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traitor RAW novel - Chapter (94)
매국노의 원수 자식-94화(94/773)
94_좌초와 자초
1906년 9월
워싱턴주 북부, 로자리오 해협.
윌리엄 리히 대위는 참 여러모로 어려운 상관이었다.
똑똑하지만 촐싹거리는 체스터, 시종일관 다혈질인 홀시, 과묵함이 오히려 웃겼던 스프루언스, 그리고 세상 띠꺼운 킹 등등.
여러모로 가볍고 톡톡 튀는 해군 장교만 만나봤던 나에게는 엄격, 진지, 근엄함이 온몸에서 배어 나오는 리히가 참으로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언급한 네 명 중 그나마 제일 리히와 비슷한 건 스프루언스겠지, 표정 변화도 적고 말 수도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다만 스프루언스가-내가 보기엔-감정이 메말라서 말수가 적고 뭔가 어투가 이상했던 반면, 리히는 될 수 있으면 모든 언행을 절제하려는 듯한 느낌?
일전에 세레나의 사진을 보려고, 무심코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펜던트를 꺼내버렸다. 나를 포함한 여러 명의 승조원이 눈뽕 맞고 비명을 질렀을 때도 리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직속 부하로서 내가 제일 많이 듣는 단어가 있었다.
‘확실한가?’
무슨 업무를 하든, 항상 끝내고 보고를 할 때마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하는 질문이었다.
아쉽게도 대부분 경우 난 그렇지 못했고, 진짜로 확실해질 때까지 다시 돌아가 처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엔 귀찮은 상사 만났나, 싶었지만 내가 자신 있을 정도로 일을 처리하고 보고하면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내가 진짜로 최선을 다했지만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면, 친절하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지도해주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그 결과, 과장 조금 보태자면 리히 밑에서 몇 개월 동안 항해 관련해서 배운 게 아나폴리스에서 몇 년간 배운 분량이랑 비슷할 정도였다.
역시 FDR의 최측근이자 실질적인 초대 미군 합참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아니, 그냥 아나폴리스 교육 상태가 똥통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대법관 마냥 진중하면서도 동시에 훌륭한 교사였던 그의 눈빛에 생기가 들어오고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리게 하는 주제가 두 가지 있었다.
‘귀엽지 않은가?’
‘사랑스럽군요···’
하나는 그의 아내 루이스와 이제 두 살배기 아들, 윌리엄 (William Harrington Leahy).
내가 실수로 펜던트로 섬광탄 터트렸을 때도, 나에게 조심하라고 타이르면서 동시에 자기 가족사진도 보라면서 슬쩍 내게 보여줬다. 어, 그 아가씨가 가족은 아니다만.
허, 보통 전쟁 관련 창작물에서 자기 가족사진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죽던데. 아, 뭐, 전시상황이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어차피 내가 기억하기엔 이 사람은 2차 대전 후에도 곱고 길게,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으니 별문제는 없겠지.
또 하나의 관심사는 바로 포격.
리히는···한마디로 말해서 화력덕후였다.
여러 종류의 어뢰에 관해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였으나, 그가 특히나 푹 빠져있었던 분야는 역시나 대형 함포.
안타깝게도 그 말인즉, 내 흑역사가 자꾸 파헤쳐질 수밖에 없다.
‘스마를 어떻게 격침했는지 또 들려줄 수 있겠나?’
‘···대위님, 이제 슬슬 지겹지 않으십니까?’
‘좋은 이야기는 몇 번이나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네, 호크아이.’
크흡!
이렇게 거함거포주의에 빠진 양반이라, 내가 드레드노트-아니, 피어리스급 전함을 제안한 것엔 찬사를 보냈으나, 비행기와 항공모함에 관해서는 그저 심드렁할 뿐이었다.
‘결국, 군함에 유의미한 타격을 주려면 어뢰를 사용해야 할 텐데, 그럴 바엔 차라리 잠수함을 쓰는 쪽이 좋을 텐데. 그리고 사정거리도, 화력도, 함재기가 전함의 주포를 넘을 수 있나?’
하, 이거 참. 언젠가 함재기의 가능성을 어디서 보여줘야 할 텐데 말이야.
“그래도 만약에 네가 말한 대로 함재기의 시대가 도래 한다면, 그에 대비해서 함선용 대공포도 개발해야겠군.”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너···병기국 (Bureau of Ordnance)에 들어갈 생각은 없나?”
잉?
“아무래도 뭔가 새로운 무기를 자꾸 개발하는 데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말이야. 어쩌면 그쪽이야말로 천직일지도 모르겠는 걸?”
으아악, 웃기지 마!
이 무슨 특수부대나 기갑부대에 가고 싶어서 하는 사람을 공병에 꽂아 넣는 소리냐고?! 기왕 개발국에 들어가야 한다면 항공국에나 보내줘-아차, 아직 존재하지 않지?
쿵.
없는 조직을 아예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갑자기 보스턴이 우뚝 멈췄다.
“음?”
“어어?”
뭔가 불길한 낌새를 느낀 우리 둘은 당장 갑판으로 달려 나가 밑을 내려다봤다.
“저런.”
침착한 리히와는 반대로 난 멘탈이 나가려고 했다.
아이고 시발 좌초라니?!
*****
그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대위는 만사가 따분했다.
‘젠장, 공병으로 오는 게 아니었어···’
운게른은 러일전쟁, 특히 뤼순 공방전 당시 트레차코프 대령과 콘트라첸코 중장의 대활약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자고로 남자는 당연히 기마병이나 보병으로 가야하며 샌님이나 계집애 같은 것들만 공병에 지원한다고 믿어왔던 그는, 뤼순에서 가장 활약했던 장교들이 바로 공병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공병에 지원했다.
드디어 끓어오르는 혈기를 절제하고, 머리를 쓰는 보직으로 들어가서 기뻐했던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리, 역시나 운게른의 체질엔 공병이 맞지 않았다.
복잡한 도구의 사용법과 공식 등, 너무나도 이론적이고 딱딱한 내용을 그에게 강요하는 상관들이 이젠 슬슬 혐오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이 상태로 조금만 더 있으면 동료든, 상관이든, 누군가는 두들겨 패버릴 것만 같았다.
‘뭔가···뭔가 자극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시한폭탄처럼 속으로 끙끙 앓으며, 신비함 또는 폭력을 절박하게 갈구하던 운게른에게 얼마 있지 않아 희소식이 들려왔다.
주한 러시아 공사에 근무하던 주재무관이 곧 본토로 복귀할 예정이라서, 그의 후임을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한국이라···’
그곳에서 한 청년이 일본 장군 3명을 혼자서 처치했다는 소식이 그를 러일전쟁에 뛰어들게 했었다.
게다가 애초에 일본이 이 전쟁을 일으켰던 이유 중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이 바로 그 나라의 소유권 분쟁 아니었는가.
그 말인즉, 한국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나라가 분명했다.
‘여기서 시간 낭비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굳은 결심을 한 운게른은 즉시 그에게 열려있는 모든 창구를 통해서 자신을 주재무관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천운이 따랐는지, 러일전쟁 당시의 공적이 먹혔는지, 아니면 둘 다 인지, 그의 염원은 이루어지고야 말았다.
기쁨에 벅차올라 팔팔 뛰는 운게른은 지체 없이 공병대를 떠나 한국으로 떠날 채비에 들어갔다.
한편 그 무렵,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겨울 궁전의 집무실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저 미국놈들을 어떻게 할지···”
사할린이라는 – 리 백작의 말에 의하면 – 작은 대가를 치르고 뤼순의 항구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철로를 완전히 확보하여 제국이 태평양 쪽으로 뻗어 나갈 발판을 마련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렇게 매우 흡족해하던 차르와 제국에게 미국이 갑자기 난입해 찬물을 끼얹었다.
일본이 한국에서 차지하고 있던 이권을 중재료로 받아가 한반도에 손을 뻗친 것은 물론이고, 들려오는 바에 의하면 미군을 주둔시킬 계획까지 세우는 중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대한해협 해전에서 미 해군이 의도치 않았다고는 해도 개입해준 덕분에 발트 함대와 태평양 함대는 궤멸을 피해갔으며, 포츠머스 조약도 나쁘지 않게 중재해줬다.
또 한편으로는 이미 필리핀도 손에 넣은 미국이 한국에도 군대를 파견할 계획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아시아 내 패권을 더더욱 공고히 다지려는 의도일 터.
만약 미국이 한국에서 완전히 정착하고, 그걸로는 모자라서 위로 뻗어 나가 만주까지 노린다면···?
러시아는 이미 그렇게 얕잡아보던 일본과도 1년 넘게 싸우면서 무시할 수 없는 출혈을 일으켰고, 그 때문에 원하지도 않던 개혁의 목소리도 일부나마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판국에서 극동의 패권을 두고 미국과 충돌하기라도 한다면 러시아는 그 후폭풍을 절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는 러일전쟁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우선 한국이 미국 손으로 넘어가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
‘우선 정부 수반부터 러시아에 우호적인 자들로 바꿔야겠지.’
우선 황제라는 자는 러시아 공사로 한 번 망명했었고, 그 후에도 몇 차례 요청해올 정도로 러시아 쪽으로 기울었 있다.
그렇다면 이제 총리만 남았다. 황제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성향상, 결국 미국 정부는 내각총리대신 쪽으로 접근을 해오겠지.
즉, 미국이 친미파 총리를 세우기 전에 먼저 이쪽에서 친러파 총리를 만들어야 한다.
차르는 이 목적에 너무나도 완벽하게 부합하는 어떤 자를 떠올렸고 곧바로 외무부 장관 알렉산더 이즈볼스키 (Alexander Izvolsky)에게 지시를 내렸다.
“역시 신은 러시아 제국의 편이로다!”
집무실 탁자에 있는 지구본에서 한반도를 손가락으로 찍은 차르는 본인의 책략이 참으로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로자리오 해협
“으아아아아아!”
USS 보스턴은 해협 한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마치 완두콩처럼 생긴 암초 (Pea Pod Rock)에 부딪쳐 좌초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에잇, 좌초라니! 보, 보스턴이 좌초라니!!
해군으로서의 커리어를 완전히 끝장내버릴 수 있는 사고를 저지르다니, 으헣헣헣!
내가 완전히 멘탈이 무너져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려는 반면, 리히는 전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태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어디 보자, 음, 몇 년 전에 내가 근무하던 포함(gunboat)이 필리핀에서 좌초했던 게 생각나네.”
“그-그때는 어땠습니까? 혹시, 뭐, 징계를 받았던가, 그런 일 있었습니까?!”
“딱히 문책은 없었지.”
내가 참 다행이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려고 했으나, 리히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때는 태풍이라는 자연재해 때문에 일어났고, 선체에 별다른 손상도 없었거든.”
리히는 나를 선미 쪽으로 데려가 밑을 가리켰고, 난 얼굴이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기후도 멀쩡한데, 저기 보다시피 방향타 (rudder)가 손상됐군.”
“그-그 말은···”
“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함장이 회부된다는 거지.”
“아이고, 세상에!”
아니 뭐, 아무리 내가 항해 병과라고는 해도 일개 장교후보생이 이렇게 당황할 이유가 있나 싶기도 하겠지.
하지만 문제는! 내 2년간의 장교후보생 기간이 이제 반년도 남지 않았고, 내년 2월에 소위 임관을 결정하는 복무 평가가 있을 예정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복무하는 함선이 좌초를 해버렸다.
내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보스턴에서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에서 범고래 한 쌍이 푸른 바다의 수면을 뚫고 올라와 분수공에서 물을 뿜어댄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만 지금 난 저런 아름다운 것을 감상할 기분이 아니다. 내가 필요한 건 오직 하나.
술.
술이 필요하다.
아주 많은 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