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211)
재벌집 만렙 아들-211화(211/416)
< 거창한 이유 >
밀매왕은 웃었다.
“결혼. 어떻습니까?”
“거절할게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밀매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 은근하게 추파를 던졌다.
“이해합니다. 여덟 살, 부모의 동의를 받아도 혼인이 성립되지 않는 나이가 문제겠지요.”
물론 그것도 문제다.
거절의 이유를 꼽자면 두 손이 모자랄 테지만.
이미 결론은 정해진 마당에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 따윈 없었다.
“하하하, 듣자 하니 재벌가에서는 다들 일찍부터 혼인 동맹을 맺는다면서요?”
밀매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다들 그렇게 삽니다.”
보통 고집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설득하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진다.
이미 정해진 결론을 두고 실랑이할 생각도 없었다.
“결혼할 여자가 있어요.”
“······예?”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었다는 듯.
밀매왕은 잠시 벙찐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나는 두 손 모아 꾸벅 배꼽 인사 했다.
정중한 거절이었다.
“하하하. 재벌가는 역시 빠르군요. 벌써부터 정략결혼이 예정되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만.”
밀매왕은 당혹스러움을 호탕한 웃음으로 덮었다.
“그렇다면 얘기가 더 빠르겠군요. 파혼의 대가는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그 또한 거절할게요. 파혼할 생각 없거든요.”
“그쪽 집안은 어떻게 됩니까?”
“무당 집안인데요.”
“······예?”
밀매왕은 이번에도 말문이 막힌 듯.
아까보다 더 바보처럼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어색한 웃음이 흘렀다.
“차 회장님께서 미치지 않고서야 굳이······.”
“할아버지가 정한 게 아니라 제가 정한 거예요.”
“······예?”
벌써 세 번째였다.
밀매왕답지 않게 몹시 당황해서 외쳤다.
“도련님께선 이제 고작 여덟 살이십니다! 벌써부터 스스로 짝을 논하기엔 너무 이른······!”
“그건 문제가 안 돼요.”
“······.”
“까짓것 제가 감당하죠. 남들 다 그렇게 산다면서요.”
밀매왕은 말문이 턱 막힌 듯 입술만 금붕어처럼 뻐끔댔다.
하지만 빠르게 정신을 되찾았다.
“도련님, 재벌가의 결혼은 막강한 우군을 얻어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힘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 기회를 이렇게 허투루 날려버리는 건 어리석은······!”
“그래서예요. 단 한 번뿐인 기회를 허투루 날리고 싶지 않아서.”
사람이 태어나서 맺는 가장 끈끈한 인연이 셋 있는데, 그걸 우린 천륜이라고 부른다.
부모와의 인연, 부부와의 인연, 자식과의 인연.
그중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연은 오직 하나. 배우자뿐이다.
“재벌가에 태어난 이상 도련님의 뜻대로 흘러가긴 어려울 겁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지킬 것도 많거든요.”
“제가 그 정도도 감당 못 할까 봐요?”
“······.”
밀매왕은 최고반도체 인수 보고서와 지분이 담긴 서류 봉투를 억지로 내 손에 쥐여주었다.
“지분이 부족해서 그러십니까? 그럼 더 얹어드리죠. 50%.”
“거절할게요.”
한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이었다.
“원하시는 회사가 따로 있으십니까? 그럼 그것도 얹어드리겠습니다. 고르기만 하십시오.”
“거절할게요.”
“회사가 아니라 다른 요구가 있다면 부담 갖지 말고 말씀만 해보십시오. 무엇이든 구해다······.”
“거절할게요.”
나는 웃었다.
“전 결혼 장사할 생각 없거든요.”
“도련님.”
“그러니 억만금을 더 얹는다고 해도 대답은 같을 거예요.”
나는 최고반도체 인수 보고서와 지분을 밀매왕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밀매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더욱 다급해졌다.
“결혼이 부담스럽다면 약혼이라도 좋습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시간을 두고 결정하시죠.”
“거절할게요.”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설득하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그쪽 집안과 정리하는 일 또한 제가 맡겠습니다.”
“거절할게요.”
“뒤탈 없게, 후환 없게, 귀찮은 일 없게, 잡음 생길 일 없게, 완벽하고 확실하게 처리해놓겠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매왕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나는 확실하게 못 박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생각은 접으시는 게 좋겠네요.”
내 눈빛도 밀매왕의 것만큼이나 싸늘해졌다.
“내 사람을 건들면 받은 것 이상으로 되돌려줄 작정이거든요. 고재영에게.”
내 인생에 여자는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내생에서도 그녀 하나면 족하다.
밀매왕은 착잡한 표정으로 돌려받은 종이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억만금을 얹어줘도 마다하는 이유라면······.”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예린이가 떠올랐다.
반지하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던 안쓰러운 뒷모습이,
없는 살림에 외식이랍시고 데려갔던 짜장면 하나에도 피어나던 작은 기쁨이,
아침밥을 함께 먹다 충동적으로 툭 던진 결혼하자, 한 마디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활짝 웃던 미소가 눈에 선했다.
“행복하고 싶어서.”
그 시절의 나도 떠올랐다.
반지는 이따 줄게, 하고 도망치듯 나와 하루 종일 금은방을 뒤지느라 땀을 빼던 초조함이,
실반지와 꽃다발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귀가하던 그날 밤, 엉망으로 헤집어진 집 안과 연기처럼 증발해버린 내 여자의 빈자리가,
미친놈처럼 눈이 뒤집혀서 사방을 뒤져대던 내 절망이 시리도록 끔찍하게 선명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지난날의 뼈저린 후회가 떠올랐다.
셀 수 없이 되뇌이던 만약이란 단어와,
수많은 밤을 술로 지새우던 그리움과,
활활 타오르던 삼청동 한옥 전각을 두고 등 돌리며 떨구던 병신 같던 눈물이,
장례식장을 나오던 날 넋이 나간 것처럼 질질 끌리던 발걸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었다.
“책임을 다하고 싶어서.”
딸은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삼청동 처마 밑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듣던 소소한 이야기들이,
늘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오물오물 삼켜내던 작은 입술이,
내 화상 흉터를 어루만지던 작고 조심스러운 마음 씀씀이가,
어머니를 잊지 않고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줘서 고맙다며 내 손을 잡고 쏟아내던 눈물이 눈에 밟혔다.
“거창한 이유죠? 그래서 타협이 안 되네요.”
나는 밀매왕의 손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내 작은 손으로는 덮을 수 없을 만큼 크고 거칠고 투박하고 단단한 손이었다.
“고재영도 그 애만의 거창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어대던 최고반도체 인수 보고서와 지분이 담긴 서류 봉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애를 목숨처럼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서.”
밀매왕의 눈동자만큼이나 격렬한 떨림이었다.
“주는 것 이상으로 돌아오는 행복이 기적처럼 느껴질 만큼.”
꾹 다문 밀매왕의 입술마저도 작게 파르르 떨렸지만.
“고재영도 행복해야죠. 천륜을 고를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까요.”
고재영은 여의주의 사주를 타고났대요.
그래서 그 애는 뭇 남자들의 탐욕과 관심을 받을 거래요.
어떤 집안에 들어가도 가보처럼 모셔지며 예쁨받을 거랍니다.
“고재영이 스스로 천륜을 결정할 때까지, 성인이 될 때까지 시간은 충분해요.”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다.
“그때까지 제가 곁에서 지켜줄게요.”
처음부터 밀매왕이 원하는 바는 하나였다.
재산 포함 고재영의 신병 안전 일체에 관한 책임.
“최고반도체 경영권, 인사권, 지분? 까짓것 안 받아도 그만이에요.”
어차피 처음부터 내 몫이 아니었다.
“반도체? 그냥 하나 만들어 키우면 돼요.”
반도체 사업은 아직 다른 재벌기업들은 눈조차 돌리지 못한 시장이다.
80년대를 주름잡는 일본 반도체 기업들마저 향후의 결과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시절이다.
공략할 틈은 차고 넘치고, 준비할 시간 또한 많고 많았다.
나는 씩 웃었다.
“제가 그 정도 능력은 되거든요.”
이래 봬도 내가 재벌3세거든.
딸린 계열사만 8개!
담보 잡힐 수 있는 땅만 18만 평!
“전문 경영인? 인사권? 지분? 내가 다 먹을 테니까 일이 참 심플해지겠죠? 복잡하게 심력 소모할 필요도 없겠네요.”
밀매왕이 복잡한 표정으로 나와 손에 쥔 것을 돌아보았다.
야심 차게 준비했을 미끼가 처참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차라리 그 지분 30%, 퇴직금이라며 최측근들에게 1%씩 나눠주는 건 어때요?”
“이걸······?”
“견물생심이라고 했잖아요. 보나 마나 조금이라도 더 먹겠다고 개싸움 날 걸요?”
“······!”
먹음직한 먹잇감에 하이에나 떼가 혈안이 되어 달려들 것이다.
“불붙은 탐욕에 바람 집어넣는 건 큰 수고도 안 들어요.”
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욕심 많은 놈들을 상잔시킬 수도 있고요.”
“······!”
“흔적도 없이 회사를 공중분해하고, 조직을 와해시키는 건 일도 아니죠.”
“······!”
밀매왕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개싸움이 벌어지면 충신과 간신이 극명하게 갈려요.”
“허······!”
“그럼 알게 되겠죠. 누구를 고재영의 곁에 남겨둘지.”
나는 씩 웃었다.
“그러면 숙청의 칼을 휘두를 자격이나 명분 따질 필요도 없겠네요.”
음, 어차피 말아먹을 회사라면 꼭 반도체 회사일 필요도 없겠군.
“페이퍼 컴퍼니 몇 개 만들어서 던져두고 싸우는 놈들을 죄다 엮어 싸그리 감옥에 집어넣는 것도 좋고요.”
“······!”
“한번 겪어보셨으니 아시겠죠? 공권력의 대재앙.”
“······!”
밀매왕의 손아귀에서 서류가 우악스럽게 구겨졌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나는 밀매왕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조용히 입 다물고 기다려주기로 했다.
호로록.
이 집 쌍화차 참 괜찮네.
계란 노른자가 유독 고소한 게 유정란을 띄웠나?
“최고반도체의 경영권이나 인사권, 지분도 마다한다면······.”
짧은 시간 퍽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밀매왕이 물었다.
“그럼 전 이 싸움의 수고비로 무엇을 내놓아야 합니까?”
“아무것도.”
“······예?”
“필요 없어요. 그까짓 것 공짜로 해줄게요.”
밀매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세상에 공짜란 없습니다. 차라리 바가지를 왕창 씌우는 거라면 모를까······.”
“손녀의 안전을 두고 능력껏, 재주껏, 요령껏 흥정해서 뭐 하시려고요?”
“하아······.”
밀매왕이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귀찮은 싸움에 휘말리는 게 탐탁지 않아서 거절하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됐어요.”
우리가 오해로 갈라서기 전까지.
그 여자는 내 인생에 다시없을, 눈빛만 봐도 뜻이 통하는 지기이자 환상의 파트너였다.
“친구 하죠 뭐.”
우리는 서로의 목숨을 한 번씩 구해준 바 있었다.
함께 쌓아올렸던 시간이 그 정도 의리는 남겼다.
“하이에나들에게 둘러싸여 혼자 남겨질 여덟 살짜리 여자애를 수수방관하는 것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거든요.”
밀매왕이 왜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가.
“난 내 식구들 나 몰라라 할 생각 없어요.”
“도련님······.”
“할아버지 앞에서 내 사람임을 인정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내 식구의 일이기도 해요.”
밀매왕이 내 식구임을 자처하며 내 일을 돕겠다고 나섰으니, 나 역시 그에 맞게 대우해줘야 하는 법이다.
다른 건 몰라도 태성의 미국 유통망을 뚫는 일엔 상응하는 보답을 돌려주어야겠지.
‘고재영에게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빚도 하나 있으니까.’
그녀가 죽은 뒤 몇 년이나 지나서였을까.
어느 늦은 겨울밤, 담당 변호사라던 남자가 유언장을 움켜쥐고 날 찾아왔었다.
-실은 그녀가 당신 앞으로 남긴 게 있습니다!
그는 사색이 된 채 무릎부터 꿇었다.
-지금껏 숨겨서 죄송합니다. 부디 이, 이것을······!
그는 떨리는 손으로 꾸깃꾸깃 구겨진 유언장을 내밀었다.
-이것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필체였다.
<내가 죽으면 차정혁에게 재산 일체를 넘기겠어요.>
재산 목록이 빼곡했다.
투자했던 기업의 지분, 부산 노른자 땅에 사둔 부동산, 선박과 창고까지.
솔직히 처음엔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위조된 유언장으로 판 함정이 아닌가 싶었다.
-나더러 불구대천의 원수라던데. 그런 내 앞으로 재산을 남길 리가 있나.
-그녀는 속았던 겁니다. 믿고 따르던 최측근들에게. 죽을 때까지.
-그렇다면 대답해 봐라.
나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그 변호사에게 뭐라고 되물었던가.
-왜 해운왕의 재산 목록을 내게 가져온 거지?
분명 우리의 인연은 그때 끝났을 텐데.
이제 와 알아봤자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쓸데없는 호기심이자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절 책임지고 보호하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그럼 다 불겠습니다!
-좋다.
부산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전쟁을 선포하게 된 계기였다.
무려 칠 년에 걸친 대전쟁이었다.
나는 이겼고,
그녀를 기만했던 배신자를 내 손으로 처단했고,
그녀가 내게 남겼던 것을 모조리 되찾아왔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 지하금융계의 다섯 거물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가져가십시오.”
다시 한번 내 손에 구깃구깃한 최고반도체 인수 보고서와 지분을 쥐여주면서.
밀매왕은 웃었다.
“이제야 마음 놓고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환한 웃음이었다.
< 거창한 이유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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