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57)
매국노의 원수 자식-57화(57/773)
57_졸장과 명장 (1)
1904년 4월 둘째 주
뤼순항
멍 자국처럼 칙칙하고 푸르스름한 해수면 위에 으스스한 안개가 귀신처럼 덮었다.
이렇게 불길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러시아 제1 태평양 함대의 기함,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 (Petropavlovsk)는 휘하 함선 여러 척과 함께 연함함대의 함선을 추격 중이었다.
구축함 스트라스니 (Strasny)가 순찰 나갔다가 돌아오는 중에 일본 구축함과 조우해서 교전을 벌였다. 당황한 1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 오스카 엔키비스트중장은 순양함 바얀 (Bayan)에게 스트라스니를 지원하라고 보냈다.
반사적으로 내린 결단이었지만, 일본 함선은 신속히 후퇴를 했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엔키비스트는 무리하게 기함을 직접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수석 항해사, 키릴 대공 (Grand Duke Kirill Vladimirovich)은 옆에서 엔키비스트가 격앙하여 가만히 서 있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사령관님, 진짜 괜찮겠습니까? 지금 이 근방에 기뢰가 가득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대공. 그놈의 기뢰가 화력이 쎄봤자, 얼마나 쎄겠다고 그러십니까.”
너무나도 자신감과 호전성이 넘쳐나는 그의 모습에 키릴은 차마 뭐라 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직위가 있다 하더라도 함장은 엔키비스트 아닌가.
엔키비스트는 추격에 나선 내내 거칠게 심호흡을 했고 손이 부르르 떨렸다.
기대감인지, 공포인지, 분노인지, 무슨 감정이 그를 그렇게 요동치게 만들었는지 본인도 몰랐다.
하지만 원인은 확실했다. 바로 그 망할 놈의 신참 내무부 차관, 완용 리.
약 2개월 전, 뤼순항이 기습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 청사에 소집된 회의를 다시 떠올렸다. 특히 한국에서 온 완용 리라는 작자가 대담하게 한 도발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스테판 마카로프 중장은 현재 러시아 해군 통틀어 최고의 인재입니다. 그런 그가 뤼순항으로 가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보다는 저기 발트 함대를 통솔하는 것이 연합함대를 확실히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허, 리. 어디서 일개 동양인, 그것도 내무부 소속이면서 감히 해군 전략회의에 끼어들어 입을 여는 것인가? 황제 폐하의 신임 좀 받았다고 너무 주제파악 못하는 것 아닌가?’
‘자격만 따지자면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엔키비스트 중장님과 별 차이도 없을 텐데요?’
‘뭣이야?!’
엔키비스트가 테이블을 치고 일어나, 얼굴을 울그락불그락 붉히고 리를 노려봤다.
‘네 이 녀석, 다시 한번 지껄여보시지!’
‘제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중장님, 마지막으로 바다에 제대로 나가보기나 하신 게 거의 5년 가까이 되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사실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가신 것도 아벨란 해군상님과의 사촌 관계 덕분이지 않습니까.’
‘자네 지금 말 다 했나?! 어디서 감히 모함인가!’
자리에 있는 모두가 걱정될 정도로 격분한 엔키비스트가 리를 향해 삿대질해도 그의 냉소적인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리는 웃으면서 엔키비스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면 가서 한 번 해보십시오.’
‘뭐-뭐라고?’
‘뤼순항을 돌파해서 제가 틀렸다는 걸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 도전이 비수처럼 날아와 엔키비스트의 가슴팍을 쑤셔갔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러시아 해군의 무능한 장성 중에서도 자신이 최악 중 하나라는 쓰라린 현실을 말이다.
하지만···
‘왜, 두려우시기라도 하신가 봅니다? 아니 뭐, 그러면 별수 있겠습니까, 원래대로 마카로프 중장님을 보내는 수밖에.’
‘아니! 내가 하지. 보란 듯이 일본놈들을 몰아내서 그 망할 놈의 주둥아리를 영원히 닫게 해주지. 해군상님, 제가 가겠습니다, 반드시 뤼순항을 해방하겠습니다!’
아벨란의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엔키비스트는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뒤를 누군가가 헐레벌떡 따라왔다.
‘엔키비스트 중장. 엔키비스트. 엔키-야, 오스카!’
테오도르 아벨란이 황급히 달려와 엔키비스트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스카, 정말 저 도발에 넘어가는 거 아니지? 저런 놈의 말은 무시하고, 몸좀 사려.’
‘걱정은 고맙습니다, 형님. 하지만 스타크 (Oskar Starck)도 그렇고, 로제스트벤스키도 그렇고, 이젠 저 망할 놈의 동양인까지 나보고 무능하다고 모욕하다니, 이 치욕은 도저히 못 견디겠단 말입니다!’
‘치욕을 당하면 어때, 사는 게 더 중요하잖아!’
‘···형님도 절 못 믿으십니까?’
아벨란은 부인하려고 재빨리 입을 열었으나, 그의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엔키비스트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뭐, 됐습니다. 이제 저도 명색이 중장인데 스스로의 권위를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형님도 저를 부끄러워하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아냐, 오스카. 믿어줘, 난 단 한 번도···’
‘제가 부끄럽지 않다면 말리지 말아주십시오. 저 자신을 증명할, 이 수치를 만회할 기회를 달란 말입니다.’
아벨란은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뤼순으로 향하는 오스카를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4월 첫째 주에 뤼순항에 도착한 그는 최대한 스테판 마카로프 중장을 모방하려고 애썼다. 그의 호전적이면서도 동시에 계산적인 정신을 본받아 뤼순항을 대비시켰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포위까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뤼순항의 대부분 군인이 육군이고 해군이고 사실상 자포자기라도 한 듯,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명의 장군, 로만 콘드라텐코 (Roman Isidorovich Kondratenko) 중장만이 거의 병적일 정도로 정열적으로 뤼순항 요새화에 몰두했으며, 심지어 해군인 그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선원들은 해군에서 가장 용맹하고 유능하며 존경받는 마카로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하였건만 정작 도착한 건 엔키비스트라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취급도 마지막이다.
그래서 그는 후퇴하는 일본군의 구축함을 보고 당장 뤼순항 주변에 벗어나기까지 하면서 추격한 것이다.
저놈들을 격침해서 자신 명예회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자신의 용맹한 모습이 기록으로 담을 수 있도록 엔키비스트는 러시아 최고의 종군화가인 바실리 베레샤긴 (Vasily Vereshchagin)도 함선에 초빙했다. 눈치 빠른 그는 추격전이 시작되자마자 벌써 붓과 캔버스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추격하면 할수록 안개는 더더욱 짙어졌고, 어느 순간 추격하던 한 두척의 함선은 안갯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이런 젠장할!”
엔키비스트는 울분이 섞인 울부짖음과 함께 군모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베레샤긴만큼은 아니지만 그림에 조예가 있는 키릴은 스케치북을 꺼냈다가 조용히 다시 집어넣었다.
기이한 정적이 악령처럼 그들에게 이슬이 바위에 스며들 듯이 찾아왔다.
파도와 바람, 그리고 선원들의 숨소리까지 멈춘 것만 같았다. 들려오는 소리는 함선의 엔진에서 나는 불협화음 같은 소리와 선원들 심장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정적은 한 선원이 고함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일본군이다!”
마치 악마가 낮은 목소리로 웃기라도 하는 듯한 음산한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바람은 서서히 바다 위의 안개를 걷어내었다. 곧이어 추격하던 구축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쥐새끼 같은 놈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커헉?!”
엔키비스트가 기뻐할 틈도 없이 안개가 걷히면서 구축함 주위에서 전함과 순양함 여러 척이 한 대씩 나타났다.
그가 자신이 완전히 포위당했고, 처음부터 함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배-배를 돌려라!”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투지와 일본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오만함은 어디 가고 엔키비스트는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방향을 틀어 다시 뤼순항으로 줄행랑쳤다.
다행히 뤼순항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도망칠 때까지 연합함대는 별다른 공격을 하지도 않았고, 키릴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키릴이 아마 이젠 엔키비스트가 몸을 좀 사리겠지, 싶었던 찰나에 갑자기 굉음과 함께 온 페로파블롭스크의 온 선체가 들썩였다. 엄청난 충격에 키릴은 완전히 균형을 잃고 우당탕 넘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뒹굴던 키릴의 눈에 곧게 서 있는 엔키비스트의 발이 들어왔다. 그 의연한 모습에 조금이나마 경외심이 들기도 할 정도였다.
그때 키릴의 머리에 뭔가 뜨거운 액체가 느껴졌다. 머리를 더듬어 피를 만져 본 그는 혹시 뇌출혈인가 싶어서 짜증과 당황함이 덮쳐왔다.
하지만 그는 깨달았다.
자신의 피가 아니라는 것을.
키릴은 고개를 들어 곧게 서 있는 엔키비스트를 발끝부터 서서히 올려봤다.
바지까지는 멀쩡했으나, 상반신의 제복은 점점 붉은 빛으로 물 들여왔다.
절단된 엔키비스트의 목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기뢰에 접촉하면서 터져나간 전함의 파편이 그의 머리를 완전히 날려 버린 것이다.
키릴이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페트로파블롭스크는 또 다른 기뢰를 들이받았다. 폭발음과 함께 선체가 다시 또 진동했고, 스케치북을 가지러 간 베레샤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전함 곳곳에서 화재가 일어났고, 몇몇 선원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불타 죽었다.
기적적으로 큰 나무판 하나에 기대어 겨우 익사를 피한 키릴은 짙은 연기에 뒤덮인 전함이 불과 몇분 만에 가라앉는 모습을 힘없이 지켜볼 수 없었다.
프로펠러가 계속 돌아가고 전등이 깜빡거리는 페트로파블롭스크는 아직도 죽지 않았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뤼순항이 코 앞임에도 그녀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쌍원경으로 지켜보던 연합함대 총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짧은 평가 한마디만 했다.
“역시 기뢰가 가성비가 좋단 말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육군이 그 ‘부비 트랩’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조선에서 애를 먹고 있나 보군요.”
도고는 자신 옆에서 악랄하기 짝이 없는 농담을 하는 히코노조 가미무라 중장을 참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자네, 절대로 그 말 조슈 놈들 앞에서 하지 말게. 칼 맞는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육군 1군 사령관 쿠로키 다메모토 대장은 아직도 제대로 회복이 안 된 몸을 이끌고, 원 계획보다는 늦어졌지만,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몇 주 후, 드디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하는 철로가 완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