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284)
재벌집 만렙 아들-284화(284/416)
< 이장님 댁 외손자 >
나는 작게 감탄했다.
‘이 정도로 고래 등 같은 양반집이었을 줄이야.’
어째 이곳은 세월이 비껴간 것처럼 잘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 어머니 집안 걱정은 괜히 한 듯하군.’
나는 뿌듯하게 차오르는 미소를 입꼬리에 걸었다.
‘이만하면 다른 큰어머니들 친정과 견줘도 뒤지지 않겠는데?’
다른 큰어머니들이 대한민국에서 제법 알 만한 집 딸들이라서 그런지.
우리 어머니를 처음 소개할 때 은근한 비웃음과 멸시가 쏟아졌었다.
그게 영 마뜩지 않았지만, 어머니 집안까지는 내가 어찌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막연하게 아쉬워했었는데.
인제 보니 앞으로는 그런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다.
“도련님!”
막 외가의 대문을 두드리려고 할 때 옆집 대문이 먼저 열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주방장님!”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태성호텔에 출장 뷔페를 부탁했는데.
일식팀과 한식팀, 양식팀이 전부 동원되었을 줄은 몰랐다.
“마을 잔치를 성대하게 준비하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떨어졌거든요.”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시원한 사이다라도 한잔 드릴까요?”
과거 철구 아저씨가 내리 다섯 끼를 굶었다는 소리에 열의를 불태우며 음식을 만들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손님 맞이할 준비는 이미 다 끝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앞마당에 천막을 크게 쳐놓고 돗자리를 잔뜩 깔았다.
6인용 잔칫상마다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놨다.
“지금쯤 온 동네가 들썩들썩해야 할 때인데, 왜 이렇게 조용하죠?”
“다들 밭에 나가 일하느라 한창 바쁜가 보더라고요.”
태성호텔 주방장은 씩 웃었다.
“농번기라나 뭐라나. 하하하, 추수철이 아닌데 이렇게까지 바쁠 일인가 싶긴 합니다만.”
“농촌은 원래 1년 중 사계절이 농번기거든요.”
제일 한가하다는 겨울마저 바쁘다!
농기구를 손질하고, 지력을 올리기 위해 비료나 퇴비를 뿌리거나, 과수를 정정해야 하니까.
“새참 나갔어요?”
“물론입니다. 마을 잔치를 연다고 크게 홍보할 절호의 기회인데, 그걸 놓칠 수야 있나요.”
“머릿고기와 파전에 막걸리 한 주전자씩 돌리면서 전단지까지 같이 돌렸습니다.”
태성호텔 주방장이 의기양양하게 전단지를 내밀었다.
“도련님이 직접 주문하신 거라면서요?”
“아주 근사하게 잘 나왔지요?”
“보고 감탄했다니까요? 백 점 만점에 백 점!”
태성호텔 주방장은 엄지를 들어 올렸다.
“눈에 쏙 들어오는 폰트에, 자극적인 문구와 먹음직스러운 요리 사진까지.”
“‘전단지 광고는 이렇게 하는 거다!’를 보여주는 표본이랄까요?”
왕년에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제법 많이 돌렸거든요.
그때 지겹도록 나눠주던 게 바로 가지각색 음식점 홍보 전단지였다.
“도착하자마자 집집마다 전단지를 돌렸으니까 오늘 이 집에서 마을 잔치가 열리는 걸 모르는 집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농촌은 소문이 어마어마하게 빨리 퍼지거든요.”
그야 오프라인 커뮤니티가 잘 발달했으니까.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안다는 소리가 괜히 나오겠어.
“좋아요. 태성화학에서 준비한 답례품 세트는요?”
“라벨 제대로 박아서 곱게 포장해 저기 대문간에 쌓아 놨습니다.”
잔치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줄 요량으로.
“태성중장비에서 주문한 농기계들은요?”
내가 외할아버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비장의 무기였다.
딸만 둘인 땅부자 농사꾼에겐 늘 일손이 부족할 테니까.
“분명 농기계들을 대놓고 자랑할 수 있도록 집 앞에 줄줄이 세워두어야 한다고 배달 기사에게 신신당부했는데요.”
“그거라면 부회장님이 직접 몰고 밭으로 가셨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직접?
“새벽부터 예초기로 논두렁의 잡초를 베어내다가 급히 돌아오셔서는······.”
아버지, 풀 베러 새벽부터 달려오셨구나.
“막 이것저것 죄다 끌고 가시더라고요.”
“그걸 전부 다?”
트랙터, 경운기, 콤바인, 이앙기, 바인더, 관리기, 굴착기, 파종기, 로더까지.
태성중장비에서 생산하는 농기계라면 가리지 않고 종류별로 골고루 보내드렸다.
외할아버지의 눈길을 잡아 끌었으면 하고.
“어떤 기계가 어디에 쓰일지는 부회장님도 모르신다고 하셔서요.”
“······.”
그야 우리 아버지는 평생 농사일이라고는 지어본 적 없으실 테니까.
게다가 회사도 건설만 맡으셨기에 농기계는 문외한에 가까우시고.
나는 이마를 턱 짚었다.
‘잘 모르는 농기계를 마구잡이로 굴리다가 사고 나면 안 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농기계 전문 판매원을 대동하고 올 걸 그랬나?
“어쨌거나 우리 아빠랑 엄마 할 것 없이 다 밭에 나가 계시단 거죠?”
“그럴 겁니다. 이제 슬슬 점심때니 슬슬 돌아오실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가하게 여기에서 기다릴 생각 없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 뵈어야지!’
그렇게 대문을 박차고 나갔을 때였다.
마을 어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앉은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밀집모자와 목에 건 물수건, 몸빼바지와 흙 묻은 장화까지.
누가 봐도 밭일을 하다 쉬는 사람들이었다.
‘혹시 저 중에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계실까?’
나는 쪼로로 달려가서 두 손 모아 꾸벅 배꼽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너 정말 깜찍하게 생겼다.”
“못 보던 앤데, 어디서 왔어?”
나는 방긋 웃었다.
“서울에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뵈러 왔어요.”
“더운데 여기 앉아라. 사탕 먹을래?”
“감사합니다.”
나는 먼저 내민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사내지.
사탕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냉큼 받아 챙겼다.
대신 챙겨온 전단지를 은근슬쩍 내밀었다.
“제가 이 집 애거든요.”
“어머, 네가 이장님 댁 옆집 애였어?”
“거기 8년 전인가 주인 바뀌었다더니!”
그 집 주인이 저희 아버지가 맞긴 합니다만.
일단 제가 이장님 댁 손자거든요.
하지만 내가 확실하게 신분을 정정하기 전에, 이미 마을 어르신들이 전단지를 보며 지대한 관심을 보이느라 바빴다.
“그러고 보니 이장님댁 큰 사위가 될 사람 말이야.”
“거 얼굴은 멀쩡하게 잘생긴 친구가 매번 사고를 아주 거하게 치더란 말이지.”
우리 아버지 얘기에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논두렁에 길 만들라고 잡초 베라고 해놨더니, 트랙터로 싹 다 밀어버렸대.”
“아이고, 이걸 어쩌면 좋아! 거기 옥수수밭은 이제 수확만 남았을 텐데!”
“일 년 농사 망친 걸 보고 이장님은 오늘도 뒷목 잡고 넘어가시더라.”
이런.
우리 아버지가 오늘 사고를 제대로 치셨나 보다.
“전에는 고추밭에 농약 치라고 보내놨더니, 오이밭에 농약 쳐서 오이 농사까지 망쳐놓더니만.”
“잡초 뽑으라고 일 시켜놨더니 딸기까지 다 뽑아서 내년 딸기 농사도 망했다더라고.”
“돌 골라놓으랬더니 하필 배수로에 쌓아둬서 지난번 장마에 이장님 댁 밭만 홍수 났었잖아.”
“덕분에 상추 농사랑 깻잎 농사도 말아먹어서 이장님이 한 이틀 앓아누우셨다지.”
마을 사람들은 혀를 찼다.
“그 집 큰사위 못 쓰겠네.”
“그 집 둘째 딸은 시집도 못 보낼 처지인데. 이 노릇을 어쩌면 좋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장님 댁 큰딸이 그렇게 예쁘고 참했잖아요.”
“그럼. 아들 가진 집 중에 그 집 딸을 탐내지 않던 집이 없었지.”
“워낙 똑똑하긴 했어요. 한국대학교에 수석으로 들어갔을 정도니 말 다 했죠.”
“다들 딸은 시집이나 잘 보내면 그만이라고, 공부시켜서 뭐 할 거냐고 뜯어말렸을 때도, 이장님만큼은 귀 딱 막고 물심양면으로 큰딸 공부 뒷바라지를 하시더니만.”
우리 어머니 얘기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장님이 큰딸 대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고 엄청 우셨지?”
“오죽하면 가문의 영광이라며 옆 마을까지 현수막을 내걸고 마을 잔치를 벌이셨겠어.”
“그랬던 큰딸이 반년 만에 미혼모가 되어서 집을 나갔으니.”
“그때 한 삼 년인가. 이장님이 큰딸 찾겠다고 농사일까지 내팽개치고 전국을 떠돌았잖아요.”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결혼도 안 한 처녀를 임신시키고 나 몰라라 도망갔던 빌어먹을 작자가 저 양반이었단 말이야?”
“그렇대요. 뻔뻔하게 8년 만에 찾아와서는 따님을 달라고 주말마다 달려온대요.”
“이런 망할 놈! 내 이 자식을 그냥······!”
“아이고, 김씨! 진정해!”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씩씩대는 아저씨를 붙들어 말렸다.
“그래도 그 양반, 사람은 진중하니 썩 괜찮아 보였어!”
“말수도 별로 없고, 아부도 영 못하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일은 참 열심히 한다대?”
“이장님이 석 달이나 두들겨 패서 쫓아냈는데도, 주말만 되면 새벽같이 달려와서 밭일만 거들다가 돌아간다잖아.”
“아, 그러면 밭일이라도 잘해서 점수를 왕창 따든가!”
소매를 걷던 김씨 아저씨는 버럭했다.
“손대는 족족 농사를 망쳐놓고, 번번이 이장님 혈압만 올리다 쫓겨난다며!”
“그래도 결혼 허락을 받겠다며 마을 잔치까지 여는 것을 보면 진심이지 않겠어요? 듣자 하니 태성그룹 부회장이라던데요.”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김씨 아저씨는 콧방귀를 뀌었다.
“반년 동안 태성그룹의 태 자도 안 꺼내던 사람이야. 인제 와서 갑자기 재벌집 막내아들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럴수록 김씨 아저씨의 목소리는 커졌다.
“진짜 재벌집 아들이었으면 결혼 허락받을 때 명함부터 꺼냈을 거 아냐. 누가 미쳤다고 무릎 꿇고 두들겨 맞다가 쫓겨나나?”
우리 아버지, 호구조사도 못 받으셨는데, 명함까지 안 꺼내셨구나.
“여기 국회의원이랑 고위 관료들이 버선발로 마중 나와서 손바닥을 파리처럼 싹싹 비벼댔을걸?”
어떤 아줌마가 은근슬쩍 말을 보탰다.
“그러고 보니 이장님 댁 큰딸이 그동안 시장에서 좌판 펴놓고 야채 팔며 살았대요.”
“세상에. 한국대 수석으로 들어간 딸이 어쩌다가 시장에서······.”
“그 집 큰사위가 8년 만에 나타나서 싹싹 비는 것도 결국 이장님 댁 땅을 노리고 들러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설마 사기꾼이라거나······.”
아니, 지금 누구더러 사기꾼이래?
내가 발끈해서 입을 열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똑같은 소리가 기차 화통처럼 터져 나왔다.
“지금 누구더러 사기꾼이래?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서 허튼소리를 퍼뜨려!”
빗자루를 휘두르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이장님!”
이장님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홱 돌아갔다.
밀집모자에 목에 건 물수건, 청바지에 꽃무늬 남방을 입고 있는 50대 남자였다.
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복장을 입고 있는데, 혼자만 독보적인 비주얼을 자랑하셨다.
나는 발끈하려던 것도 잊고, 작게 감탄하고 말았다.
‘와, 외할아버지에게서 우리 어머니 얼굴이 보인다.’
신기했다.
우리 어머니는 상당한 미인이신데.
우리 외할아버지도 상당한 미남이셨다.
하지만 못생긴 김씨 아저씨는 입꼬리를 재수 없게 씰룩거렸다.
“태성그룹 부회장? 거긴 자리 빈 지 오래됐다면서요. 솔직히 증거도 없고.”
“증거? 현수막 못 봤어? 명함이라도 보여줘야 믿겠어?”
“그까짓 것들 돈 주면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거.”
“트랙터부터 농기계 줄줄이 새로 사 온 건? 태성호텔 출장 뷔페 부른 건?”
“다 돈 주고 빌려쓸 수 있는 거.”
“이익!”
외할아버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난 딴 놈 말은 못 믿어도 내 딸 말은 믿어! 내 딸이 태성그룹 부회장이라고 했으면 부회장인 거야!”
“물론이죠. 우리 어머니는 거짓말 안 해요.”
나는 내 가슴팍을 콕 짚었다.
“제가 태성그룹 막냇손자거든요.”
“뭐?”
“할아버지가 태성그룹 총수, 아버지가 태성그룹 부회장.”
“······!”
어른들이 놀란 눈으로 날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장님 댁 외손자이기도 해요.”
“뭐?”
마을 사람들은 다들 입을 떡 벌렸다.
놀람과 당혹스러움으로 점철된 눈알이 또르르 굴렀다.
그건 외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뭐?”
< 이장님 댁 외손자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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