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476)
매국노의 원수 자식-476화(476/773)
476_모래탑과 면도날 (3)
1938년 3월
대영제국, 런던
“하 씨, 뭐 이리 일이 많아.”
영국에 싸 들고 온 서류, 여기서 처리한 서류, 그리고 이제 미국 본토로 들고 가야 하는 서류를 모두 정리하다 보니 무시할 수 없는 분량이 나와서 나를 압박했다.
“이쯤 되면 서류는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제독님.”
로열 E. 잉거솔 대령이 내 옆에서 서류를 날짜와 주제별로 깔끔하게 정리해주면서 시시한 농담을 던졌다.
“시끄러워. 매일매일 봐도 기분 좋은 건 아내 얼굴뿐이라고.”
“···하이고 해군 최고의 애처가 납셨어, 그래.”
“낄낄낄.”
기가 찬다는 듯이 웃는 로열과 함께 서류 정리를 대강 끝내니, 임시 사무실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 한 권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만약 역사가 변경되었다면 (If It Had Happened Otherwise)’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윈스턴 처칠이 집필한 “대체역사소설” (에세이 모음집에 더 가깝긴 하다만)인데 저걸 어떻게 참냐고.
스륵
“만약 남북전쟁 당시 로버트 E. 리 장군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이 서류 대부분은 네가 직접 가지고 가는 것보다는 내가 롤스로이스랑 함께 미국으로 보낼-잠깐만, 뭐라고?”
한마디로 요약하면 남부가 독립하는 데 성공하고, 대영제국이 북부와 남부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새로운 영미동맹을 이루고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는다는 결론이군.
캬, 그거참 골 때리는 발상이네.
“이 양반 아주 그냥 공상과학 소설 써도 잘 쓰겠어.”
“그래서 이미 썼을걸.”
“뭐, 진짜?”
“여기. 아 그리고 그거 나한테 줘봐.”
내가 로열에게 “대체역사소설”을 건네주자 그 또한 나에게 ‘사브롤라 (Savrola)’라는 이름의 책을 줬고, 난 바로 책 뒤의 소개문을 살펴봤다.
어디 보자, 이번 작품은 로라니아라는 가상의 국가 출신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군.
심지어 주인공은 삶이 불만족스럽게 느껴지고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우울증을 겪고 있는 명문가 출신의 젊은이고.
딱 처칠 본인 얘기가 맞는구나.
“그거 아냐, 대일아.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처칠 이 인간은 결국 군대를 향한 관심과 애착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 같아. 그래서 우릴 계속 초대했을지도 모르고.”
“하긴. 영국과 프랑스의 장성들과는 많이 만나봤을 것 같지만 미군은 그럴 기회가 의외로 흔치 않겠지.”
“그리고 이 시국에 독일 장성과 만나는 건 좀 껄끄럽긴 하겠고 말이야.”
“독일군이라···”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의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무적이었다가 본토에서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는지라 장교와 사병 가리지 않고 패전의 쓰라림이 더더욱 컸을 것 같긴 하네.
이러니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내부의 불안요소에 경각심이 강했고, 현 나치 정권의 반대자는 정권 차원은 물론이고 정권의 모든 지지자에게 ‘조국의 반역자’로 찍혀 탄압당할 거고.
설령 그 붉은 남작이 진짜로 양심과 상식 모두를 갖춘, 독일 소수의 상식인 중 하나라고 해도 이런 환경에서 무슨 저항이나 할 수 있겠냐고.
“그래도 최소한 독일의 해군은 잠수함 말고는 크게 위협적인 요소는 없다는 건 다행인 것 같아.”
“어차피 ‘독일군’에서 제일 무서운 건 비행기랑 전차일 테니까.”
“음···”
턱
여러모로 표정이 불편해 보이는 로열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거 아냐, 로열? 언젠가 온 영국과 유럽이 너한테 어느 정도 의존해야 할 때가 올 거다.”
“대일아 너 설마 그것도 예언-아니, 아니야, 대답하지 마앗!”
얼굴이 사색이 된 로열은 절박하게 손을 내둘렀다. 짜슥, 이제 내 패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이네, 기특하게도 참.
“아 맞다, 깜빡할 뻔했군.”
슥슥
촤아악
내가 로열에게 수표 한 장을 건네주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대일아?!”
“여기서 내가 몇 개월간 머무르는 동안 나 따라다니면서 도와준다고 고생 많았잖아.”
“그렇긴 한데 이거 액수가-”
“에헤이 씁, 넣어둬, 넣어둬, 제독의 명령이야.”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 채로 당장 나에게 수표를 돌려주려던 로열은, 내가 계급을 들먹이며 (그리고 압도적인 힘으로) 그의 주머니에 쑤셔 넣자 뭐라 할 수 없었다.
“뭐···대일이 너랑 여기서 같이 다니는데 재밌긴 했어.”
“난 참모총장님이 불러서 돌아가는데, 넌 여기서 업무가 좀 더 남은 모양이지?”
“대충.”
“그래, 고생해라. 네가 미국으로 돌아올 때까진 추가적인 부탁은 안 할 테니까.”
“고맙다···?”
그렇게 영국 유일의 국제공항, 크로이던 공항 (Croydon Airport)에서 헤어지기 전, 로열은 나에게 안전비행 기원과 동시에 정말 오묘한 농담을 날렸다.
“언젠가 내가 너를 부려먹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응, 안 와.
*****
몇 주 전
중화민국, 난징
덜그럭
“후···”
볼일을 보기 위해 잠시 부대에서 떨어진, 만주군 특별파견부대의 양경종(楊景鍾) 이병은 습기와 열기로 가득 찬 군모를 잠시 벗어서 손에 들었다.
여전히 피와 화약을 희미하게 머금은 난징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머리에선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시력이 엄청 좋은 저격수들은 이걸로도 날 맞출 수 있으려나···’
만일을 대비해서 적당히 군모의 내부를 닦고는 다시 군모를 착용하기 전, 양경종은 폭력의 흔적이 현재진행형으로 새겨지고 있는 난징을 둘러봤다.
“거참.”
소비에트 연방과 일본 제국의 침략을 마주한 만주국의 청년이었던 그는 만주군의 징병을 피할 방법도, 딱히 그럴 의지조차도 없었다.
툭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부대로 복귀하는 양경종의 발치에 손가락 여러 개가 잘려나간 일본군 시체가 닿았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이런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랐었겠지만, 그새 벌써 수차례의 전투로 무덤덤해진 양경종은 시체가 평범한 돌이라도 된 듯 무덤덤하게 지나쳤다.
“왜 다들 여기까지 와서 이 난리람···”
이런 질문을 하는 자들이 만주군에는 자신 외에도 한두 명이 아니었으며, 그리고 일본군 내부에도 없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한 편 특별파견부대의 사령관,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중장은 지극히 무모한 일본군의 행태에 대해 독특하기 짝이 없는 해석을 제시했다.
‘잽스 놈들은 말이지, 한없이 탐욕적이고 폭력적으로 보이긴 해도 의외로 문화와 정서가 지들 나름대로 부처님의 말씀의 사로잡혀 있는 족속이야.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러일전쟁 당시 남산과 뤼순 항구에서 일본군을 마치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냥하고 다녔다는 운게른 장군은 일본인들에 대한 의외의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인과의 수레바퀴가 목적도 없이, 그리고 영원히 굴러간다는 불교적 교리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보면 그 회전에 몸을 맡기고 변화의 길 위에 누워 있다 이거지. 무의 바다에서 한순간에 존재했다. 한순간에 사라지는 물거품처럼.
누구나 사후에 부처와 같은 축복받은 존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믿겠지.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며 구원은 오로지 자기부정에 있다고 믿는 자들도 많겠고, 그래서 국가를 위한 맹목적인 자기희생을 자신과 타인에게 쉽사리 강요하는 법일 터.’
···다만 그게 진짜로 일본과 일본군을 향한 심도 있는 탐구와 분석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운게른이 본인의 불교적 세계관에 억지로 끼워 맞춰서 해석하려는 시도였을까.
아직 18살밖에 되지 않은 양경종에게는 너무나도 심오한 문제였으며, 굳이 골을 썩일 가치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새 전투지역에서 싸는 똥은 시원했나?”
부대로 복귀하자마자 얼굴에 피와 먼지가 잔뜩 묻은 운게른 장군이 한 손에 군도를 꺼내든 상태로 양경종을 맞이했다.
“시원했습니다. 아마도.”
“굳이 그걸 또 답하다니, 거참.”
혀를 끌끌 차는 운게른의 허리춤에는 이미 손가락이나 얼굴 가죽 등 여러 가지 ‘전리품’이 섬뜩하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완용 총리의 명령···까지는 절대 아니고 특별한 권유가 있었다는 건 만주군 파병부대의 인원들은 잘 알았다.
‘일본군이 중국인들에게 저지른 것만큼 그들에게 갚아주게나.’
그리고 난징에 도착하니 일본군은 군인과 민간인 가리지 않고 참으로 많이도 저질렀고, 포로로 잡은 일본군은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보였다.
다만 정작 비공식적인 허가를 받았음에도 만주군 중에서 일본군을 향한 무자비한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은 의외로 찾기 힘들었다.
‘조금만 더 본능에 몸을 맡겨도 될 텐데 말이지, 쩝.’
마치 다들 소련군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취급해주는데 너무 익숙해져 버리기라도 했는지.
운게른에게는 애석하게도 만주군 총사령관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 또한 만약 병사들이 직접 나서지 않을 시 절대로 학살을 권유하지 말라는 공문까지 보내왔다.
물론 투하쳅스키 또한 딱히 잔혹 행위를 금지하는 건 아니었기에 운게른은 열심히 사냥을 이어나갔으며, 정말 참신한 우회법을 하나 찾아내고 말았다.
“어후, 세상에.”
양경종은 부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백 명의 중국인에게 둘러싸인 두 개의 핏덩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일본어를 할 줄 알던 어느 중국인 생존자에 의하면 저놈들이 세상에, 저 다음엔 150명 참수 경쟁까지 하려고 했지 뭐야.’
100인 참수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수백 명의 포로와 민간인들을 살해한 일본 육군의 노다 츠요시 소위와 무카이 토시아키 소위가 말뚝에 처참한 모습으로 말뚝에 묶여 있었다.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저놈들을 사지를 찢어 죽이고 목은 잘라다가 경관을 쌓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단죄를 해야 할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그리고 운게른은 일본군의 만행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피해자들의 유족인 중국인들을 약 200명 정도를 모은 뒤 그들에게 녹슨 칼을 여러 개 나눠줬다.
‘죽음을 떳떳하게 인정하는 태도는 일본인에게 재앙과 환난을 강인하게 마주할 힘과 마지막일 수 있는 매 순간을 깊이 고찰할 수 있는 안목을 주는 법이지.
그 어떤 위대한 영웅이나 철학자도 결국 벌레의 밥이 되며, 하늘의 별조차도 무에서 왔다가 무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직 변화한다는 그 사실만이 진리이며, 지금 저들도 완전히 변하지 않았나!’
며칠이 지난 후, 두 학살자는 얼굴이 진작에 도려져 나갔고, 내장과 뼈가 모두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태로 여전히 칼질을 당했다.
‘핍박받은 자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다니, 이 어찌 자비로운가. 내가 바로 정녕 현세에 강림한 제석천이란 말일세, 크하하하!!!’
일관성이 없는 정신나간 운게른의 논리에 반박하고 싶은 자들은 많았다만, 구태여 입을 여는 자들은 없었다.
일본에서 아끼는 물고기인 잉어는 물결을 거슬러 오르고 얕은 폭포에서는 뛰쳐 오르기도 하건만, 잡혀서 도마 위에 오르면 조용히 누운 채로 차분히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반면 양경종이 듣기엔 저 장교들은 처음에는 저항하고, 그다음엔 포로를 이렇게 대우해도 되는 거냐며 항의하다가, 마지막에는 아마 집에 있는 가족의 이름을 울부짖었던 모양이다.
물고기만도 못하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안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게 누가 굳이 그런 짓까지 하랬나.”
두 장교에게 일어난 꼴을 보며 기겁한 일본군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누구도 그런 명령 따윈 내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물론 그걸 중국인들에게 제대로 설득하는 건 그들의 몫이었겠지만.
“에휴.”
나무에 기대어 앉은 양경종은 일본군들의 시체에서 시선을 돌리고, 명령 받은 데로 자신의 총기를 손질하는 데만 집중했다.
아직도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