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197)
재벌집 만렙 아들-197화(197/416)
< 당돌한 여자 >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때 그 여자가 밀매왕의 하나뿐인 손녀라고?’
믿기지 않아서 다시 한번 살폈다.
말총머리, 고양이 눈매, 눈물점, 쭉쭉 뻗은 팔다리, 앙칼지고 냉기 풀풀 날리는 표정.
‘분위기부터 생김새까지. 아무리 봐도 그 여자가 맞는 것 같은데?’
밀매왕 뒤에서 고개만 빼꼼하게 내밀었던 여자애의 눈매가 대번에 치솟았다.
어릴 때도 성질머리는 여전했구만?
“뭘 봐?”
말 짧은 것도.
“이런 게 내 후견인?”
목소리와 말투, 단어 선택마저 뾰족한 게,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그 여자가 맞는 것 같다.
여자애는 밀매왕을 올려다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너무 어리잖아요.”
“나이는 문제가 안 돼.”
“후견인이라면서요?”
“그래.”
“후견인. 미성년자의 몸과 재산에 대하여 법적으로 보호하거나 대신할 책임이 있는 성인.”
여자애는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자격 미달.”
그러니까 내가 성인이 아니기에 후견인 자격이 없다는 소리네?
타당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밀매왕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이 웃었다.
“어리다고 우습게 보지 마라. 웬만한 어른 백 명보다 낫다. 네 보호자가 되기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날 돌봐줄 어른 역시 차고 넘쳐요. 따로 붙여준 아저씨들만 해도 몇이에요?”
“험악한 놈들이다. 행여 그놈들이 작정하고 널 배신하고, 강탈하고, 몰아세운다면 어떡할 테냐?”
“······.”
여자애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빛으로는 불만을 토했다.
절대로 자신을 배신할 리 없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그놈들을 안 믿는다는 소리가 아니야.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네 곁에 둘 리도 없으니.”
“그럼 쟤는 굳이 왜 붙이는데요?”
“만에 하나. 만일을 대비해서.”
여자애가 날 바라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줬고, 여자애는 콧방귀를 뀌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네까짓 게 뭔데?’라는 눈빛이었으니까.
그런 낌새를 밀매왕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재영아, 이 할아버지가 이번에 뼈저리게 깨닫는 바가 있다 하지 않더냐?”
“대마불사도 죽을 수 있다.”
“또.”
“죽음 앞에서, 탐욕 앞에서, 약자 앞에서 신의를 지키는 놈 없더라.”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를 지키는 놈이 있다면 평생을 믿고 의지할 만하다.”
“그게 내가 이 도련님께 여생을 의탁하기로 한 이유다.”
밀매왕이 흉터가 가득한, 두툼하고 큼지막한 손으로 여자애의 어깨를 턱 짚었다.
“이 할아버지가 왜 저 도련님을 네 후견인으로 두었는지, 곁에서 지켜보며 깨닫길 바란다.”
“할아버지.”
“백문이 불여일견. 결국 네가 직접 겪고 느껴야 가슴에 새길 수 있겠지.”
“······.”
밀매왕이 여자애의 어깨를 작게 토닥였다.
“재영아, 이 할아버지는 곧 미국으로 가야 한다.”
“알아요.”
“왜 널 데려가지 못한다고 했지?”
“위험한 일을 해야 하니까, 수시로 이동해야 하니까, 제대로 된 거점과 지원을 확보하기 힘드니까.”
딕션 좋게 발음 딱딱 끊어지는 이성적인 대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할아버지의 걸림돌이 될 뿐이니까.”
“재영아?”
“이해했고, 납득했고, 결심했어요.”
여자애는 밀매왕을 올려다보며 마저 답했다.
“얌전히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
“절대 만만해 보이지 않도록, 우스워 보이지 않도록, 처신 똑바로 할게요.”
“······그래.”
“그러니까 다치지 말고, 죽지 말고, 큰 뜻 이루고 돌아오세요.”
여자애는 날 똑바로 바라봤다.
한쪽 입꼬리만 삐죽 올라가 있었다.
“후견인이 나설 일 따윈 없을 테니까, 염려 놓으시고요.”
이 여자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똑 부러졌었군.
부산 국제시장 뒷골목에서 다 죽어가던 그때도 저렇게 딱딱 끊어가며 말했었지.
-그 여자···, 내가 찾아줄게.
도와달라고, 살려달라며 매달리는 대신.
여자는 당돌하게 거래를 제안했었다.
-부산 뒷골목이라면······ 내가 속속들이 꿰고 있거든.
내가 이 여자의 목숨을 구해주게 된 까닭이었다.
* * *
날씨 좋고, 햇볕 좋고, 바람은 더 좋고.
봄바람이 살랑이는 교실 맨 뒤쪽 창가 자리가 내 지정석이다.
파라라락.
슥슥슥.
탁탁탁.
오늘도 언제나처럼 수업 시간, 쉬는 시간 가릴 것 없이 열심히 결재서류를 해치웠다.
담임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지만, 바로 눈을 내려깔고 모른 척하신다.
“반장은 받아쓰기 공책 나눠주고.”
“네에.”
“틀린 문제 열 번씩 써오기. 숙제다.”
“네에.”
당연하게도 오늘도 100점.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혔다.
드르륵.
나는 받아쓰기 노트를 책상 서랍 안에 수납했다.
당연하게도 내 책상은 담임 선생님이 특별히 마련해준 것으로, 일반적인 국민학생용이 아니었다.
명패만 안 걸렸지, 회장님 집무실에서나 볼 법한 마호가니 책상에 쿠션 푹신한 바퀴 의자 세트다.
덕분에 책상 서랍에는 인주와 도장, 잉크와 스테플러 등등이 굴러다녔다.
띵동댕동~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동시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내 전용 전화 회선이 가동된 것이다.
“통화는 되도록 쉬는 시간에만. 알지?”
“물론이에요.”
내가 그 정도 상식도 없을까.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학교로 전화하지 말라고 미리 못 박아뒀다.
-도련님, 접니다. 심 사장.
“무슨 일이에요?”
-JH연구소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연구소에요? 무슨 일인데요?”
연구소에서 생길 법한 심각한 문제를 떠올려 봤다.
‘군용 전차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 위험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크다.’
전차에 장착하는 포탄이라도 실수로 떨어뜨려서 폭발했나?
40톤이 넘는 전차에 깔리기라도 했나?
그도 아니면 엔진 이상으로?
부품에 신체가 끼인다거나?
불길하고 잔인한 상상이 연달아 떠오를 때였다.
-연구원들에게도 보약을 지급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예산 좀 넉넉하게 책정해서.
“······.”
황당했다.
“그게 심각한 일이에요?”
-이보다 더 시급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이러다 송장 여럿 치우게 생겼는데요.
“······.”
-이왕이면 연구원들을 위해 구내식당도 하나 지어주셨으면 합니다.
“······.”
-빨래방도, 샤워실도, 수면실도 필요합니다. 여기가 바로 복지의 사각지대, 산재의 위험구역이었단 말입니다!
심 사장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컵라면만 먹으면서 철야 연구에 매진한댑니다. 그것도 벌써 보름 넘게! 애들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심 사장은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내었다.
-젊다고 건강에 자신하다간 큰코다칩니다. 과로사, 돌연사가 멀리 있지 않거든요. 사람 목숨이 달린 사안이잖습니까?
맞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약, 구내식당, 빨래방, 샤워실, 수면실 받고 냉온방 시설 완비, 전용 안마사 고용, 건강검진 추가할게요.”
-화끈한 복지 정책 결정, 감사합니다! 바로 추진하겠습니다.
딸각.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느새 내 주변으로 조그만 머리통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여덟 살짜리 코흘리개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정혁아, 이거 진짜로 통화 되는 거야?”
“어.”
“그럼 나 전화 한 통만.”
“장난 전화하려고?”
“헉, 어떻게 알았지?”
그야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니까.
“기각.”
“기···? 그건 무슨 말이야? 혹시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한국어.”
“에이, 한국어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혹시 정혁이가 한 말 알아들은 사람?”
“······.”
몰려든 애들 모두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딴짓했다.
큼큼, 헛기침을 하던 애들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정혁아, 너 이번 받아쓰기도 100점 맞았지?”
“그럼 벌써 23번 연속 백 점인가?”
“맞아, 맞아! 정혁이가 우리 반 일 등이야!”
“우와, 정혁이 너 진짜 대단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걸 다 세고 있었냐?”
“지금까지 받아쓰기 한 번도 안 틀린 사람은 너밖에 없을걸?”
“맞아, 맞아! 정혁이는 산수 문제도 하나도 안 틀려!”
“다른 반 일 등 중에서도 정혁이처럼 매번 100점 맞는 애는 없댔어!”
몰려든 애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아, 맞아! 하고 외쳤다.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이게 뭐 별거라고.’
국민학교 1학년 받아쓰기와 산수 문제가 어려우면 뭐 얼마나 어렵다고.
반 애들은 존경한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하면 받아쓰기를 그렇게 잘할 수 있어?”
“난 과외 받고, 매일 집에 가서 받아쓰기 미리 열 번씩 쓰는데도 자꾸 틀려!”
“정혁이는 책 많이 읽지? 책 많이 읽어야 똑똑해진댔어!”
“그럼 정혁이는 책 백 권 읽었겠다!”
평소엔 눈치만 보면서 말도 잘 못 붙이던 애들인데.
오늘은 왠지 작정한 것처럼 서른 명이 넘는 애들이 모여서 한 마디씩 외쳤다.
‘왠지 병아리 떼가 모여들어 삐약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쉬는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애들이 쉽게 떠날 것 같지도 않다.
할 수 없이 책상 서랍을 드르륵 열었다.
그걸 보고 반 애들은 또 감탄을 토했다.
“정혁이 책상만 엄청 크고 좋아!”
“정혁이한테만 전화기가 달려 있어!”
“정혁이 책상만 드르륵 서랍이야!”
“서랍만 다섯 개라고!”
“이것이 전교 일 등! 대우가 다르다니까?”
“부럽다아아!”
“멋지다아아!”
“대단하다아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뒀던 간식 봉지를 꺼냈다.
오늘 하굣길에 유치원 건물에 들러서 예린이한테 주려고 가져왔던 거다.
“딸기맛 사탕은 두당 두 알씩.”
“와아······!”
“초코바는 두당 한 개씩.”
“와아아!”
“쿠키는 사이좋게 나눠 먹어. 쉬는 시간 끝나기 전에.”
“우와아아아!”
애들이 교실이 떠나갈 듯이 환호성을 울렸다.
애들이 신이 나서 활짝 웃었다.
“정혁아, 잘 먹을게!”
“다음 반장선거에는 꼭 정혁이 널 찍겠다!”
“정혁아,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내자!”
반장과 부반장이 교탁 앞으로 나가서 배급을 시작했다.
그제야 몰려들었던 애들이 썰물처럼 물러갔다.
장난 전화나 받아쓰기 얘기는 쏙 들어간 지 오래였다.
다시금 평화로워졌나 싶을 때였다.
드르륵. 탕!
교실 뒷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옆 반 남자애가 뛰어들었다.
“엄청난 소식!”
“뭔데?”
“12반 오야붕이 바뀌었대!”
있는 집 자식들이 다닌다는 고급 사립학교에서도 서열 정리는 빠지지 않았다.
“아, 그래?”
“거기서 끝이 아니야! 12반 정리하고, 11반 휩쓸고, 지금 10반 오야붕까지 때려눕혔대!”
“뭐?”
“이 소식을 들은 9반, 8반, 7반 오야붕도 똘마니들을 잔뜩 데리고 싸움 구경을 하러 왔다는 거야!”
“어어?”
“보통 솜씨가 아니래! 퍽 치면 뻥 나가떨어지고, 짝 치면 코피가 쫙!”
애들이 간식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걔가 도대체 누군데?”
“오늘 새로 온 전학생!”
옆 반 애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여자애야!”
그 말이 불러온 파장은 컸다.
“뭐? 여자애가 3개 반을 쓸어버리고 오야붕이 됐다고?”
“그것도 전학 온 첫날부터?”
“진짜야? 장난치는 거 아니지?”
그때 우당탕탕 하고 다른 반 남자애가 달려왔다.
“엄청난 소식!”
아까 우리 반에 쳐들어온 옆 반 남자애와 비슷하게 상기된 표정, 높아진 목소리였다.
“12반의 새 오야붕이 7반, 8반, 9반, 10반, 11반 오야붕을 전부 쓰러뜨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대!”
“벌써 7반, 8반, 9반 오야붕까지 무너졌단 말이야?”
“이렇게 빨리?”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반 애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표정도 잔뜩 상기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러다가 전학생이 우리 학교 오야붕을 전부 때려눕히겠는데?”
“맞붙은 애들 전부 코피가 터져서 울음도 터졌대! 전부 보건실로 데려갔어!”
“심각한데?”
그래 봐야 X밥 싸움.
여덟 살짜리 코흘리개 어린애들 싸움이 심각해 봐야 뭐 얼마나 심각하다고.
칼부림이 나는 것도 아니고, 뼈가 부러지는 것도 아니고, 차로 들이박는 것도 아닌데.
끽해야 몇 대 얻어터지고 피 좀 보고 끝날 일이다.
나는 결재 서류나 마저 읽어 내려갔다.
“12반 오야붕이 찾고 있다는 목표가 밝혀졌어! 놀라지 마시라~ 바로 너희 반 애야!”
“뭐? 누군데?”
“차정혁.”
“······!”
반 애들이 전부 날 돌아봤다.
놀라움이 반, 걱정이 반이었다.
복도 밖에 애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싶더니, 어느새 인파가 홍해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차정혁.”
홍해처럼 갈라진 애들 사이로 말총머리를 한 여자애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고재영이었다.
< 당돌한 여자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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