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491)
매국노의 원수 자식-491화(491/773)
491_마지막 신경전 (7)
1938년 11월
독일국, 오버잘츠베르크
아직 12월 25일이 되려면 조금 멀었지만, 유럽과 미국의 일부 지역에선 벌써 크리스마스 준비에 들어가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아름다울 정도로 새하얀 눈이 포근하고 정갈하게 쌓인, 알프스산맥 밑에 있는 호화로운 베르크호프 관저는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기라도 했다.
스륵
흥겹게 휘파람을 부는 쥐가 증기선을 조종하며 강을 타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시청한 아돌프 히틀러는, 부드러운 가운을 입은 채로 소파에 앉아 타임지를 펼쳐봤다.
슥, 스륵
무덤덤하게 페이지를 넘기던 히틀러는 에브로강 유역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독일군 병력에 대해 다루는 칼럼에서 잠시 멈추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빨리도 움직여줘서 고맙군, 그래.”
만일을 대비해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베니토 무솔리니 그 둘 중 누구도 모르는 틈에, 이런 식으로 급습을 할 준비를 해놓으라고 지시한 건 지금 보니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 덕분에 결국 프랑코가 뒤늦게나마 광산채굴권을 포함해 여러 권한을 넘겨줄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은혜를 모를 줄 아는 자에게는 가진 것도 빼앗아 보이는 실력행사를 해줘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배은망덕한 자들이 이 나라 안팎에 너무 많단 말이지.”
괴벨스를 포함한 여러 나치당원, 아니, 국가적인 단위에서 히틀러는 아리아인의 우수함과 강인함을 그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찬양하며 호소해왔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우수한 아리아인들의 덕목에는 감사함이라는 건 포함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이가 없군.”
독일 무역은 전 세계 곳곳에서 흑자를 내며 경제는 대호황을 누리고 있는 데다가 영토도 대다수 수복했다. 이쯤 되면 독일의 영광을 완벽히 되찾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가.
그러나 독일인들은 정작 주데텐란트 양여 때도 그렇고, 타국의 영토와 주민을 흡수하는 데 점차 소극적으로 변하는 한편,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기색을 보이는 자들은 서서히 늘어났다.
그걸 떠올리는 순간, 히틀러의 입에선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독일인들에 대해 한 적 없는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열등해. 한없이 열등하다고.”
자신이 내뱉은 험악한 소리에 그는 잠시 흠칫했으나 얼마 가지 않았고, 며칠 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제자인 스위스인 심리학자, 칼 융 (Carl Gustav Jung)의 평론을 떠올렸다.
‘독일인의 영혼 깊숙이에는 민족 특유의 열등감이 강렬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습적으로 유럽 국가들의 축제에 늦게 참석하는 자의 열등감이 말입니다.
여기서 히틀러는 튜턴족의 신화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원시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법을 알았기에 그렇게 성공한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열등감 부분에 대한 건 확실히 동의할 수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열등감과 열등함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지만, 그는 굳이 그걸 따지고 싶진 않았다.
몇 주 전, 히틀러는 그는 (지금은 스페인에 파병된) 제3 기계화 사단에게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으로 가는 길에 열병식도 할 겸 베를린을 통과하도록 특별히 지시했다.
허나 히틀러가 기대를 품고 총리 관저 밖에서 기다렸건만, 열병식에 모인 시민들은 100명을 조금 넘겼을 뿐이었다.
그 당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씩씩거리며 다시 관저로 들어간 그의 가슴 속엔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 넘쳐 올랐다.
“다들 공허한 껍데기들뿐이야···”
어느 순간부터 유럽이라는 도박판 위에서 히틀러가 어떤 성공이나 승리를 거두든, 독일 국민이 예전처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찬양과 갈채를 보내는 모습을 보긴 어려웠다.
독일 군민의 마음속이 비어 있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닫긴 했지만, 이젠 상관없다. 그들에게 열정이 있든 없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뿐이니.
이젠 그들을 같은 동포이자 국민이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도박에 쓰일 수천 개의 칩으로 보는 게 마음에 편할 것 같았다.
따르릉
비장한 각오를 하고 이걸 어떻게 실현해야 하나 고민하는 히틀러의 귀에 갑자기 긴급한 전화가 들려왔다.
딸칵
그리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내용을 들은 히틀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지금 독일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
일본제국, 도쿄
촤르르
해군 육전대와 헌병의 철통같은 호위가 붙은, 해군 차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중장의 신규 관저에선 종이와 종이가 부딪치는 시원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한참 동안 능숙한 손놀림으로 트럼프 카드를 섞은 야마모토는 자신의 탁자 위에 규칙 있게 배치를 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서양의 카드 및 보드게임에 익숙했던 야마모토는 이번에 할 게임으로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카드게임인 솔리테어 (solitaire)를 골랐다.
“주말엔 사람 좀 불러서 우노(Uno)도 한 번 해볼까나.”
이 신종 게임 또한 아메리칸미디어컴퍼니의 상품이라곤 하지만, 야마모토는 이 게임을 리 다이이치 제독 본인이 개발했다는 사실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물론 그가 최근에 항공함대의 사령관에 임명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자신과 같은 중장으로 진급했다는 사실만큼은 아니지만.
“뭔가 착실하게 준비를 해나가고 있군 그래, 리 제독.”
야마모토가 그토록 좋아하는 카드게임에 아무리 몰두하려고 해도, 리 제독을 떠올리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불편한 소식 하나가 나뭇잎 위의 벌레처럼 그의 신경을 긁어먹어 갔다.
정확히는 얼마 전, 일본 해군 연합함대 (連合艦隊)의 총사령관, 요시다 젠고 (吉田 善吾) 중장이 그에게 전했던 말이.
‘그거 알고 있나, 야마모토? 차기 연합함대 총사령관에 자네가 임명될지도 몰라.’
‘아니, 그게 정말인가? 나를?!’
여전히 전함파의 입김이 강했던 해군이었는지라, 야마모토는 해군 내에서 제일 항공모함과 해군 항공에 열정적인 자신이 그런 직책을 맡을 거라곤 쉽사리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리 다이이치 밑에 제자로 들어가기라도 했냐며 놀림 받을 정도까진 절대 아니었지만.
하지만 부담스럽긴 해도 형용할 수 없는 기대로 가득 차오른 야마모토는, 이어서 요시다가 한 말을 듣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자네 말은···만약 내가 연합함대의 사령관이 된다면 내 능력이 아니라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일 거라고···?’
‘그렇지, 정확히는 강경파의 암살 위협에서부터 자네를 막으려는 조치 차원에서 말이야. 마침 이미 실제로 암살 시도당한 적도 있으니까.’
‘···’
‘아 글쎄, 누가 자네 목에다 칼 대고 소신 발언하라며 협박이라도 했나?’
···자신에게 그렇게 한 사람은 없다만, 확실히 지금 일본엔 자꾸 관료들과 군인들의 목에 칼 (그리고 총기와 폭탄)을 대는 놈들이 급격히 늘어나긴 했다.
그런 자들의 만행과 압박으로 인해, 이시와라 간지 그놈이 말했듯이 언젠가는 전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묵시록적인 대전쟁이 일어나게 생겼지만.
“나라 꼴 잘 돌아간다, 진짜.”
탁
손에 든 카드를 내려놓은 야마모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리 다이이치에게 부탁해서 그를 통해 미국에 투항하면 받아줄까, 잠시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기에 머릿속에서 잡념을 지워버렸다.
지금 육군이 만주국과 중화민국의 영토에서 빨리 철수하지 않는 경우, 높은 확률로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테고, 미군과의 격돌은 육군보다는 해군의 몫일 터.
“···”
상상만 해도 끔찍한 미래에 야마모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물론 전통적인, 개별적 장교와 함선 단위에서의 해군 역량은 일본이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몇 년, 아니, 몇 개월 안에 못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었는 데다가, 미국의 진정한 힘은 그 막대하고 풍요로운 땅과 무시무시한 산업력이었으니.
“뭐, 긍정적으로 생각해봐야지.”
폭주하는 자신의 망상을 억제하기 위해 야마모토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해군 전체에 있어서 최악의 사태만은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그와 마주칠 일은 없겠지.”
일단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지금 항공함대는 현시점 기준으로는 대서양으로 향할 확률이 높아 보였으니까.
···설마 리 다이이치가 지휘하는 함대와 태평양에서 마주칠 일이 생기겠나.
****
며칠 전
독일국, 베를린
약 120년 전쯤에 설립된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중 하나, 카페 스테헬리 (Café Stehely)에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두 남녀 중 한 쌍이 만났다.
“무슨 생각이 또 그렇게 많으세요?”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소장은, 한때 자신의 부하였고 지금은 상관인 항공장관 헤르만 괴링에게 선물할 열차모형세트 카탈로그에 박혀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 뭐 별건 아니고 슬슬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흐음∼
건너편에 착석한 레니 리펜슈탈이 장난스러운 말을 던졌으나, 리히트호펜은 다시 카탈로그로 시선을 돌렸다.
괴링 외에 대일 리 중장에게는 선물을 뭘 챙겨줘야 할지, 고민 또한 그의 머릿속을 한없이 복잡하게 만들었다.
편지와 전보 모두 무시했던 리였기에, 그동안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매년 보냈던 선물이 볼티모어에 제대로 도착이나 했는지, 그리고 그걸 받아주기나 했을지 고민한 적 없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마음과 경의니까.’
나름 머릿속에서 멋있는 생각을 했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리히트호펜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리펜슈탈은 머리칼을 그녀의 귀 뒤로 넘겼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중요하지만···누구와 같이 보낼지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만남이라.”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그 순간 붉은 남작의 머릿속에선 런던에서 몇십 년 만에 대일 리와 재회했던 게 떠올랐다.
전체적으로 희망했던 것과는 달리 밝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은 만남이었으나, 특히 마지막에 했던 말은 그의 뇌리에 단단히 박혔다.
‘독일인은···독일인들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겁니다.’
‘그래, 잘해봐.’
그 와중에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자신은 없다는 걸 깨달은 리펜슈탈은 토라졌는지 입술을 내밀었다.
“아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 내일 미국으로 출발하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딸랑
쾅!
싸늘하기 짝이 없었던 리의 눈빛과 말투를 계속 생각하는 리히트호펜과, 그에게 뭔가 제안을 하려던 리펜슈탈 모두 갑작스러운 소음에 화들짝 놀랐다.
“아씨, 시끄럽게 저게 뭐람.”
“미국인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문 근처의 고객들은 다급히 전보 한 통을 들고 오는 자의 무례함에 인상을 찌푸렸으나, 남작과 감독 둘 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깔끔한 제복을 차려입은 그 남자가 정보국의 요원이라는 걸 알아차리거나 최소한 상황을 눈치를 챘기에.
“장군님.”
“그래, 알겠어.”
리히트호펜에게 전보를 건네준 그는 재빨리 다시 카페 밖으로 나왔다.
“뭔가 군에서 일이라도 생겼나 보군요?”
“···가봐야겠어요. 커피값은 제가 내가 갈게요.”
“네? 잠깐만요-”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자신의 하숙방으로 향한 리히트호펜은 서신과 전보 더미를 뒤지다가 제일 최신에 도착한 편지를 찾았다.
그리고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는 생일날 원하던 장난감을 받은 아이라도 된 것처럼 눈에 초롱초롱한 생기가 들어왔다.
“오오오, 좋았어!”
대일 리가 거의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에게 연락을 청해왔다. 그것도 무려 부탁을 들어 달라면서!
크리스마스가 일찍 오기라도 한 듯 신이 나 흥얼거리던 리히트호펜은 부탁의 내용을 읽고는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이런 세상에.”
경험해본 적 없는 당혹함을 떨쳐내자마자 리히트호펜은 그의 요청을 수행하기 위해 재빨리 행동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