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122)
재벌집 만렙 아들-122화(122/416)
< 뒤늦은 사과 >
나도 모르게 눈이 반짝 떠졌다.
“이것들 다 꽁으로 뜯어오셨어요?”
“그, 그것이······.”
할아버지는 눈 딱 감고 외쳤다.
“전부 꽁으로는 아니고, 크흠!”
“그럼 헐값에 받은 거겠네요. 주식으로 달라고 하시죠?”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할아버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광으로 아랫사람들 배는 두둑하게 채워줘야 하는데, 언론과 국민들의 눈이 전부 우광으로 쏠려 있는 상태잖아요.”
나는 씩 웃었다.
“우광은 이래 봬도 재계 서열 9위나 하는 기업이에요. 정권이 달라붙어 풍비박산을 내놓으면 사람들 눈엔 어찌 보이겠어요?”
“크흠. 그야 뭐······.”
“정부는 부정부패 척결이란 기치를 내세우며 깨끗한 정부를 표방하고 있어요. 그러니 대놓고 우광을 뜯어서 측근들에게 나눠줄 수는 없잖아요.”
그제야 할아버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바로 맞췄다. 주식으로 달라더구나.”
“그보다 더 깔끔하고 확실하게 눈 가리고 돈세탁할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까요.”
“요 똑똑한 녀석.”
할아버지는 헤벌쭉 웃으면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어디서 이런 영특한 녀석이 나왔을까? 이게 다 성준이 복이자, 태성의 복이다. 하하하!”
“할아버지, 저 이것 좀 볼래요.”
나는 할아버지가 꺼낸 황금빛 서류에 눈이 돌아갔다.
황금빛이 쉬지 않고 번쩍대는데, 눈이 안 돌아갈 리가 있나.
“오냐, 그래. 실컷 봐라.”
“어?”
우광조선, 우광자동차, 우광중장비, 우광화학, 우광병원, 우광제약, 우광연구소.
대충 만년필로 갈겨쓴 단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서류만 황금빛이 아니라 글자는 더 튀는 황금빛이야!’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알려줬다.
“대통령께서 직접 적어주신 것이다.”
어쩐지!
‘대통령이 친필로 휘갈긴 글자 자체가 보증수표나 다름없으니 이렇게 번쩍거렸구만!’
문득 의문이 스쳤다.
“할아버지, 그런데 왜 우광증권과 우광건설은 빠졌어요?”
“각하께서 그것과 중공업을 바꾸자 하셨다.”
그래서 자동차와 중장비가 여기 들어갔구만?
“조선이 거기 제일 먼저 들어간 건 안 궁금하고?”
“그야 할아버지라면 조선부터 달라고 하셨을 테니까요.”
“허······!”
“당연히 방산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을 어필하려면 다른 건 몰라도 조선은 꼭 언급했어야죠.”
“점쟁이가 따로 없구나. 내 속에 들어갔다 왔어도 이리 콕 짚어서 말하진 못했겠다. 아이고, 요 똘똘한 것!”
할아버지는 날 도로 번쩍 안아 들었다.
“그래, 네 말마따나 측근들 주머니를 채워주려면 두둑하게 뜯기긴 해야 할 게다. 그래도 이걸 시장에서 제값 주고 사왔을 때에 비하면 헐값이라 할 게야.”
“주식은 얼마나 내놓기로 했는데요?”
“50%. 단, 계약서에 명시된 건 그냥 먹으라 하시더구나.”
“그럼 화학과 자동차, 중장비는 전부 제 몫이란 소리죠?”
할아버지는 차마 아니란 말은 못 하고 대신 끙 소리를 내었다.
“나머지 계열사도 제 몫은 따로 챙겨주실 거죠?”
이번에도 앓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냐? 할애비를 뼛속까지 탈탈 털어먹는 게?”
“후원금 150억이요. 덕분에 주식을 바로 처분하겠다는 사람이 나오면 뒷돈 주고 사오면 되잖아요.”
“······.”
“돈으로 주식과 경영권을 살 수 있다면 사야죠.”
기업에서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주식과 경영권이다.
“애써 꽁으로 얻은 계열사 주식을 엄한 놈들이 채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먹어요.”
“정혁아, 너도 알다시피 주식으로 내놓으란 뜻은······.”
“요컨대 결국 돈세탁 때문이란 소리잖아요?”
나는 검지로 내 가슴을 콕 찔렀다.
“내가 돈세탁을 목적으로 세운 게 뭐예요?”
“투자회사!”
빙고.
“잘됐죠? 덕분에 할아버지의 걱정거리까지 하나 덜게 생겼어요.”
“내 걱정거리가 뭔 줄 알고?”
“태성의 임원과 가족들을 설득하는 일은 할아버지에게 맡겨 달라면서요?”
할아버지는 지난번에 내게 약속했다.
-가져가라, 경영권!
-가족들이랑 태성그룹 임원들을 설득하는 일은요?
-내게 맡겨라. 할애비가 그 정도도 해결해주지 못할 듯싶으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단, 안전을 위해 널 전면에 세우는 것은 허락치 못한다. 네 투자회사를 우회해서 경영권 행사해.
나는 할아버지의 팔을 끌어안으며 방긋 웃었다.
“약속대로 투자회사를 우회해서 경영권 행사할게요. 어때요? 딱이죠?”
할아버지는 말문이 턱 막힌 모양인지 입을 떡 벌렸다.
이내 나지막한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딱이다. 너무 아귀가 딱딱 맞으니 뭐라 덧붙일 말도 없구나. 그래, 재주껏 다 가져가라.”
그러더니 퍼뜩 놀라 나를 돌아보셨다.
“설마 정혁이 너, 그때 벌써 여기까지 내다본 게냐?”
솔직하게 말하면 우광증권과 우광건설을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 자동차와 중장비를 얻어먹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인 내가 어떻게 지분과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떠올린 방법인 건 맞다.
짝. 짝. 짝. 짝.
느닷없는 박수 소리에 뒤를 돌아봤더니, 김 비서가 탄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도련님께는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김 비서의 확신에 찬 표정 덕분인가.
할아버지도 무릎을 탁 쳤다.
“역시 그랬던 건가!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하하하!”
고 실장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차 키를 툭 떨어뜨렸다.
“다들 이거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까?”
“물론입니다.”
“당연한 소릴!”
고 실장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할아버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할아버지, 약속대로 태성화학은 우리 엄마 혼수로 챙겨드릴 생각이에요.”
“그래, 그래! 정혁이 네 몫이니 네 마음대로 해라. 증여를 알아봐 주랴?”
“그 말은 즉, 우리 엄마를 섭섭하게 대하신다면, 만일 태성이 아니라 다른 데 시집가신다면, 태성화학은 다른 집안에 굴러들어가게 될 거란 소리예요.”
“뭐라고?”
할아버지가 정색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냐?”
“할아버지가 여태껏 약속을 안 지키시니 별수 있나요.”
“내가 약속을 안 지킨 게 어딨어? 하다못해 네 몫으로 이리 지분까지 순순히 내어주고 있다만?”
“잊으셨어요? 우광건설 뇌물 장부의 잘린 세 장과 교환하면서 내가 내건 조건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내가 네 아비를 중동에서 데려왔고, 태성건설 주식 대신 각서도 써주지 않았더냐?”
“우리 엄마를 모욕한 걸 사과하고,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건요?”
“······.”
할아버지는 헛기침했다.
“호적정리 벌써 다 끝난 일이야. 게다가 나 또한 송년의 밤에서 너희 모자를 성준이 짝으로 공인했다만?”
“우리 엄마한테 돈 봉투 쥐여주며 아빠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일은 입 싹 닦으시려고요?”
이건 할머니가 했던 짓이고.
“아파트랑 빌딩 한 채 쥐여주면서 절 떼어놓고 재혼하라 했던 것도 모른 체하시고요?”
요건 할아버지가 했던 짓이다.
“호적정리만 하면 다예요? 말로 낸 상처도 가만히 두면 곪아서 썩어요. 평생 간다고요.”
그러니 손윗동서들이 눈에 불을 켜고 흠을 잡았겠지.
새해 첫날부터 태성의 임원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어머니를 면박 주려던 걸 내가 잊었을까 봐?
“심지어 할머니는 새해 첫날 떡국 먹는 자리에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거든요? 대놓고 괄시하고 계시잖아요.”
“아니다. 그건 사정이······!”
“그 사정을 엄마에게 설명해준 적도, 양해를 구한 적도 없는데요?”
“크흠!”
“심지어 상견례는커녕 외가에 들러 얼굴 한번 비춘 적도 없어요. 며느리로 들인다면서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드세요?”
할아버지는 날 번쩍 안아 들었다.
“그래, 사과하자! 사과해야겠다!”
그러더니 비장한 걸음으로 현관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상견례, 결혼식, 사돈댁에 인사까지! 물론 할 거다! 거 당연한 소릴! 커흐흠!”
* * *
“며늘아가야, 미안했다! 용서해다오!”
“푸흡!”
거실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던 어머니가 뿜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가 대뜸 90도로 허리를 굽혀 외쳤기 때문이었다.
“내가 네게 몹쓸 소리를 했다! 정혁이 떼어놓고 재혼하라며 부동산 건넨 것도 잘못이고.”
“아버님?”
“얼렁뚱땅 호적정리 다 끝났다며 사돈조차 내다보지 않은 것도 다 내 불찰이다!”
“그냥 제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꾸짖으세요!”
어머니는 대경실색하여 무릎부터 꿇었다.
앨범의 사진 정리를 하던 참이었는지, 폴라로이드 사진까지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제가···, 제가 대체 무슨 잘못을 얼마나 했기에 이러세요.”
“아니다! 넌 잘못한 것 없다!”
보다 못한 내가 쪼로로 달려가서 할아버지 다리에 매달렸다.
“우리 엄마 놀라잖아요! 누가 그렇게 큰소리로 윽박질러서 겁주래요?”
“아니, 난 겁주려던 게 아니라······ 크흠, 크흐흐흠!”
“진짜 이러시기에요?”
“너도 내 나이, 내 자리에 앉아보면 알게 돼!”
할아버지는 ‘사과란 걸 해본 지가 언제 적 일인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뒷목이 벌게진 채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며늘아가야.”
“······!”
어머니가 숨을 들이마셨다.
할아버지가 눈을 마주하며 처음 ‘며느리’라 불러주었다.
멈칫.
할아버지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발치에 떨어진 앨범과 수첩에 홀려 눈을 떼지 못하느라.
<정혁이 태교 수첩>, <정혁이 앨범>, <정혁이 신문 스크랩>
아무렇게나 떨어져 속이 벌어진 태교 수첩.
삐죽 튀어나온 건 초음파 사진이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쭈그려 앉아 태교수첩을 집어 들었다.
<정혁아, 너 혹시 은단과 뻥튀기를 좋아하니? 오늘 시장 아주머니한테 얻어먹었는데 맛있어서 깜짝 놀란 거 있지?>
<이상하다. 난 초코케익이랑 초코쿠키파인데, 요즘엔 왜 백설기랑 호떡이 눈에 밟히나 몰라.>
<월세가 밀려서 쫓겨났어. 생각해 보니 이틀 동안 호빵에 두유 하나밖에 못 먹었네.>
<야채 열심히 팔아서 다음엔 꼭 쌍화차 사먹을게. 계란 두 개 동동 띄워서. 그러니 오늘은 간장계란밥으로 참아줄래?>
몇 장 없는 초음파 사진에 비해 어머니의 일기는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런 게 있었나?’
나도 처음 보는 거다.
과거에 어머니를 연탄 중독으로 일찍 여의고,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갔을 땐 집 안에 남아 있는 물건이랄 게 별반 없었다.
어머니의 보석 상자에 들어있던 아버지 시계와 수첩은 물론이고 통장까지 전부 도둑맞았거든.
‘어머니와 같이 찍었던 사진이 남아있었는지 몰랐어.’
어린 날 안고 있는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진 한 장이 없어서 서러웠었는데.’
기억 속에서 점점 흐려져 가는 어머니 얼굴을 붙들고 싶어 발버둥 쳤다.
제발 꿈에서만이라도 한 번만 어머니를 만나길 간절히 바랐다.
뒷골목을 전전하던 시절 먹을 게 없어서 쓰레기통을 뒤지다 쥐약 바른 빵을 주워 먹은 적이 있었다.
속을 게워내며 정신이 아득해지던 때, 다 죽어가면서 떠올린 게 흐릿하게 눈물 젖은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아가야, 오늘 스케줄이 없으면 점심 한 끼 같이하지 않으련?”
“네?”
어머니는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만요! 금방 점심 준비해서 올릴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장이라도 봐올······.”
“됐다. 내가 사주마. 나가서 먹자.”
뜬금없는 외식 타령에 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혁이 가지고 사돈과도 연을 끊다시피 했다지? 아이 가졌을 때 먹고 싶은 음식 하나 챙겨줄 사람도 없었을 텐데. 오늘은 내가 그걸 사줄까 한다.”
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진 것도 없이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졌을 텐데, 끼니라고 제대로 챙겨 먹었겠어.”
어머니가 들고 있던 사진을 툭 떨어뜨렸다.
크리스마스트리에 걸었던,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다.
“사실 네가 처음 정혁이를 데리고 나왔을 때 말이다. 재혼하란 소리부터 할 게 아니라 정혁이를 낳고 키우느라 고생했단 소리부터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었다.”
사진 속 우리 세 식구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함께 얼굴을 맞대고 웃고 있었다.
“그깟 커피가 아니라 속 든든하게 밥부터 한 끼 거하게 먹여 보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할아버지는 말했다.
“정재계 인사들 앞에서 ‘네가 우리 성준이 짝이고, 정혁이 어미이고, 태성의 며느리다!’ 하고 공언할 게 아니라, 사돈부터 찾아뵙고 결혼시키자 설득했어야 했고.”
어머니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우광과 혼사를 파기했으면 태성화학 지분정리부터 할 게 아니라, 과거의 잘못부터 정리했어야 했는데.”
“아, 아버님.”
“정혁이 국민학교를 어디로 보낼지 묻기 전에, 네가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대학교를 다시 다닐 생각은 없는지부터 물었어야 했구나.”
할아버지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리 못났다. 허구헌 날 ‘태성은 한 식구!’라고 외치는 주제에 정작 내 식구 내 가족은 뒷전으로 미뤄뒀으니. 못난 시애비, 못난 할애비 소리를 들어도 싸다.”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묵묵하게 쓰다듬었다.
떨리는 손끝에서 고마움과 미안함이 묻어나왔다.
그래서 나도 말없이 고사리 같은 손을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에 얹었다.
토닥토닥.
내가 건네는 자그마한 격려에 할아버지는 작은 웃음으로 답했다.
내 손을 꼭 덮는 커다랗고 거친 손은 크고 따뜻했다.
“조만간 내 직접 사돈을 찾아뵙고 용서를 구하마.”
할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폴라로이드 사진을 집어 들었다.
“우리 못난 아들에게 귀한 따님을 부디 내어주십사 간청해야지.”
애틋한 눈빛이었다.
“정혁아, 할애비랑 같이 외할아버지 만나러 같이 가지 않으련?”
< 뒤늦은 사과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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