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514)
매국노의 원수 자식-514화(514/773)
514_열강국의 굴욕 (3)
1940년 5월
프랑스, 파리
프랑스와 영국은 절대로 사이가 좋다고는 쉽게 말할 수 없는 나라였으며, 두 국가 간의 수백 년 넘는 역사가 이런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뒷받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는, 오랜 세월의 앙숙들일지언정 거대한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 임시로라도 손을 잡기도 하는 법이었다.
매우 적절하며 동시에 안타깝게도, 5월 중순에 갑자기 아르덴 숲을 뚫고 무서운 속도로 진군해오는 독일군은 그 ‘공동의 적’이라는 역할에 너무나도 적합했다.
“오셨습니까, 총리님!”
“헉, 헉···최대한 빨리 날아왔습니다.”
런던에서 비행기를 타고 급박히 날아온 대영제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은 거친 숨을 내 몰아쉬며, 프랑스 수뇌부가 전략회의를 하는 건물로 들어갔다.
오래간만의 격한 움직임으로 인해 몸이 불편해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기묘한 활력이 넘쳐흐르는 처칠의 얼굴은 10년은 더 젊어 보일 지경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레노 총리님.”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매우 직설적이시군요.”
침울함과 공포에 휩싸인 프랑스의 총리, 폴 레노 (Paul Reynaud)의 얼굴은 처칠과는 달리 10년은 훨씬 더 넘게 폭삭 늙은 것처럼 보였다.
다만 해가 뜨기도 전에 자신에게 온 절박한 전화를 떠올린 처칠은,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으으윽, 아침부터 대체 누구요, 또 그 망할 놈의 갈리폴리 건으로 놀려댈 거면-’
‘총리님, 저희는···저희는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레노 총리님이셨을 줄이야, 아니 그리고 그건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절망에 휩싸인 레노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태를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했고, 해군 장관 출신으로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보았던 처칠은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독일군이 프랑스 전선의 수비선에 수십 킬로미터에 가까운 돌파구를 뚫어버리고, 그 틈을 통해 독일 기갑사단이 프랑스군을 낫으로 후려치듯 와해시키며 해안선을 향해 진군한다니.
이것만 해도 믿기 힘들었건만, 이 모든 일이 독일군의 공격 개시 불과 5일 만에 일어났다는 것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던 처칠은 급히 파리로 날아가서 전략회의를 참석하기로 했다.
“가믈랭 대장님. 왜 그러고 계십니까.”
“···”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 (Maurice Gustave Gamelin) 대장은 몇 년 넘게 기다려왔던 사형을 맞이하려는 죄수처럼 모든 생기와 투지를 다 잃은 듯했다.
불과 몇 년, 아니, 몇 개월 전만 해도, 히틀러가 너무나 막강하여 함락할 수 없는 프랑스 진지를 향해 선제공격해준다면, 그에게 1억 프랑을 주겠다며 비웃은 걸 처칠은 잊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언제 어디서 반격할 계획입니까.
“반격은···반격은 불가능합니다. 저희에게 남은 전략 예비대는 하나도 없으며, 무기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힘없는 가믈랭 장군의 말에, 처칠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패배주의에 빠진 그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세상에 다른 군대도 아니고 프랑스군이 이토록 무력하게 당하며 또 쉽게 좌절하는 게 말이냐 되냐고.
보통 같았으면, 특히 레노든 가믈랭이든 눈앞에 있는 관료들이 영국인이었으면 곧바로 그런 말을 내뱉었겠지만, 처칠이 이번에는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처칠 총리님.”
“당신들이 무슨 잘못입니까, 쓸데없이 교활하고 비열한 독일놈들이 문제지.”
···결정적인 순간에 독일을 방치하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협조까지 하며 (처칠이 아니라 전임 체임벌린 내각이었다고는 해도) 이 전쟁이 터지는 데 기여한 게 영국이었다는 걸 알았기에.
만약 연합군이 제대로 대등하려고 해도, 하필 거대한 벨기에 피란민의 행렬이 이 시국에 발생하는 바람에 진군이 방해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씁쓸하긴 했다.
솔직히 이쯤 되면 거의 독일이 일부러 이런 부분까지 노려서 벨기에를 먼저 침공한 거라 봐도 무난하지 않겠나.
“영국 원정군 (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이 순간에도 계속 싸우는 걸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프랑스도 부디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해주시길 바랍니다.”
결국 처칠은 이미 사기가 꺾여서 바닥까지 박혀버린 프랑스와 프랑스군에게 해줄 수 있던 게 많이는 없었다고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영국 원정군의 상태를 확인하고,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몇몇 장정들을 격려해준 그는 곧바로 런던의 총리 관저로 돌아가 불리할 때마다 의존했던 무기를 다시 한번 꺼내 들었다.
슥슥슥슥
“그대처럼 한때 해군에 몸담았던 사람 (A Former Naval Person)으로서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책을 쓰기에는 너무 시간이 부족했고, 웅변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처칠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에게 기나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상황이 빠르게 악화하는 중고, 독일군은 공군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들의 신기술 및 전략이 온 프랑스를 짓밟아나가고 있으며···”
길고 정중한 편지를 다 끝낸 처칠은 펜을 내려놓고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히틀러는 프랑스를 쳐부수고 영국을 대륙에서 몰아내기로 이미 마음먹고 있었던 게 분명하리라.
“어쩐지, 리 제독 그 작자가 굳이 영국까지 찾아 왔을 때부터 뭔가 낌새가 이상하긴 했었지.”
재작년쯤에 전 미합중국 해군 정보국장, 대일 리 소장이 런던에 왔다고 했을 때 처칠은 흠칫 놀랐다.
단순히 리 제독이 대전쟁 당시에 – 의도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 그에게 망신을 준 것 외에도, 그가 가는 곳마다 뭔가 심각한 사건이 터진다는 평판을 들었기 때문에.
“애꿎은 대상에게 대신 떨어져 버린 건가.”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그 제독의 마수가 영국이 아니라, 생뚱맞게도 프랑스에 대신 뻗쳐버린 모양이긴 했지만.
어찌 됐든 미국이 군대를 머나먼 유럽에까지 투입하는 사태는 피할 거라는 걸 알았던 처칠이었다.
그러니 만약 설령 미군이 – 육군은 기대도 할 수 없고 – 해군을 보냈는데, 그 함대의 사령관이 그 기묘한 리 제독이었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어디 보자···”
편지를 미국으로 보내기 전, 처칠은 미국이 영국 (그리고 프랑스군)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요청이 적혀 있는 편지 막바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솔직히 이 정도 소소한 지원쯤은 해줄 수 있겠지?”
*****
워싱턴 D.C.
절그럭, 절그럭
“작은 나라들은 하나씩 마치 성냥개비로 만든 집이라도 된 것처럼 너무나 쉽게 붕괴하였으며,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무솔리니 또한 분명히 약탈 행위에 서둘러 가담할 겁니다···
한 손으로는 10kg을 넘는 아령을 든 채로 운동하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다른 한 손으로는 영국에서 처칠이 보낸 긴급서신을 소리 내 읽었다.
긴 편지를 다 읽은 루스벨트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해군참모총장을 호출한 뒤,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 인간이 미쳤나.”
물론 프랑스가 함락 직전까지 왔고, 그 여파가 그다음에는 영국, 그리고 더 나아가 미국까지 닿을 거라는 처칠의 주장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불과 몇 개월 전, 본인부터 미국이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을 열렬히 원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온 세계를 잇는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연설까지도 했으니까.
‘유럽의 방송을 통해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 대서양과 태평양을 항해하는 모든 배, 그리고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크고 작은 전투···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모든 것이 결국 세계와 우리 미국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곧이어 체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늘 품고 언제든지 지원해줄 각오가 되어있던 루스벨트였건만, 이번 편지는 여러모로 불편할 뿐이었다.
똑똑똑
“들어오게.”
뭔가 속이 불편해 보이는 해군참모총장, 해롤드 R. 스타크 대장이 조심스럽게 오벌 오피스 안으로 들어와 루스벨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또 대일 리 제독의 위험한 발언이 현실로 나타난 겁니까.”
대답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앓는 소리를 내는 루스벨트는, 자신 앞으로 다가온 스타크에게 처칠이 보낸 서신을 보여줬다.
‘맙소사. 이래서 리 제독이 빨리 항공함대 훈련 좀 해보겠다고 그렇게 급히 바다로 튀어나갔던 건가?!’
전임 해군참모총장의 애제자를 떠올리며 속으로 궁시렁거리던 스타크는 처칠의 편지를 계속 읽어나갔다.
거의 다 읽었던 스타크는 편지 막바지에 수록된, 그야말로 방대한 요구사항 목록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각하. 이거 제가 제대로 읽은 거 맞습니까?”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걸 보니 제대로 읽은 게 맞아.”
대공화기와 탄약을 비롯하며 군함 40~50척, 최신형 항공기 수백 대 정도에, 그리고 강철을 수출해줄 것.
계속 나도는 첩보에 의하면, 독일 낙하산부대와 공수부대가 아일랜드를 급습할 가능성도 있으니 미 공군이 그 지역을 정찰해줄 것.
그리고 싱가포르를 미국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이용해도 좋으니 그 대신 태평양에서 일본을 제압해줄 것 등등, 끝이 없는 내용을 다시 살펴보며 스타크는 혀를 내둘렀다.
“이 요구사항 목록 너무 길지 않습니까···?”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다는 건 이해한다만, 그래도 좀 과하단 말이지.”
스타크와 루스벨트 둘 다 처칠 본인, 그리고 대영제국의 입장에선 이 정도면 나름대로 확실하고 합리적인 요청사항일 거로 생각했을 것 같아서 더더욱 소름이 끼쳤다.
잠시 오벌 오피스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고, 루스벨트의 단호한 한마디가 튀어나오기 전까지 계속 공간을 채웠다.
“스타크 제독.”
“네, 각하.”
그리고 그 말에 놀랄 사람은 최소한 미합중국 해군에선 단 한 명도 없었다.
“대일 리 중장 지금 어딨나.”
*****
카리브해
“흐아아아암.”
항공함대의 기함, 항공모함 렉싱턴의 갑판 위에서 찬란한 오렌지빛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아, 그동안 뭐했다고 벌써 1940년 중반까지 온 거지. 영원히 끝나지 않던 것 같던 37년이 지나가고 나니까 시간에 가속도라도 붙은 것 같네.
내가 그만큼 늙어가서 그런 건가.
스윽
암담한 현실을 부정하며, 난 워싱턴주의 타코마 (Tacoma)에 위치한 포트 루이스에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중령이 보낸 전보를 꺼내어 살펴봤다.
어디 보자, 작년 12월에 미국 본토로 돌아온 그는 지금 제15보병여단 (15th Infantry Regiment)의 작전 장교가 된 모양이군.
거참, 여기서 불과 몇 년 만에 연합군 총사령관, 그리고 미군 원수까지 되었다 이거지? 오우 세상에.
“사령관님, 사령관님!!!”
재선이와 재익이는 2차 대전에 미군이 참전하면 어느 전선에서 얼마나 활약할까, 정말 쓸데없는 고민을 하던 나의 귀에 렉싱턴 함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후버. 오늘도 함대 훈련에 참여하느라 고생 많았어.”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얼굴이 사색이 된 존 후버 대령은 나에게 짧은 서신 한 통을 건네줬고, 이런 젠장할, 역시나 워싱턴에서 보낸 거잖아!
“아씨 이 시국에 또 부르다니.”
“홀시 제독님께 미리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안 해도 돼!”
제발, 나 또 워싱턴으로 끌려가긴 싫다고요, 제발 바다에서 좀 있게 해주시오, 각하!
···라고 속으로 빌었건만,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루스벨트 본인이 직접 보낸 서신에는 정말 살벌한 추신이 적혀 있었다:
Either you are coming right the Hell now, or your ass is getting dragged here kicking and screaming. Your choice.
지금 당장 튀어오던가 아니면 비명 지르고 발버둥 치면서 끌려오던가. 알아서 고르게.
주르륵
“인생 시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계관 최강자인 대마왕님께서 이렇게까지 험악하게 까라고 하시는데 까야지, 어쩌겠나.
“···알았어요, 갈게요. 가면 되잖아요, 따흐흑.”
내 안구에 습기가 가득 차는 와중에, 후버 대령은 알아서 윌리엄 F. 홀시 소장에게 연락하여 그가 다시 한번 임시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고 통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