에게 경고를 했더니만 그대로 이뤄지지 않았던가.
“우선, 제 결례를 사과드리고자 합니다. 솔직히 참모총장님은 절대로 잘못하고 계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미합중국 육군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지금 전쟁의 양상이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미 육군뿐만이 아니라 지금 전 세계에서 전쟁 준비가 된 나라가, 음, 아마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발언권을 받은 리 제독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곧바로 장황하고 불길한 예언의 연설을 토해냈다.
할힌골 전투 분석을 바탕으로, 그는 기갑전, 포격, 육상 수송, 항공 지원 등, 해군 장성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육군 장교들도 모를 듯한 복합적인 차원의 전투 이론을 펼쳐나갔다.
“···이상입니다. 제가 말한 건 요약한 내용이고 나머지는 전부 보고서에 담겨 있습니다.”
“이게 요약이라고···?!”
분명히 시작했을 때만 해도 오전이었건만, 지금은 서서히 직원들이 퇴근하기 시작하는 걸 본 크레이그는 혀를 내둘렀다.
괜히 루스벨트가 리 제독은 워싱턴의 서류 작성 기계이며, 언젠가 그의 방문을 한 번은 받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게 아니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런, 참모총장님의 귀한 시간 너무 많이 잡아먹은 부분 사과드립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아무런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사실 리의 입에서 나온 것 중에서 상당수는 맥아더와 크레이그 이미 둘 다 어느 정도는 고민해본 내용이었기에.
다만 역시 해군이라서 육군의 자세한 – 주로 의회가 연관된 – 사정은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그걸 감안해서 어느 정도 리의 주장을 거르는 게 좋을 테고, 본인도 납득할 것이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리 제독.”
“어휴,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참모총장님.”
“자네는···대체 왜 이렇게 육상전에 관심이 많은 거지? 친분을 유지하는 육군 장교들도 두 자릿수고 말이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리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이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뭐, 저희 미군이 일본 제국의 개판인 군대도 아닌데, 군종끼리 사이가 좋아서 나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마침 제 첫째 쌍둥이들도 둘 다 육군에 임관했는데 말입니다.”
“그렇긴 하다만.”
“게다가 어차피 해군에게도 해병대도 있고, 규모는 훨씬 작지만 네이비 씰도 있습니다. 괜히 제가 전차랑 중기관총도 개발한 게 아닙니다.”
깜빡깜빡
예상보다 훨씬 더 짧은 설명을 끝낸 리의 얼굴을 크레이그는 뚫어지라 쳐다봤다.
“잠깐만. 그게 다인가···?”
좀 더 거창하고 개인적인 답변을 내심 원했건만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내용을 들은 크레이그의 눈빛엔 실망감이 어려있었다.
“아니 왜, 그러면 설마 제가 원래는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느 놈이 추천서 가로채 가서 할 수 없이 아나폴리스에 입학하는 바람에 아직도 육군에 애증이 남아 있다, 이런 식의 대답이라도 원하신 겁니까?”
수상할 정도로 상세한 방금 그 대답을 캐묻는 대신, 크레이그는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좀 더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내가 자네와 맥아더 장군만큼 친분이 있지는 않지만, 또 뭔가 육군에게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해달라고. 아무래도 할 말이 이게 전부가 아닌 모양이니.”
“알겠습니다, 참모총장님. 오늘 시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뚜벅뚜벅
끼이익
리 제독이 사무실에서 떠나는 걸 확인하는 순간, 크레이그는 안경을 닦던 손수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휴.”
덜컥
그러나 그가 안심할 틈도 주지 않고 문제의 검은 머리 제독이 다시 또 사무실 안으로 침입해왔다.
“으아아아앗?!”
“아 맞다, 깜빡할 뻔했습니다.”
슥슥
리 제독은 품에서 수표책 하나를 꺼냈다. 이제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두꺼운 수표책이었지만 그중 절반 이상이 뜯겨나가 있었다.
부우욱
“안경값입니다. 좋은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매우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는 크레이그에게 대충 휘갈겨 쓴 액수가 적힌 수표를 건네주고는 재빨리 사무실을 나갔다.
수표에 안경 몇십 개는 살 수 있는 금액이 적혀 있는 걸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당장 또한 사무실에서 나왔다.
“···이봐, 리 제독? 어이, 잠깐만!”
이미 리는 건물 안에서 사라졌고 크레이그는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털썩 뒤로 쓰러지듯 앉았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수표를 본 크레이그는, 참모총장 인수인계식에서 맥아더가 마지막으로 전해준 당부를 하나 떠올렸다.
‘명심하라고, 멀린. 만약에 대일 리가 당신을 찾아와서 경고할 때 그의 말을 들으면 절대로 피해를 보는 일은 없을 거야.’
슥, 스윽
곧바로 캐비닛을 열어 자신의 책상 위에 수십 장의 서류를 펼친 크레이그는 두 가지 굳은 결심을 내렸다.
첫째는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의무가 있었기에, 할 수 있는 한 – 정확히는 의회와 예산이 허용해주는 범위 내로 – 기갑전력 확보를 포함해서 전쟁 준비를 할 것.
또 하나, 어떻게 보면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과제는, 자신의 뒤를 이을 참모총장 후보를 미리 물색하기 시작하는 것.
“어디 보자···”
그가 절박하게 뒤지는 육군 장성의 명단에서 워싱턴의 밴쿠버 (Vancouver Barracks)에 복무하는 조지 C. 마셜 준장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재앙신이 경고한 전쟁이 터지기 전에 빨리 이 자리를 떠맡기고 전역해버려야겠어···’
마치 재선을 거부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대공황이라는 폭탄을 무사히 피해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