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5)
매국노의 원수 자식-5화(5/773)
5_아메리칸 드림… 아마도
1898년 8월 중순
미국 캘리포니아, 차이나타운
2주 넘게 증기선을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 전생에서도 못 가본 미국을 이렇게 와볼 줄이야.
처음엔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편지에 적혀있는 대로 따라가 차이나타운 내 새크라멘토 거리 (Sacramento Street)에 있는 내가 살 게 된 3층짜리 벽돌집을 보니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에 빠져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앞으로 4년간 내 집이 될 곳, 서양 장로교 선교 기숙사 (Occidental Board Mission House) – 약칭 카메론 기숙사 (Cameron House) – 에 들어선 지 몇 분도 안 돼서 꿈은 와장창 무너지고야 말았다.
자, 나에게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있었다.
좋은 소식은 이 기숙사를 운영하는 도날디나 카메론 여사 (Donaldina Cameron)는 매우 자애로운 신앙인이었으며,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중국인 및 아시아인들을 온정을 베풀고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동안 나를 무사히 보살펴주겠다고 약속까지 해주신 분이다.
안 좋은 소식은, 이 기숙사의 목적은 1882년에 중국인 배척법 (The Chinese Exclusion Act)이 통과된 이후 급증한, 중국인 여성 인신매매 피해자들의 보호시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 전용 기숙사라는 말이지. 그런 곳이 남자애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대체로 뻔하잖아?
일손이죠, 쉬밤.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난 시차 적응도 못하고 바로 일손으로 투입되었다. 학기 중엔 학업 및 방과 후 활동을 할 시간을 고려해서 매주 ”겨우“ 20시간만 일을 시키겠다고 했다. 대신 방학 때는 45에서 50시간 정도.
기숙사의 청소, 요리, 시설 보수, 심부름 등 정말 안 시키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이 기숙사에서 보호를 받는 중국인 여성들은 외출하려면 동행자가 필요 하기에 얘네들이 외출할 때 높은 확률도 나도 강제로 따라나서야 했다.
후···숙식을 받고 (조금 큰 옷장을 개조한, 2평이 안 되는 방이라곤 해도) 약간의 용돈까지도 받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어쩌겠냐, 황금이 만능이고 인권이 바닥인 19세기 말의 미국에서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해야지, 뭐.
아 뭐 개천에 좀 떨어지면 어떠냐, 화려하게 용이 되어 승천하면 되지!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왜 이렇게! 쥐가 많아!! 으아아아아!!!
*****
그해 8월 말, 온 조선은 한 신문사의 발칙한 행각으로 발칵 뒤집어졌다.
몇 주간 고민한 아펜젤러는 누군가가 교회에 떨어트린 문제의 원고를 결국 출판하기로 했다.
처음엔 독립신문의 편집장, 윤치호(尹致昊)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직전에 우연히 배재학당에서 몇 년 전에 졸업한 그의 제자, 이승만(李承晩)을 오래간만에 만났다.
그리고 어쩌다가 아펜젤러는 이승만에게 그 원고를 보여줬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몇 시간에 걸쳐 수십 페이지의 소설을 다 읽은 그는 자신이 최근에 창간한 제국신문(帝國新聞)에 출판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편집장님···진짜로 하실 겁니까?”
“그래. 활판기 돌려라.”
그렇게 ‘조선왕조의 멸망: 치욕의 10년’이라는 이름의 중편소설이 3주에 걸쳐 제국신문에서 출판되었다. 물론 원고가 상당히 악필이고 문법적인 오류가 많은 데다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여기저기 있었기에 여러 차례의 편집이 요구된 건 덤이다.
1900년에서 1910년을 다루는 이 문제의 작품은 지극히 평범한 조선의 양민 ‘김 서방’, 러일전쟁에 참전하고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 ‘시마다 겐조’, 그리고 나라를 팔아먹는 전 외부대신 현 학부대신 ‘이선용’의 시점을 교차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청일전쟁과 아관파천의 여파를 분석하면서 시작한 이 소설은, 일본이 러시아제국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선용 및 가명을 쓴 대한제국의 대신들과의 밀약을 통해 조선을 완전히 합방하는,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결말로 끝난다.
이렇게 경험하지 못한, 자극적인 전개가 독자들에게 충격적이지만 묘하게 매혹적으로 다가왔으며, 연재된 지 2주 차엔 대한제국 최초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되었다.
당연히 조정의 귀에도 소설의 내용이 들어갔으며, 수십 명의 관리가 (특히 외부, 군부, 그리고 학부 소속에서) 노발대발했다. 예조(禮曹)에선 ‘조선멸망’이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이 소설을 불온서적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세상에···편집장님, 이 소설이 이렇게 대성공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거 혹시 속편은 없습니까?”
“이 원고의 원작자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어.”
“에이, 익명이라고 하면서 편집장님이 쓰신 거 다 압니다.”
“미친 소리, 내가 그렇게 대담한 사람처럼 보여-”
쾅!
“죄인 이승만은 오라를 받아라!”
“아니, 잠깐만!”
이 사태는 일단 마지막 화가 연재된 당일, 경무청의 순경들이 제국신문 본사에 들이닥쳐 원고를 찢고 활판기를 모조리 부숴 버리는 거로 종결됐다. 이승만은 흠씬 두들겨 맞고 체포당하여 이젠 나름 익숙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최종화가 연재된 시점엔 문맹이 아닌 조선인 중에선 이 소설을 안 읽어본 자가 없었다. 심지어 문맹자들도 전국의 전기수 (돈을 받고 소설을 낭독하는 장사꾼)들이 가장 많이 다루는 책이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들어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설의 도입부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이 소설은 순전히 창작물이었다···
···고는 해도, 소설이 너무나 사건을 상세하게 서술했고, 국제정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만 갖춰도 전개가 상당히 개연성이 넘쳐나는지라, 단순히 창작물로만 넘기는 조선인들은 드물었다.
특히 아관파천 등을 통해 외세에 대한 근심이 민중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상황이라 소설의 여파는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그 덕분에 외부대신 박제순을 포함한 각 관청의 대신들 및 관료들은 절대로 자신들이 그런 일을 저지를 일은 없다고 해명하는데 진땀을 흘리는 촌극까지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분노의 대상을 이 소설을 출판한 이승만에게 돌렸다. 안 그래도 만민공동회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요주의 인물이 된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 하라고 주장하는 관료들도 많았다.
며칠 후, 감방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던 이승만을 아펜젤러가 찾아왔다.
“역시 선교사님! 빼내 주시로 온 겁니까?”
“아니, 나도 잡혀 왔어, 우남.”
이승만의 씁쓸한 농담에 아펜젤러는 본인의 손목을 감고 있는 포승줄을 보여줬다.
“경무청이 어떻게 내가 최초로 자네한테 그 원고를 전해줬다는 걸 알아냈나 보네.”
“아···”
같은 감방을 쓰게 된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보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그 소설은 러시아 공사를 통해 카를 베베르의 손에도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