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448)
매국노의 원수 자식-448화(448/773)
448_제 2차 대전의 서막 (7)
1937년 10월
캘리포니아, 나파
포도 수확 시절이 한창인 나파 밸리에 캘리포니아의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무르익은 포도나무 줄기를 흔들며 상큼한 과일 향을 싣고 불어오는 바람이 여간 신선한 게 아니었고, 언젠가 은퇴하면 아내를 데리고 이곳으로 올까 고민하게 할 지경이었다.
···만, 이렇게 목가적인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풍경을 편하게 즐기기엔 내 머릿속에 번뇌가 너무 많네, 이런 젠장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를 사로잡은 번뇌의 근원지는, 내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저기 유럽 대륙의 방향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계시는군.
“얼마 전에 조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얘기했었지. 마지막 한 번이라도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지 못한 게 너무 후회되는군.”
전 러시아 제국 마지막 황제, 현 (이름뿐이더라도) 만주국 공동 황제이자 캘리포니아 포도 대농장 주인 니콜라이 2세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지를 만나본 적 있나? 글쎄, 사촌이지만 내 쌍둥이인 것처럼 똑같이 생겼단 말일세. 심지어 어느 영국 노인은 나보고 그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고 기절했지 뭔가!”
아니 저기요, 황제 폐하/사돈 어르신, 저 같은 일개 해군 장교가 대영제국의 지도자를 만날 일이 뭐가 있-
-었긴 했구나, 그분이 버킹엄 궁전에 나를 직접 초청해서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도 걸어주셨으니. 젠장할, 나도 슬슬 늙어가나.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은 이완용 이 쉐끼가 분명히 자기 일인데 나한테 떠넘겨버린 폭탄을 처리할 때니까.
“그래서···그분의 서거가 로마노프 씨에게 만주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불어넣었다, 이겁니까.”
“비약이 좀 많이 들어갔긴 했지만, 그렇지.”
어떻게 보면 약간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다.
조지 5세는 그래도 영국 본토에서 사망하고 많은 이들의 추모를 받았지만, 또 다른 그의 사촌인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 (이었던 것)에서 쫓겨나 네덜란드로 망명해 사는 신세 아닌가.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로마노프 씨-아니, 폐하. 냉정하게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 폐하께서 만주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발목만 잡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예상치도 못한 돌직구에 니콜라이 2세는 잠시 얼얼한 듯 내 눈을 쳐다봤다.
“이미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쓰라린 교훈을 배우시지 않으셨습니까.”
“‘제1차···?’”
“그냥 적당히 유능한 관료에게 일 맡기고 뒤로 물러나시는 게 사실상 제일 도움이 되는 게 당신이란 말입니다.”
러시아 제국 당시엔 (그나마, 상대적으로) 표트르 스톨리핀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뭐···인정하고 싶지는 않다만 그 양반이 있으니까.
이미 한참 전에 몰락하긴 했어도 황족이라는 자존심은 여전히 남아있었는지 니콜라이는 나에게 뭐라고 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손등에 핏대가 솟을 정도로 손을 꽉 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곧이어 고개를 떨궜다.
“내가···허튼소리를 했군. 미안하네, 리 백작.”
표정이 침울하게 일그러진 니콜라이는 아무 말 없이 내 빈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줬고, 나는 반사적으로 팔꿈치를 받쳤다.
아까 전만 해도 찬란히 빛나다가, 이제는 푸르른 하늘을 서서히 짙게 물들여가며 지는 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이야···요즘 악몽을 가끔 꾸고 있어. 나와 가족이 볼셰비키에 붙잡혀 예카테린부르크의 집에 갇혀 있던 시절의 악몽을.”
나를 맞이할 때는 밝다 못해 순수하기까지 했던 니콜라이의 표정에 공포와 침울함이 뒤섞인 채로 드러났다.
“볼셰비키들이 우리를 지하로 끌고 갔는데, 이번에는 그 어떤 구조대도 오지 않고 바로 무참히 살해당해버렸다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반복된단 말이지···”
어.
그···원래 역사에서 딱 그렇게 됐으니까요···
깡깡깡
슥슥슥
어느새 붉게 물든 석양 아래서 한 농장 인부가 낫으로 포도 줄기를 베어내고, 다른 한 명은 망치로 말뚝을 박았다.
···거참 꺼림칙하게끔 왜 하필 저기서 저러고 계실까.
“결국 트로츠키 그 녀석 때문에 우리가 모두 다 죽을 뻔했는데. 그가 만주국으로 왔을 때 바로 죽이지 않고 스페인으로 보내버리다니. 리 공작은 너무 정이 많단 말이야.”
캬, 시발.
이완용이 정이 많다는 평가를 듣는 세계라니, 나란 녀석 도대체 세상을 얼마나 비틀어버린 거냐고, 어이.
“그리고 리 백작, 지금 나는···내가 밤마다 보는 그 끔찍한 모습이 만주에서도 일어나는 게 두렵다네. 특히 소련군이 할힌골을 탈환한 걸 생각하면 더더욱.”
“···”
“만약 내가 그 참극을 막지 못한다면, 적어도 이번에는 그들 곁에서 같이 죽고 싶단 말일세.”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갔다만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중요하지도 않으니까.
확실히 만약 니콜라이가 만주로 돌아간다면, 다른 걸 몰라도 여전히 러시아 백군 출신 비율이 높은 만주군의 사기를 급격히 올릴 수는 있겠지.
“폐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여전히 여기 계시는 게 가장 도움 되는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건 아마 제 아버지도 동의하실 겁니다.”
하지만···그건 소련군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최근에야 극동군이 한 번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계속 기적적으로 만주군이 잘 막아왔는데 이 타이밍에 러시아의 차르가 돌아온다?
스탈린 그 새끼가 신이 나서 만주 쪽으로 큰절 올리고 당장 선전부랑 NKVD 풀가동 들어가고, 극동군 전투력이 상승할 거다.
“그렇단 말이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볼셰비키가 영원히 활개 치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볼셰비키의 권세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나.”
계속 돌직구만 던져서 이번에는 좀 그를 위로해주려는 나에게 니콜라이가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물론 이번에도 없는 말을 지어낼 생각은 전혀 없었고.
“음, 폐하는 볼셰비키가 몰락하는 모습을 살아 계신 동안에는 못 볼 겁니다···”
“···”
내가 소련 측 역사를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간에 소련은 스탈린 사후에도 40년 가까이 버텼지.
원래는 말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아나스타샤 황녀님을 포함해서 당신의 자녀들은 반드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약속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떨림이 있는 니콜라이의 손을 꼭 붙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했다. 아마 워싱턴이나 볼티모어 밖에서 이렇게 단호한 발언을 한 건 몇십 년 만일 거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약속이 아니야.”
그러나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는 이걸로는 모자랐던 모양인지, 오히려 내 손을 더 힘차게 붙잡고 잡아당겼다.
“부디 예언해주지 않겠나. 볼셰비키의 파멸을!”
그 순간 그의 눈에선 마치 죽은 자식을 살려달라고 신에게 부탁하는 신도의 절박함에 가까운 감정이 느껴졌다.
신도 아니고 그저 일개 인간이었건만, 나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정확히는 내가 몇 년간 설계하는 계획이 실현될 거라고 선언했다.
“앞으로 15년 안에 소련은 붕괴할 거라고 예언하겠습니다.”
“···고맙네. 어쨌든, 자네 말은 잘 알겠어. 여기서 계속 남아있을 거고, 내가 생산하는 물건이나 보내주겠네.”
“현명한 판단입니다, 폐하.”
그제야 니콜라이의 얼굴에는 빛과 혈색이 돌아왔고, 우리 둘은 손도 붙잡은 김에 악수를 나눴다.
아니, 정확히는 나누려고 했다.
꽈아아아악
“그허어어엌?!”
니콜라이가 바이스처럼 강철같은 악력으로 내 손을 움켜줬다. 얼마나 강력했는지 순간적으로 무릎에서 힘이 잠깐 빠질 정도였다.
“어때, 이 정도면 악력이면 루스벨트 씨보다 더 뛰어나지 않나?”
“갑자기 그건 또 뭔 소리입니까?!”
“예전에 샌디에이고에서 그와 만나서 악수를 했었지. 상체가 정말 아름다울 정도로 훌륭한 건 인정하지만, 이 몸과 같은 실전 근육과는 달리 그는 근육이라는 것 또한 인정하겠지?”
니키야.
니키야, 제발 좀!
*****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
“손바닥은 왜 그런가?”
“로마노프 씨가 힘자랑 좀 하셨죠.”
“그분이 나이에 비해서 몸이 좋긴 하지. 정신 연령은 조금 어린 것 같기도 하지만.”
기왕 캘리포니아까지 온 김에 오래간만에 RR에서 비공식 태평양상거래개발조합 최고재무담당자, 아마데오 지아니니와 만났다.
이쯤 되면 지아니니는 미국 전역은 몰라도 최소한 캘리포니아에서는 가장 큰 은행가 탑 5안에 들어걸 거다, 아마.
“여하튼 그분의 모습은 정말 적응 안 되긴 하네요. 뭐랄까, 마치 깜찍한 토끼 귀 모자를 쓴 이오시프 스탈린을 보는 기분?”
“···묻지도, 원하지도 않은 기묘한 이미지를 굳이 내 머릿속에 심어줘서 고맙군.”
조르르
“···임페리얼?”
“음? 아직 들어보지 못했나 보군, PCDA의 신상품 중 하나야.”
“이건 또 무슨 술이죠?”
“로마노프 씨가 직접 재배한 포도를 사용하는 고급 주류 브랜드지. 생각보다 수요가 엄청나더라고.”
다 좋은데 뭔가 술이 위스키 이름에 붙여야 할 것 같으면 기분 탓일까.
그러고 보니 요샌 PCDA에서 만드는 물건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트래킹 하기도 어려운 지경이네. 내가 아마 해군 제독이 아니라 풀타임 사업가라도 쉽지 않을 거다.
‘라 초이 (La Choy)? 일한아 이건 또 뭐지, 뭔가 이름이 많이 익숙한데?’
‘아, 크래프트와는 또 다른 독립된 식품 브랜드입니다. 숙주나물부터 시작해서 곡류와 채소도 취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꽤 오래전에 시작했는데 말이죠.’
‘그렇군.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헷갈리네, 헤헤헤···’
일한이와 했던 통화를 떠올리니, (의사 아니랄까 봐) 서재필이 나에게 따끔하게 날렸던 경고 또한 생각나고 말았다.
“푸흡!”
아무리 PCDA 주력상품에 코카콜라, 스니커즈, 그리고 스팸 같은 물건이 많다고 해도 맨날 달고 기름진 것만 자꾸 먹으면 사람이 훅 가는 수가 있다고.
“또 뭐지?”
“아, 별건 아니고요.”
이 시대에도 일단 다른 건 몰라도 당뇨병에 대해선 어느 정도 연구가 된 모양이군···
“전에는 내가 너무 무리하게 투자하면 기겁해서 당장 전화하더니만, 요샌 연락이 좀 뜸해졌더군요?”
“그거야 투자하라는 대로만 하면 최소 몇 배, 최대 수십 배의 이윤이 창출되는 걸 몇십 년간 증명했으니 걱정할 게 뭐 있겠나. 유 사장도 알아서 경영 잘 하고 있는데.”
이젠 굳이 나한테 물어볼 일 없이 어지간하면 그냥 유일한 선에서 다 해결된다 이거군. 아아, PCDA의 미래는 밝도다!
“난 아직도 네가 텍사스에서 발견한 막대한 유전을 차지하지 않고 그냥 일부 권리만 챙기고 넘겨버린 게 신기해.”
“석유 매장량이 어마어마하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아깝긴 하죠?”
”아니, 오히려 그걸로 인해 난 너를 더 신용하게 되었거든.“
“잉? 갑자기 왜요?”
“리. 난 네가 정말 철강, 철로, 그리고 석유 이 부문은 쳐다보지도 않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3대가 개신교인 백인도 만약 그 부분을 건드렸으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걸.”
뭐, 그건 그렇지.
아무리 나와 PCDA의 체급이 매년마다 급격히 높아진다고 해도 록펠러나 카네기, 그리고 그 정도 체급의 가문과 기업에는 쓸데없이 다툴 이유도 필요도 없다.
헨리 포드와도 그냥 서로 갈 길 가자고 헤어지기만 했을 뿐이다. IBM은 PCDA와 계속 거래를 하는 중에도 계속 나치 협력하는 개 짓거리를 해서 완전히 싹을 끊어버렸지만.
“그래도 만약 지금 자네가 이뤄낸 걸 보니, 황인종만 아니었으면 그들과도 맞먹는 괴물이 되었을지도 몰라. 그 외에도 정말 만사가 쉬워졌겠지.”
“내가 어떻게 그들의 경지까지 도달하겠어요.”
무엇보다도 난 그 양반들처럼 – 여러 가지 의미로 – 독해질 수가 없어요···
“아 맞다. 나중에 유 사장도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말한 그···전쟁 대비 사업에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고 하니까.”
“그거야 당연하죠.”
덜컥!
하지만 술집 직원 중 하나가 전보를 들고 긴급히 VIP룸 안으로 들이닥쳤다.
“대일 리! 대일 리 제독님 계십니까?!”
“어이쿠, 여깁니다만. 무슨 일인가요?”
턱
내가 받은 전보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고 지아니니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난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
“아, 이런 젠장할···”
워싱턴의 어느 높으신 분께서 나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볼티모어에 도착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보자는 내용이었다.
아.
왜 하필 많고 많은 정치인 중에서 이 무지막지한 양반의 관심을 끌어버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