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202)
재벌집 만렙 아들-202화(202/416)
< 고맙다는 말 대신 >
7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
1학년 1반 교실 뒷문을 열고 자박자박 걸어간 말총머리는 창가 맨 뒷자리에서 멈췄다.
부스럭.
메고 있던 책가방을 열어서 비닐봉투를 꺼냈다.
누가 봐도 회장님용으로 보이는 책상 위에 비닐봉투를 올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잡았다, 요놈!”
“꺄아아!”
놀란 고양이가 털을 세우듯 펄쩍 뛰었다.
나는 팔짱을 꼈다.
“고재영, 너 내 자리에서 뭐 해?”
“나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고재영은 재빨리 비닐봉투를 뒤로 숨겼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달랑달랑 꼬리처럼 흔들려서 다 보인다.
“그럼 뒤에 숨긴 건 뭔데?”
“······.”
“이번에도 핑크?”
“어, 어떻게 알았지?”
그야 요즘 매일 핑크색 물건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으니까.
“네 덕분에 우리 반 여자애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고재영이 올려놓고 간 물건들을 보고 우리 반 여자애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이거 너무 예뻐!
-요거 엄청 귀여워!
-어디서 샀어?
-어떻게 샀어?
반짝반짝한 눈으로 쉴 새 없이 삐약댄다.
쉬는 시간마다 달려와서 구경한다, 물어본다, 감탄한다, 난리가 아니다.
당장 엄마와 함께 백화점으로 달려갈 것처럼 아주 애가 닳았더라.
“나 엿 먹이겠단 뜻이라면 성공했어.”
내가 왜 이 시간에 등교했겠냐?
애들이 하루 종일 내 자리로 몰려와 어찌나 요란하게 조잘대는지.
매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귀찮아 죽겠다고.
“엿? 아냐. 난 그러려던 게 아니라······.”
“그럼 뭐 하자는 짓인데?”
“나는 그저······.”
고재영이 당황한 듯 비닐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시치미를 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게 내밀지도 못하면서.
“네가 아는 척하지 말랬으니까.”
고재영이 눈을 얌전히 내리깔았다.
“나랑 엮일 생각 없댔으니까.”
고개도 푹 숙였다.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네 말뜻 이해했고, 납득했고, 받아들였어. 그래서 귀찮게 굴지 않으려고.”
크게 결심한 듯, 고재영이 등 뒤에 숨겼던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내 목걸이, 병원에 놓고 간 거 잘 받았어. 그래서 나도 놓고 간 건데.”
비닐봉투를 열어봤다.
분홍색 공단 리본 한가운데에 커다란 분홍색 크리스털이 박혀 있는 머리핀.
여자애들이 보면 환장하게 좋아할 것 같은 물건이었다.
“난 네가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어.”
상처받았는지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그렁그렁하게 차오른 눈물이 눈에 밟혔다.
“알았다면 안 그랬을 거야. 내가 괜한 짓을 했네.”
문득 깨달았다.
지금의 고재영은 고작 여덟 살짜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무리 또래답지 않게 차분하고, 날카롭고, 어휘력이 뛰어나도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질 나쁜 장난질이 아니라 호의였군.’
나는 한숨과 함께 분홍색 머리핀을 꺼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조금 곤란했던 거야.”
“곤란?”
“난 남자잖아. 이런 걸 어떻게 하고 다녀?”
“······.”
“너라면 또 모를까.”
분홍색 머리핀을 고재영의 머리에 달아주었다.
고재영이 고개를 들어 동그래진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예쁘네.”
고재영이 멍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제 머리를 더듬는다.
분홍색 머리핀이 손끝에 닿자, 고재영이 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까 이건 네가 하고 다니면 되겠다.”
내친김에 책상 서랍을 드르륵 열었다.
그동안 고재영이 매일매일 물어다 날랐던 분홍색 물건이 한가득이었다.
보석 반지, 토끼 무늬 동전 지갑, 크리스털 왕관, 장난감 목걸이, 수첩과 메모지, 보석 연필, 학종이, 유리 상자, 지우개, 멜로디 필통.
하나같이 고심하며 골랐을 법한 물건이었다.
“내겐 딱히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까 이건 전부 돌려줄게.”
“그······!”
“대신 네 호의만 받을게. 그럼 됐지?”
“······.”
나는 미리 준비해뒀던 커다란 종이봉투에 분홍색 물건들을 싹 쓸어담았다.
“자.”
고재영은 말없이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재영은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등이 왠지 축 처져 보였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했을 거야.”
이 여자는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이 자존심이 셌다.
요령도 없는 주제에.
“선물, 고마웠다.”
고재영이 발이 우뚝 멈췄다.
“그럼 이제 우리 사이에 빚은 없는 거다?”
고재영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꽉 움켜쥔 채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교실을 나가버렸다.
* * *
고재영의 방은 온통 분홍색이었다.
벽지도, 침대도, 책상도, 의자도, 책장도, 옷장도, 카펫이나 이불, 베개까지 전부 다.
고재영은 제 키보다 더 큰 분홍색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채 침대 속에 푹 파묻혀 있었다.
똑똑똑.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밀매왕이었다.
우유 한 컵과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 한 쪽, 토끼 모양으로 깎은 사과가 담긴 쟁반을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공주님은 왜 저녁도 안 먹고 이러고 있을까?”
고재영은 토끼 인형을 더욱 꽉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밀매왕의 목소리가 퍽 부드러웠는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밀매왕이 투박한 손으로 손녀의 말총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학교에서 누가 괴롭히든? 할아버지가 흠씬 패줄까?”
“······.”
“어디 아프냐? 병원에 갈까?”
“······.”
“오늘은 격투기 수업도 빼먹었다면서. 대체 무슨 일이기에 체력 훈련도 마다해?”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밀매왕의 표정도 굳어졌다.
“심각한 상황이냐? 검찰, 경찰, 중정, 죄다 동원하랴?”
“······.”
“돈으로 매수할까? 선생들한테 돈 봉투 좀 넉넉히 찔러줘?”
“······.”
“입막음이 필요하냐? 안 그래도 남산에 묫자리 파뒀다. 파묻을 새끼가 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
“······.”
“아, 조개처럼 입 다물고 있지만 말고 얘기를 해야 알 것 아니냐. 속 터져 뒈지겠네!”
밀매왕이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지난번에는 병원에, 상처에, 찢어진 옷에! 도저히 걱정돼서 너만 두고 미국에 못 가겠다!”
“전 괜찮아요, 할아버지. 앞으로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요즘엔 애들이 찾아와서 시비 걸지 않더라고요.
괴담이 만들어질 당시 내가 쓰레기 소각장에 갇혀 있었다는 소문이 돈 이후로는 날 쓰레기 황금용 취급하면서 내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거든요.
덕분에 학교생활이 엄청 편해졌어요.
“그럼 왜 이리 궁상이야? 뭔데? 무슨 일인데?”
“할아버지, 호의만 받고 선물은 안 받겠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음?”
밀매왕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거부할 수 있을 만큼 성의가 너무 적었나 보지.”
“아······.”
“안 되면 될 때까지 처먹여야지. 물량공세에는 장사 없다.”
“아······.”
고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도로 우뚝 멈췄다.
여전히 분홍색 토끼 인형에 푹 파묻힌 채로 시무룩하게 말했다.
“하지만 걘 내 선물은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대요.”
“그게 문제였군. 재영아, 선물이란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것을 줘야 한단다. 그게 로비의 기본이야.”
“아······!”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주듯, 원하는 것을 듬뿍 찔러줘야 홀랑 넘어오는 법이다.”
“아······!”
그게 바로 밀매왕의 주특기였다.
그는 바로 이런 식으로 부산의 정재계 유력 인사들을 구워삶았다.
“부잣집 애들만 다니는 학교라더니. 취향 참 까다로운 친구인가 보구나.”
밀매왕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여자애가 할 법한 고민.
다 컸구나.
“우리 공주님이 친구에게 어떤 선물을 줬기에 관심도 없고, 필요도 없으니 호의만 받는다고 했을까?”
밀매왕의 얼굴엔 장난기 가득한 웃음꽃이 피었다.
“저기······.”
고재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밀매왕은 책상 위를 힐끔 바라보았다.
제법 비싸 보이는 분홍색 물건이 한가득이었다.
“나 하라면서 전부 돌려주더라고요.”
리본 머리핀, 보석 반지, 토끼 무늬 동전 지갑, 크리스털 왕관, 장난감 목걸이, 수첩과 메모지, 보석 연필, 학종이, 유리 상자, 지우개, 멜로디 필통 등.
여자애라면 백이면 백 다 혹할 만한 엄선된 선물 구성이었다.
밀매왕은 혹시나 하고 물었다.
“남자애냐?”
“네.”
“잘생겼냐?”
“네.”
밀매왕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핏줄이 터질 것처럼 불거졌다.
“잘생긴 놈은 얼굴값 한다고 내 누누이 일렀거늘. 뭐 얼마나 잘생겼는데?”
“잘생긴 게 얼굴값이라면 걔는 백지수표예요.”
“······!”
밀매왕의 안면이 와장창 구겨지는 것도 모르고.
고재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걔가 관심 있어 할 만한 거, 좋아하는 거, 원하는 거라면 역시······.”
고재영이 벌떡 일어났다.
눈물점까지 휘어질 정도로 활짝 짓는 눈웃음이었다.
“회사.”
매일같이 책상 위에 선물을 올려놓다가 알게 되었다.
차정혁, 그 애는 회사 일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보는 서류들이 죄다 회사에 관한 것뿐이었으니까.
“어림없다!”
밀매왕이 쌍심지를 켠 채 버럭 외쳤다.
“회사가 어디 애들 장난감이야? 한두 푼 하는 물건이야?”
밀매왕은 협탁을 탕 내리쳤다.
“듣도 보도 못한 놈에게 회사를 덥석 선물하겠다는 소리가 어떻게 나와!”
당연한 분노였다.
철딱서니 없는 소리에 뒷목을 잡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 돼! 난 절대 그런 꼴 못 본다!”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아닌데요.”
“그럼 누군데?”
“차정혁이요.”
“······어?”
고재영이 또박또박 말했다.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가 내 후견인으로 붙여준, 태성그룹 막냇손자 차정혁이라고요.”
“······걔가 걔냐? 그 백지수표가?”
“네.”
“아하.”
나찰처럼 사납게 일그러졌던 밀매왕의 표정이 도로 보살처럼 인자해졌다.
“그런 거라면 진작 말을 하지. 이 할아버지가 괜히 가슴 철렁했잖느냐.”
호탕한 웃음은 덤이었다.
“하하핫, 우리 공주님이 역시 날 닮아서 눈이 참 높단 말이야.
그놈이 잘생기긴 참 더럽게도 잘생겼더라.
웬만한 연예인은 그놈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 테니 백지수표 맞지.
‘사내놈은 원래 잘생기면 얼굴값, 못생기면 꼴값을 떠는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역시 꼴값보단 얼굴값이 나으려나?’
고재영은 침울하게 말했다.
“걔는 소중한 목걸이를 찾아줬는데, 난 제대로 된 감사 선물도 못 했어요.”
“웬만한 뇌물엔 꿈쩍도 안 할 놈이다. 회사 정도는 덥석 안겨야 눈길이라도 한번 받을 터.”
밀매왕은 흐뭇하게 웃었다.
“좋다. 어디 선물 한번 듬뿍 처먹여 보자! 그놈이 홀랑 넘어올 때까지.”
“하지만 아까 할아버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다고······.”
“어이쿠, 눈이야! 이건 흙이냐, 먼지냐? 우리 공주님이 후 불어줘야겠다.”
“후.”
“휴우. 우리 공주님 아니었으면 이 할아버지 눈알에 흙이 콕 박혔겠네?”
“할아버지도 참.”
손녀의 말총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사뭇 부드러웠다.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럼 할아버지랑 같이 어떤 회사를 선물하면 좋을지 찬찬히 살펴볼까?”
“정말요?”
“그럼. 안 그래도 부산에 있던 재산 정리한 돈을 어디다 투자할지 따져보고 있었다.”
현금 부자였던 밀매왕은 사채 대신 주식 투자로 재산을 불려왔다.
재계 서열 7위인 국천그룹의 대주주인 것은 새 발의 피.
들으면 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 대기업 주식이라면 골고루 왕창 쓸어담아둔 후였다.
“서울로 진출한 김에 우리 공주님이랑 즐거운 투자 쇼핑 좀 해보자!”
밀매왕이 성큼성큼 걸어가 방문을 벌컥 열자, 문에 귀를 대고 있던 험상궂은 남자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밀매왕은 크게 외쳤다.
“들었으면 당장 가서 인수할 회사 목록부터 가져 와!”
“예!”
“JH에서 좋아할 만한 곳으로 골라서! 태성이 관심 두는 분야를 우선으로!”
“예!”
“JH 직원들 통해서 애로사항 좀 알아봐! 꼭 필요한 회사가 있는지부터 물어보고!”
“예!”
몸놀림이 재빠른 놈들이니만큼 투자 목록을 잽싸게 가져왔다.
밀매왕이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아직까진 그놈보다 이 할아버지가 최고지?”
“당연하죠!”
분홍색 토끼 인형을 내팽개치면서 고재영이 활짝 웃었다.
밀매왕은 신신당부했다.
“회사를 줘도 전부는 못 준다. 네 몫으로 반 이상은 챙겨들고 있어. 알았지?”
“네.”
“아무리 사탕발림해도 절대로 홀랑 다 내어주면 안 된다. 그게 네 힘이야. 명심해라.”
“네.”
“에구, 착한 것.”
우리 공주님은 남자 보는 눈도 높은데, 말까지 잘 들어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이 이쁜 것을 시집보낼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아까워 죽을······.
밀매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놈한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아이고, 조상님, 감사합니다, 하고 만세를 불러야 할 일이지.’
그놈 어린 나이에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배짱과 수완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 굴리는 거나 일 처리 깔끔한 것까지 완벽하다.
밀매왕이 직접 보고, 겪고, 느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놈 젊은 나이에 크게 이름을 떨칠 놈이야. 장차 한국을 쥐었다 폈다 할 거물이 될 게야.’
밀매왕은 제 눈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 눈으로 돈 될 만한 물건을 점찍어 밀수로 크게 일어섰다.
이 눈으로 돈 되는 어종을 찾아 한국 수산물 시장을 장악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될성부른 기업에 투자해 재산을 불렸다.
‘인재에 투자한 게 가장 큰 이문을 남겨왔다. 그런 의미에서 내 생에 이보다 더 큰 투자는 다시 없을 것이다.’
밀매왕이 야망을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할아버지, 전 이게 좋을 것 같아요.”
고재영이 고른 회사는 ‘최고반도체’였다.
< 고맙다는 말 대신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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