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100)
재벌집 만렙 아들-100화(100/416)
< 눈에 보이는 진심 >
할아버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나라 2인자라는 청와대 경호실장의 약속은 곧 권력의 보증수표와 다름없었다.
그가 청을 받아주겠다는 뜻을 내비쳤으니, 흔치 않은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만일 대한석유공사를 민간에 이양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태성을 먼저 떠올려 주십시오.”
“유공?”
청와대 경호실장은 묘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보았다.
“태성에 정유회사가 없어서 유공에 눈독을 들이나 보군. 하지만 또 다른 석유파동이라도 터지지 않는 한 유공을 시장에 내놓는 일이 생길까 모르겠어.”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분이야 거저 내어준다고 해도 미국 걸프사의 지분이 50%나 돼. 그걸 놈들이 쉬이 내놓으려 하겠나?”
“그러니까 말입니다.”
“결국 당장 바라는 건 딱히 없다는 소리잖아? 하하하, 좋다! 행여 유공을 민영화하면 태성이 1순위다!”
청와대 경호실장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몹시 만족스럽다는 뜻이었다.
“차 회장, 자네가 정치 욕심을 안 부리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사업 욕심까지 안 부릴 줄은 몰랐군.”
“장사치가 정치 욕심을 내서 무엇하겠습니까. 하지만 장사치인 만큼 사업 욕심은 대단한 축에 속합니다. 그러니 감히 유공을 탐내는 것이죠.”
“이 사람 참 미련하기는. 남들은 정경 유착하며 뒷주머니 차기 바쁠 때 태성은 지나치게 꼿꼿해.”
청와대 경호실장은 작게 혀를 찼다.
“태풍이 휘몰아칠 때 갈대는 휠지언정 소나무는 부러진단 사실을 명심해. 미련하게 사업에만 목매지 말고 자네도 청탁이란 걸 제대로 이용할 필요가 있단 소리야.”
“명심하겠습니다.”
“기술 개발입네, 시설 투자네 하면서 퍼붓는 돈을 떼어다 위아래로 골고루 기름칠 좀 하게. 그렇게 빡빡하게 구니 태성이 거기까지밖에 못 크는 거야.”
“유념하겠습니다.”
“뭐, 태성은 알맹이가 단단해서 나쁘지 않지. 자네가 이리 뻣뻣하게 구는데도 각하께서 태성을 내치지 않았다는 게 무슨 소리겠어? 각하께서 적당히 봐주고 계시단 거야.”
청와대 경호실장은 은근하게 귀띔해 주었다.
“사업만 잘한다고 다가 아니야. 오늘처럼만 해. 그러면 각하께서도 어여쁘게 보실 테니.”
충고도 잊지 않았다.
“태성이 각하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는 우광을 보면 알게 되겠지.”
청와대 경호실장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눈에 보이는 진심이란 게 어떤 것인지, 조만간 구경하게 될 거야.”
* * *
술자리는 끝났다.
할아버지는 룸 앞에 나와서 허리를 굽혔다.
“살펴 가십시오.”
청와대 경호실장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옆구리에 두툼한 서류 봉투를 끼운 채였다.
“후우.”
청와대 경호실장이 시야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할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정말 못 할 짓이로군. 사업가가 사업이나 잘하면 그만이지, 정경 유착 못한다고 타박받을 일인가?”
“어쩌겠습니까. 이게 현실인 것을요.”
복도에서 기다리던 김 비서가 다가왔다.
“위아래로 기름칠할 돈이면 태성 직원들 보너스나 올려주고 말지. 쯧. 안 그래도 정치자금이랍시고 왕창 뜯기는 것도 아까워 죽겠구만!”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후원금을 안 내면 사업을 못 할 텐데요.”
“거 사업하기 힘들구만!”
“어제오늘 일도 아니잖습니까. 이젠 그러려니 하실 때도 되셨습니다.”
“생살이 뜯길 때마다 아프듯 생돈도 뜯길 때마다 아픈 법이야. 아픔에 그러려니가 어딨어?”
김 비서 옆엔 고 실장도 함께였다.
“눈에 보이는 진심이라······.”
할아버지는 사과 박스가 실린 트럭의 차 키를 내밀었다.
“고 실장, 이거 장충동으로 배달해. 은밀하게. 알지?”
“예, 회장님.”
“김 비서, 자네는······.”
마침 호텔 일식 룸 로비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광화학 화재가 방화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헤드라인 뉴스였다.
할아버지와 김 비서는 동시에 눈을 돌려 뉴스에 집중했다.
-중정의 발표를 들어보겠습니다.
철구 아저씨가 단상에 올라 발표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지는 가운데 철구 아저씨는 멀끔하게 차려입고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중정은 우광화학 화재가 방화로 인해 발생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찰칵! 찰칵!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우광 계열사 우광의 권력 싸움 때문에 그런 자충수까지 둔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광 권력 싸움이란 말에 기자들의 질문 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철구 아저씨는 질문을 받는 대신 전해야 할 말만 전하기로 작심한 모양이었다.
-우광 사장들의 공범 여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방화에 개입했는지를 두고 집중 탐문할 것입니다.
-참사로 인한 희생이 많았던 만큼 중정은 외압 없는 수사, 보다 확실한 진실을 규명할 것을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리겠습니다.
철구 아저씨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단상에서 물러났다.
할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저 친구, 당장 내일이면 온갖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겠어. 스타 되겠는데? 멘트가 아주 좋아.”
“저 친구가 바로 태성에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가져온 자입니다.”
“잘됐군. 이만한 실적이라면 어디 가서도 눈총받으며 밀려날 일은 없겠지. 우광으로서는 안 된 일이지만.”
할아버지의 웃음이 씁쓸하게 변했다.
“저렇게 대국민 기자회견으로 우광화학 방화가 발표되었으니,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거다. 당장 내일 신문 기사가 우광으로 도배될 테니까.”
“그렇겠죠.”
“추락은 예정된 결과고, 과연 어디까지 박살 나느냐만 남게 되었군. 이미 저들이 물어뜯기로 작정한 모양이니······.”
할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회장님, 이만 귀가하시렵니까?”
“아니. 오늘은 마저 술잔을 기울일 생각이다.”
“축하주로군요.”
“고민 상담 신청이다. 김 비서, 시간 되나?”
“······물론입니다.”
* * *
할아버지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삼켰다.
“솔직히 말이야. 태성을 돕는 거물이 유공을 눈독 들이라 조언해줄 줄은 생각조차 못 했다. 유공? 태성이 삼키기엔 덩치가 너무 커.”
“아무리 싸게 잡아도 4억 불은 내어줘야 삼킬 수 있는 덩치긴 하죠.”
“그러니까 말이야. 태성의 계열사를 대체 몇 개나 팔아야 유공을 먹을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웃었다.
“개미가 공룡을 집어삼킨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구만. 설사 시중에 유공이 나와도 그걸 살 수 있는 기업이 대한민국에 있긴 할까 싶어.”
“그럴까요?”
“당연하지. 외국 차관을 도입해도 삼킬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4억 불이나 차관을 내어줄 만한 호구가 있을 리도 없고.”
할아버지의 웃음은 보다 진해졌다.
“덕분에 청와대 경호실장의 의심과 견제를 피해 빚만 지울 수 있었다. 태성을 도와주신 거물께 다시 한번 감사한다고 전해줘라.”
“예, 회장님.”
“김 비서, 솔직하게 말해봐. 설마 태성화학을 우광에게 서둘러 넘긴 것 또한 거물의 그림이었나?”
김 비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자네에게 우광건설 뇌물 장부로 청와대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을 구워삶으라고 귀띔해 준 거 맞지?”
김 비서는 묵묵히 술주전자를 기울여 술잔을 채웠다.
침묵이 곧 대답이 되었다.
“확실히 그자가 나보다 한 수 위야. 내 오늘 그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뇌물장부를 선물로 보낼 꾀를 어떻게 낸 것인지.”
“하지만 회장님께서도 같은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육군 보안사령관과 중정 부장의 명단을 빼라는 결정?”
“예.”
“그 역시 내가 한 수 밀렸다. 난 잔챙이밖에 남지 않은 정적 숙청 명단을 두고 이걸 선물이랍시고 건네야 하나 마나를 고민하느라 바빴어. 둘 중 누구를 숙청의 칼날 앞에 내어놓을까를 갈등했지.”
할아버지는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어느 것도 고르지 못하고 망설일 때, 그는 위험인물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이 나라의 2인자에게 태성의 미래를 약속받을 만한 빚만 지우고 요령 좋게 빠지는 샛길을 찾아냈다.”
할아버지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수완이란 말이냐. 이런 자가 태성의 총수직을 맡았다면 태성은 진즉 대한민국 1등 기업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회장님!”
“태성을 뒤에서 돕는 그 거물이 아니었다면 우리 태성은 우광의 꼴을 면치 못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할아버지가 연거푸 술을 들이켠 이유였다.
“태성이 곤란에 처했을 때 방패를 자처하며 비호해줄 세력이 얼마나 될까? 우광화학이 터지고도 우광이는 대국민 사과 발표로 끝났지만, 만일 화재가 태성화학에서 터졌다고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끔찍했겠군. 청와대로 불려간 시점에서 태성의 내리막길은 예정되었겠어.”
“회장님.”
“우광건설 뇌물 장부에 왜 청와대 경호실장과 비서실장 이름이 없었겠나? 총수인 우광이가 직접 듬뿍 먹이고 있으니, 그 동생 놈으로선 공략할 틈이 없어 지레 포기한 거다.”
“그랬을 겁니다.”
“저리 큰 사고를 내고도 총수 자리를 지켰고, 계열사조차 내놓지 않았다는 게 뭘 의미해?”
“청와대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의 비호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태성화학에서 화재가 터졌다면 아마 난 총수 자리를 잃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마 사재까지 탈탈 털렸을걸? 반은 각하께 상납했을 테고, 반은 재단을 설립해 사고 수습이나 하고 있겠지.”
할아버지가 쓴 술을 들이켰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물러난 틈을 타서 우광이라면 태성을 날로 집어삼키겠다고 작업 쳤을걸? 태성화학은 그놈이 맨입으로 쏙 빼가고도 남지.”
탁!
“총수 자리를 두고 태성을 반쪽 낼 게 분명해. 자식들끼리 서로 치고받게 만들어서 태성건설과 태성화학은 분리 독립시켰을 거야.”
태성그룹 보고서에 적힌 그대로였다.
과거엔 할아버지가 짐작한 그대로 이뤄졌었다.
“거기에서만 끝나면 다행이려고? 내 자식들 중 누군가는 죽어나갔을지도 모른다. 우광이 작심하고 나서서 윗선에 태성을 먹잇감으로 내어주려 든다면······.”
할아버지는 급하게 머리를 털어 불길한 망상을 날려버렸다.
“태성화학을 우광에 넘기겠다는 과감한 결단이 없었더라면,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그가 지하금융계의 거물들을 불러 투자금을 유치하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는 마른세수했다.
“언론을 장악한 우광을 이렇게 두들겨 팰 지경이면···, 우리 태성은 얼마나 난도질을 당할까.”
“회장님, 태성도 그리 무능하지 않습니다.”
“이건 유무능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태성엔 우광이만큼 정치질에 수완 좋은 놈이 없어서 문제야. 그게 태성의 한계이기도 하고.”
탁!
“첫째는 사람만 좋고, 둘째는 그릇이 작고, 셋째는 약삭빠르질 못해. 나조차도 정치력이 부족해서 청와대 경호실장에 한 소리를 들은 참인데, 누가 누구의 부족을 논하겠냐만은.”
그래서 나오는 한숨이었다.
“그러니 가뭄의 단비처럼 태성을 도와주는 그 수완 좋은 거물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회장님의 복이십니다.”
“왜 태성을 도왔을까?”
할아버지가 술잔만 물끄러미 보면서 상념에 잠겼다.
“태성을 왜 이유 없이 도와줄까? 바라는 것도 없이, 요구조차 하지 않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그자의 목숨을 구했어도 이리 헌신적으로 도와주진 않았을 것 같단 말이지.”
김 비서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은혜를 받았으면 응당 보답을 해야 하는 법인데. 이거 빚만 점점 쌓여가니 마음이 무겁다.”
김 비서는 종이를 한 장 품에서 꺼내 할아버지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뭔가? 또 감사 편지를 쓰라고?”
“감사 편지로 퉁치기엔 너무 큰 공이잖습니까. 그래서 이번엔 각서를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각서?”
할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 비서는 자신의 몽블랑 만년필을 꺼내 할아버지 손에 쥐여 주었다.
“방금 하셨던 그 진심, 직접 쓰십시오.”
“뭐?”
“그분은 말보다는 문서를, 눈에 보이는 진심을 더 믿으시는 분이라서 말입니다.”
“아니, 김 비서. 자네 누구 사람이야?”
“이 모두가 태성을 위한 길입니다. 두고 보면 아실 겁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를.”
김 비서는 씩 웃었다.
“제 생각이지만, 조만간 그분께서는 이 문서를 들고 회장님을 찾아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실 듯싶습니다.”
“뭐?”
“이 모두가 회장님의 복이시고, 태성의 복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쓰십시오.”
김 비서가 종이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개미가 삼키는 공룡이라는 유공과 태성화학을 비롯한 우광의 계열사가 줄줄이 태성 앞으로 떨어지게 생겼는데, 뒤에서 손가락만 빨다가 남한테 제 밥그릇을 빼앗길 만한 분이 아니거든요.”
역시나 황금빛이 휘황찬란하게 터지는 각서였다.
* * *
저승사자와의 시야 공유를 끊었다.
“아무래도 더는 숨길 수 없을 것 같군.”
나는 동전 지갑에 든 할아버지의 각서를 만지작거렸다.
“어머니의 몫으로 태성화학을 챙겨주고, 내 몫으로 유공을 챙기려면 할아버지와 직접 담판을 지어야겠지.”
나는 씩 웃었다.
“오히려 잘됐다.”
신림동 개미지옥이던 시절에도 나는 가만히 함정을 파고 앉아서 먹이가 언제 떨어지나 기다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원체 내가 짠 판도 밑 작업을 진두지휘해야 성에 차고, 남이 짠 판은 내가 직접 뒤집어엎어야 후련해하는 스타일이라서.
“이제부터는 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겠네?”
좋은데?
< 눈에 보이는 진심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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