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74)
매국노의 원수 자식-74화(74/773)
74_폭풍전야 (4)
1905년 1월 셋째 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깨끗한 눈이 궁전광장 (Palace Square)을 하얀 이불처럼 덮었던 어느 추운 겨울.
탕
털썩
내무부 장관 권한대행 완용 리가 시위대에서 발포한 총에 맞고 쓰러졌다. 새하얀 눈밭이 쓰러진 그의 상체와 입에서 흐르는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시위대를 이끌었던 가퐁 신부는 경악하여 군중을 돌아보니, 한 남성이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총구를 리를 향해 조준하고 있었다.
리가 쓰러지자마자 (왠지는 모르겠지만 무장을 매우 가볍게 하고 있던) 경찰들이 달려와 그를 병원으로 이송했고, 그 틈을 타 그를 저격한 남성도 군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시민 여러분, 일단 오늘은 철수합시다!”
외국인, 그리고 동방인 이긴 했지만 어쨌든 황제가 임명한 내무부 장관 권한대행을 시위대가 공격했다? 게다가 경찰이 먼저 선제 사격도 하지 않았는데?
이건 그 어떤 식으로도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수천 명의 시위대도 그 정도는 이해했는지, 분명히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한 명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탄원할 기회는 다음에도 있을 겁니다!”
사실 애초에 그날 궁전광장을 지나 겨울 궁전으로 갔어도 그들이 탄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날 차르는 휴가를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가퐁 신부를 포함해, 시위대 중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편, 경찰들은 당장 피를 철철 흘리고 신음하고 있는 이완용을 한 병원의 응급실로 데려갔다.
경찰들은 응급실 주위를 둘러싼 후, 수술 침대에 누워있던 이완용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장관님, 시위대가 해산했습니다.”
죽는소리를 내던 이완용은 그 말을 듣자마자 신음을 멈추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휴, 이게 통할 줄은 몰랐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완용은 품속에서 터져서 넘쳐 흘리는 피 주머니를 꺼낸 다음, 셔츠를 풀어 헤치고 무거운 방탄조끼를 벗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을 ‘저격’했던 오흐라나 요원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장관님, 몸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잘했어. 사격 솜씨가 일품이ㄱ-으윽!”
다만 이완용의 예상과는 달리, 방탄조끼는 생각보다 얇았고, 권총은 생각보다 화력이 셌다. 덕분에 갈비뼈 부근에 수박만 한 크기의 피멍이 생겼고, 뼈 하나가 금이 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시위대를 잠시나마 무력화시킬 수 있으면 남는 장사 아닌가.
사실 이완용은 시위대의 목적 따위는 별 관심 없었다. 그저 황제도 겨울 궁전에 없는 와중에 유혈사태라도 일어나면 순전히 자신 책임이기 때문에,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탄원이야 뭐 나중에 가퐁만 따로 불러서 차르한테 데려가든가 해도 되니까. 뭐, 차르가 그걸 받아들이든 말든 그건 차르가 생각할 일이고.
아무래도 볼세비키를 포함해 이번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지기를 은근히, 또는 대놓고 바랬던 세력도 있었겠지만, 이완용은 그들의 비위를 맞춰줄 의향도, 이유도 없었다.
이완용은 정말 오래간만에 편히 누웠다. 몇 개월 동안 과로사할 정도로 업무를 본지라 너무나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치명적인 총상도 아니고 그저 피멍과 일부 골절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는 공식적으로 업무 중 상해를 입은 것이다.
이제 적당히 병원장을 꼬드겨 전치 몇 개월짜리로 진단받고, 스뱌토포르크에게 권한대행직을 넘긴 다음 병원에서 휴식이나 취하면 된다.
다만 이 음모를 모르는 외부인이 보기엔 내무부 장관이 3명 연속 암살 시도를 당하는 더더욱 저주받은 직책으로 보이겠지.
그리고 얼마 전에 미국에서 보낸 첩보를 받았다.
아펜젤러 살해사건의 여파가 미국에서 통제 불능할 정도로 퍼져나가고 있고, 미 해군의 아시아 함대가 곧 한국을 향해 출발할 것이라고.
이젠 그 누구도 어떻게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진 것이다.
‘혁명이고, 차르 정부고, 러일전쟁이고 이젠 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리고 이완용은 그토록 원하던 휴가를 즐기기 시작했다.
‘입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차르가 친히 그를 병문안 오기 전까지는.
*****
만주, 산데푸의 남쪽
일본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 (大山 巌) 원수의 속이 타들어 갔다.
이제까지 일본 육군은 단 한 번도 러시아군에게 패배한 적 없었다. 그나마 제일 패배에 가까웠던 남산 전투마저도 결국 러시아군이 제풀에 지켜 철수해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육군의 사정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왜 이렇게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데, 이기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건가···’
이미 몇 개월 전부터 물자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일본 내에서 냄비나 솥 등 철제 식기구를 공출해서 탄환과 포탄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악화일로로 치닫는 중이었다.
조선에서도 물자를 보충해보려고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사보타쥬를 워낙 많이 당해서 오히려 손실만 더 커지는지라 결국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물자도 물자지만,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
‘아펜젤러···괜히 시비 걸었다가 뒈졌으면, 곱게 뒈지지 왜 자꾸 우리를 괴롭히냔 말이다···’
아펜젤러 사건으로 인해 미국에서의 일본 채권 구매 수가 수직 급락했다.
야콥 쉬프를 포함한 유대인 자본가들도 이제 자신들이 해줄 만큼 해줬고, 계속 지원해주면 유대인들한테 불똥이 튈 수도 있다면서 점차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만주군은 산데푸 회전 이후로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지 못하고 묶여 있었다. 심지어 뤼순항을 포위한 일본 3군은 1월 내내 실질적으로는 반강제로 휴전을 펼치기까지 했다.
사실상 만주군이 벌일 수 있는 제대로 된 전투는 딱 한 번, 많이 잡아야 두세 번이다. 그리고 발트함대도 인도차이나 해안에 도착했으니, 3월 전에 연합함대와 결전을 치를 듯싶다.
‘그러면 결국 이 전쟁은 4월쯤에는 확실히 끝날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만주군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봉천 부근에 있는 러시아 극동군이 더 이상의 공세를 못 펼칠 정도로 철저히 박살 내는 것.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러시아군도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나 사기가 떨어지고 지휘부에서 마찰이 심했으면, 한 중장이 쿠로팟킨 대장에게 총을 겨눴다는 말까지 들려올까.
막강한 러시아 극동군을 그가 지휘했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극동군을 완전히 가둘 포위망도 얼마 있지 않으면 완성되겠지만, 러시아군은 가만히 지켜만 보겠지.
‘쿠로팟킨 그 녀석이 자신에게 주어진 병력을 제대로 활용도 못 하고, 소극적인 공세만 펼쳐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군. 나중에 전쟁 끝나면 일본 측에서 훈장을 줘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속으로 키득키득 웃는 오야마에게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兒玉 源太郞) 대장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원수님. 러시아군이···진군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순간 오야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 버-벌써? 갑자기 왜? 쿠로팟킨 그 녀석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성향이 아니었잖아?!”
그리고 고다마의 입에서 이제까지 일러전쟁에서 들었던 소리 중에서, 선교사 아펜젤러가 살해당했다는 소식 그다음으로 가장 끔찍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극동군 지휘관이 교체되었답니다···!”
그 무렵, 북쪽에 있는 러시아군 사이에선 이제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힘들고 무모한 작전이었던지라 준비해야 할 게 많았지만, 참여하는 장교고, 사병이고 왠지 모르게 기뻐 보이는 것만 같았다.
풀어서 보면 조금은 복잡한 계획이었고, 이름도 길었지만, 러시아군은 아주 짤막하게 두 단어로 요약할 뿐이었다.
‘브루실로프 공세 (Brusilov Offensive)’
*****
한편, 샌프란시스코
“육지 X까, 난 배를 타고 있다고 X발놈아! 난 지금 갑판 위에 내 친구들이랑 있다고 X발놈아!”
“대일, 너 그러다 함장님한테 죽는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경고하던 체스터도 조용히 흥얼거렸다. 그래, 솔직히 배에 타면 이 노래를 불러줘야 해, 국룰이라고.
한국으로 출발하기 직전, 우리는 전함 오하이오에 화물(?)을 싣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물건을 말이야.
내가 오하이오의 함장이자, 아시아 함대 총사령관, 찰스 트레인 (Charles J. Train) 소장에게 특별한 요청을 했지.
“그러니까, 전함 안에 이 소화기를 배치하자고?”
“그렇습니다! 이건 말입니다, UC 버클리 굴지의 공학자들을 대거 섭외해서, 최대한 강화한 최신형 소화기입니다. 무게는 더 가벼우면서도, 성능은 더 좋다, 이겁니다.”
처음엔 내가 감히 사령관 앞에서 나대면서까지 이런 일을 할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말이야, 오하이오 내부를 둘러보고 보수장과 대화를 해본 결과, 이 시점의 데미지 컨트롤 (damage control, 선박 손상통제)는 2차대전 당시 미 해군의 전설적인 수준과 달리 완전히 개판이더라고.
특히 전생에 소방관이었던 내가 보기엔 아주 그냥···어후.
야, 일단 난 살아서 돌아오고 싶단 말이야.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선상 사고로 죽기엔 아깝잖아.
“그나저나 오하이오 내부에 공간이 그렇게까지 않지 않은데 말이지. 너무 겁이 많은 거 아닌가?”
할 수 없군, 이것만은 꺼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영 떨떠름해 보이는 트레인 소장의 반응에 난 할 수 없이 그에게 여러 장의 ‘제안서’를 건네줬다. 장 사이에 현금이 좀 끼워져 있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음, 아무래도 공간을 만들 수는 있겠군. 다만 네가 다 싣는 거다?”
“네, 감사합니다!”
아 뭐, 왜, 이건 착한 뇌물이다 이겁니다.
그렇게 나와 체스터는 팔자에도 없던 상하차를 하게 되었다.
“아이고 몸이 다 쑤시네. 너 인마···만약 이거 쓸 일 없으면 알아서 해, 손해배상 청구할 거야!”
소화기 한 박스를 끌고 온 체스터가 자기 등을 두드리며 불평을 했다. 뭐, 현실적으로 보면 쓸 가능성이 적긴 하겠지.
그런데 말이야···아무래도 감이 안 좋아.
뭔가 오하이오가 한 번은 교전할 것 같거든. 내 생이 첫 실전이 쓰시마 해전이 된다던가,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제발 내 감이 틀렸으면 좋겠다. 난 되도록 2차대전까지는 별 전투도 안 겪어보고 존버하고 싶거든.
그리고 결국 며칠 후 그렇게 불길한 기운과 함께 아시아 함대가 한국으로 출발했다.
*****
인도차이나 해협
발트함대
발트함대의 기함, 크냐지 수보로프 전함 위에서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과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마지막으로 한번 만났다.
“이제 저희가 그토록 준비해왔던 죽음이 다가오고 있군요.”
“그러게. 수병들은 많이 불안해하더군.”
“이렇게 미친 짓을 하러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정신병을 호소하는 자들이 생기는 게 당연해 보입니다.“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연합함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대한해협 방향을 쳐다봤다.
그래도 프랑스령 베트남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를 이용한 외교전 덕분에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저 멀리 아프리카를 돌아서 와야 했다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시나리오다.
“그렇지. 정신이 멀쩡한 인간은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늘이 내 제삿날이구나 생각하지 않아. 우리 함선이 배수량만 제외하고, 화력을 포함한 전체적인 성능도 열세고, 경험과 훈련 수준도 열세지. 이건 사실상 자살 임무나 다름없는 미친 짓이야.”
로제스트벤스키는 고개를 떨궜고, 마카로프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새하얀 연기가 바닷바람을 타고 유령처럼 날아갔다.
”하지만 말이야, 로제스트벤스키, 난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생각하네. 끝이 언제 오는지 아는 것만큼 큰 축복은 없어. 그것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진정한 자유지. 역사는 우리를 기억하게 될 것이야. 악몽을 직접 선택해서, 후회 없이 바다가 내뿜는 숨결처럼 나아간 자들로서.”
그리고 마카로프는 목에 걸려 있던 쌍안경을 바다로 집어 던졌다.
“이 재밌는 걸 이제야 해보다니.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본 것 같군.”
로제스트벤스키도 옆에서 웃으면서 함께 집어 던졌다.
이제 3개 남았다.
“자, 맞이하러 가자. 피와 강철의 폭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