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82)
매국노의 원수 자식-82화(82/773)
82_뒤틀리는 역사, 그리고 후폭풍 (1)
1905년 6월
포츠머스 조선소
“대일아.”
“아버지.”
내가 한국을 떠난 게 1898년. 그러니까 약 7년 만에 다시 이완용과 재회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아무래도 서로가 너무 희한했던 모양이다.
“···많이 컸구나.”
이완용이 나를 쓱 올려다봤다. 내가 기억하기에 이 새끼가 원 역사에서 그렇게 키가 크진 않았지, 아마.
그 반면 난 성장기 때 먹을 거 다 먹고, 운동도 많이 하고 잠도 충분히 자서 그런지 이 새끼보다 키가 30cm는 더 컸다.
“···많이 삭으셨습니다.”
7년이 지난 걸 고려해도 이완용의 머리엔 흰머리가, 얼굴엔 주름이 많이 늘었다. 마치 한 최소 10, 최대 20년은 폭삭 늙은 느낌?
아무래도 한국처럼 4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살다가, 러시아처럼 추운 곳에서 오랫동안 과로를 하다 보니 삭았나 보네.
어, 음, 아무튼 내 잘못은 아닌 듯···?
“그나저나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뭐긴 뭐야, 러시아 측 협상단의 일원으로 왔지.”
“아 그래. 내용이 참···이거 뭐라 해야 될지 모르겠더군요.”
아무래도 우리 둘의 공작(?)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은 무승부로 끝난 모양이다.
20세기 초 역사가 현대인의 개입이라는 질병에 쓰러진 것이다.
대일 이 모자란 녀석···
분명히 한국인으로서는 기뻐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만, 난 영 찝찝했다.
자, 한 번 정리해보자.
우선 이번 전쟁으로 러시아는 뤼순항의 소유권과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의 철로 부설 및 사용권을 완전히 보장했다.
그토록 원해왔던 부동항을 손에 넣은 러시아 측 협상단은 차르의 숙원을 이뤄서 환호하는 분위기였다나 뭐라나.
···아니, 청나라는 어쩌고요? 아무도 걔네들 의견은 안 물어봤나? 아 뭐, 나도 솔직히 짱깨들이 뭐 어찌 되든 관심 없긴 하다만.
그 반면,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얻은 게 없지는 않았다.
일단 청나라에서 할양받은 요동반도의 일부를 되돌려 받았고, 결정적으로 원 역사와는 달리 북위 50도선 이남도 아닌, 사할린을 통째로 얻어냈다.
덕분에 나름 넓은 영토를 따냈다는 부분에 일본 협상단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는 분위기인 것 같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큰 땅을 그냥 줘버릴 수가 있죠···?”
“뭐 어차피 형벌 식민지로만 쓰고 있었고, 이미 홋카이도 일부처럼 여겨지는 지역이라서 그렇게까지 큰 미련은 없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영토는 영토 아닙니까. 이건 뭐 일본 측에서 협상단한테 거액의 뇌물이라도 먹였나 의심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인데요?”
“···그렇단 말이지.”
보통 사람은 눈치도 못 챌 정도의 아주 빠른 찰나 동안, 이완용의 표정이 불편해 보였고 내 시선을 피했다.
너 이 새끼 설마···?!
···아냐 아냐, 아무리 천하의 이완용이라 해도 남의 나라를 팔아먹을 리가.
아, 물론 결국 일본 협상단은 잃은 것이 훨씬 더 컸지.
우선 가장 원했던 조건 중 하나인 배상금의 ㅂ자도 못 꺼냈다더군. 그래 사실상 러시아 측에 배상금을 지불하면 지불했지, 어디서 감히 요구할 수 있겠어, 팍 씨.
게다가 가장 큰 건 한국 내 주권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건 사실 공식적인 조항은 아니었는데, 여기서부터가 완전히 골때리게 되었다.
포츠머스 조약 자체에는 언급이 안 됐지만, 이완용이 언질 준 바에 의하면, 일본은 이번 협상을 조금이라도 일본 측에게 유리하게 중재해 준 미국에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했다고 한다.
그 대가가 바로 일본이 한국 내에서 가지고 있던 이권을 미국에 넘긴다는 것이다.
허 참.
이완용이 1905년에 한국 관련해서 조약을 맺으러 온 건 맞구나.
한국이 일본이 아니라 미국의 손에 넘어간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뿐이지.
미치겠네, 씨발.
야 잠깐만,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미 해군은 1차대전엔 진짜 별 활약을 못 했고, 2차대전에서야 일본의 뚝배기를 완전히 박살 내면서 활약을 했다.
내가 사학도가 아니라서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본이 감히 진주만 공습을 저질렀던 계기 중 하나가 바로 러일전쟁이었지, 아마.
러시아를 꺾고 나서 체급도 키우고 자신감도 넘쳐흐르는 일본은 자신도 열강에 등극하였고, 일본인은 명예 백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도 러시아처럼 귀싸대기를 맛깔나게 때리면 감동해서 협상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선전포고를 했지만 돌아온 건 도쿄핫과 핵폭탄이었지.
그런데 러일전쟁이 무승부로 끝났다.
그 말인즉슨···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은 내 미래지식 중 상당 부분이 쓸모없어졌고, 어쩌면 내가 앞으로 40년대까지 미 해군에서 버텨야 할 이유도 없을지도 모른다.
영국 해군이 병신도 아니고 설마 뭐 나치한테 기습이라도 당해서 완전히 마비되거나 하지 않는 한, 2차대전이 터져도 딱히 미 해군이 나치랑 부닥칠 일은 없을 거 아냐?
‘FDR, 그럼 기갑부대도 없고, 일본이 뇌절도 않았으면 우리가 2차대전에 뭘 할 수 있죠?’
‘너넨 쓸모가 없다, 물자랑 병력 수송하고 팝콘이나 가져와라, 해군아.
아이고, 왜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역사소설 중에서 20세기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들은 전부 다 러일전쟁 이후에 시작하는가 싶더니만!
제기랄, 역시나 1, 2차 대전 둘 다 활약할 수 있는 육군으로 가야 했었어. 내 웨스트포인트 추천서 물어내라고 패튼 이 개새끼야!
속 터지겠다.
내가 미국에 오기도 전에 저지른 짓 덕분에 군인으로서의 커리어가 완전히 꼬여버렸잖아···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코카콜라, 테디베어, 뱅크 오브 아메리카, 비행기, 자동차, 개인화기, 탱크, 펩시, 크래프트, 벡텔, 영화, 기타 등등.
이제까지 내가 벌어놓은 돈, 그리고 시작하거나 숟가락 얹은 기업과 사업만 해도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아마 아나폴리스나 웨스트포인트 같은 사관학교 졸업 후 의무복무기간이 얼마였냐, 10년이었던가?
만약 1910년도 중후반까지 일본이 그냥 쭈그러져 있을 분위기라면 뭐 그냥 해군에서 전역 신청하고 사업이나 벌이지. 일본의 침략 걱정 없는 한국으로 돌아가도 좋고.
야, 아무리 일본이지만, 설마 러일전쟁 승리의 뽕도 없이 감히 ‘또’ 강대국에 시비를 걸겠어?
내 머릿속에서 그런 발칙한 생각이 돌아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체스터는 이완용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이완용은 능숙한 영어로 답했다.
아이고 그나저나 체스터 니미츠 얘도 2차대전 때 어쩌냐···
“대일 아버지 맞으시죠? 체스터 니미츠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은 니미츠 군인가 보군요. 대일이가 많이 언급했습니다. 대일이 성미가 보통 성미가 아닌데, 참 고생 많았겠군요.”
“아 좀 막 나가긴 하는데, 그래도 삭막한 아나폴리스에 한 줄기 햇빛 같은 존재죠. 괜히 선샤인 (sunshine)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요? 저 녀석이요···?”
체스터와 악수를 하던 이완용이 정말 같잖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순신? 감히 네가?!’라고 얼굴 근육으로 말하는 것처럼.
아, 뭐, 왜, 내가 정한 별명 아니라고요 진짜.
“겨우 저딴 녀석이 ‘그 별명’으로 불린다니···한국인으로서는 조금 불편하긴 하군요.”
“그런가요? 아 맞다···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뭐, 걱정 마세요. 이젠 그 별명으로는 안 불릴 테니까요. 훠얼씬 더 좋은 별명이 생겼거든요.”
“야, 체스터···경고한다. 하지 마.”
체스터의 얼굴이 씰룩쌜룩했고, 슬금슬금 다리 근육을 풀고 있었다.
“우리 대일이가 바로 아나폴리스의 자랑, 그 이름하여 ‘태평양의 호크아이’란 말입니다!”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일루와 너 죽었어!”
나는 당장 낄낄거리면서 도망치는 저 녀석을 잡아서 족치려고 했지만, 이완용이 내 소매를 붙잡았다.
“으이그, 이제 나이도 먹었고 엄연한 장교까지 되려는 녀석이 체통을 지켜야 할 것 아니냐. 너도 명색이 양반집 가문이란 말이다.”
“아 냅둬요, 좀! 제가 무슨 뭐 저기 유럽의 귀족도 아니고 뭘 여기서까지 그런 걸 따져야 합니까.”
“···믿기 힘들겠지만, 너도 이제 귀족 맞으니까.”
“···네?”
그리고 이완용은 상상도 못 한 충격 발언을 하고 말았다.
“아, 그러니까. 차르가 이제까지 러시아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기리는 차원에서 아버지에게 명예 백작 작위를 내려주셨다, 이겁니까?”
“그러니까 한국에서처럼 망나니짓은 앞으로 절대로 하지 말거라. 백작가의 망나니라니, 어감도 이상하지 않으냐.”
니키 이 미친놈아, 왜 남의 나라 장관한테 백작 작위를 주고 난리야?!
어떻게 이완용이 결국엔 조선 귀족이 되냐고, 아놔 미친.
“전 이런 현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도 믿기 힘들다. 아, 그리고 언젠가 차르가 너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더군.”
···
···
···공산주의자들아 뭐하냐, 제발 빨리 혁명 좀 일으켜줘!
*****
9월 13일
일본, 도쿄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노기 야스스케 소위의 눈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공허해 보였다.
기력도, 의욕도 없이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이미 죽은 자기 자신의 죽음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의 품 안에 있는 나무 상자 하나만큼은 너무나도 소중하게 꽉 껴안고 왔다.
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니 일부 이웃들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에게 말을 거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몇몇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고 자리를 피했다.
이쯤부터 야스스케는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았고, 집 앞에 도착하니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유리창은 깨져있었고, 정원과 벽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벽에는 오만 비난과 저주를 담은 화려한 문구가 다양한 글씨체로 적혀 있기도 했다.
품 안에 안겨있는 상자를 쳐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버지···아무래도 어머니랑 저는 이사라도 해야겠군요.”
상자를 다시 한번 꼭 껴안은 야스스케는 쓰레기와 오물을 피해 겨우 집에 들어갔다.
삐걱. 삐거덕.
벽돌과 쓰레기가 던져져 조용한 집에서 뭔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어머니···왔습니다-”
야스스케가 안방에 들어가자 목을 매달은 노기 시즈코가 그를 맞이했다. 눈동자가 돌아가고 혓바닥이 축 늘어진 그의 어머니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그의 팔에 남아있던 힘까지 풀려 떨어진 상자에서 노기 마레스케 대장의 목이 굴러 나왔다.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레스케는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를 찾아가서 제안했다.
이번 일러전쟁에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죄악과 실패를 자신이 다 뒤집어쓰기로.
곧이어 노기 마레스케는 미국 대사관 앞에서 자신의 죄명을 읊은 다음, 할복했다.
비무장한 미국 시민이자 선교사였던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를 사살하는 바람에 미국이 뒤집히게 만들어버린 죄.
무모한 돌격으로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정작 뤼순항을 점령하지 못하고 일본 측 승리의 기회를 놓쳐버린 죄
괜히 미국이 러시아를 지원한다는 음모론을 퍼트려 일본군에게 반미 정서를 심고, 미군 함선을 공격하게 만든 죄.
그리고 할복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쳐주는 카이샤쿠 (介錯)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야스스케였다.
물론 그는 눈물을 흘리며 거부했으나, 마레스케는 무사의 정신을 지키고 마지막 효도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였기에 결국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몸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그의 시야에 옆에는 아버지의 목이, 앞에는 어머니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다.
야스스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이 참상을 가렸다. 이웃에게 들릴까 봐 소리 내 통곡할 수도 없이 그저 조용히 흐느낄 뿐이었다.
차라리 뤼순항에서 죽었어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