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292)
재벌집 만렙 아들-292화(292/416)
< 돌고 돌아 천생연분 >
외할아버지는 눈이 동그래지셨다.
“맞아! 그 녀석은 정씨 성을 쓴다!”
혹시나 하고 물어봤지만, 역시나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이거 정말 황당하구만.
물론 지금 황당해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누?”
그러게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저도 여기서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그 친구분의 집안이 한국에서도 사채업으로 아주 유명한 거 맞죠?”
“그래. 그렇다더구나.”
외할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혁이 너, 혹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한테 들은 거 아니고요.”
“그렇다면 역시······.”
“외할아버지 뒷조사를 한 것도 아닌데요.”
“그럼 설마······.”
“물론 무당도 아니에요.”
“아니, 그럼 대체 그걸 무슨 수로 때려 맞혀?”
“친가에서 들은 말이 좀 있어서요.”
“친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정씨 집안 얘기만 나오면 쉬쉬하더라고요.
그 속사정이 너무 궁금해서 제가 직접 할머니께 물어봤습니다.
“아, 태성그룹도 그 친구한테 사채를 빌려 썼나?”
“아마도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우리 할머니도 정씨 성을 쓰세요. 친정에서 사채업을 아주 크게 하시고요.”
“오.”
“태성이 계열사를 확장할 때 자금이 많이 부족했대요. 그래서 할머니 친정에서 자금을 대고 태성그룹의 지분을 가져가기로 했대요.”
“그랬구나.”
“할머니 친정은 여자에겐, 특히 출가외인에겐 단 한 푼도 내어주지 않는 집안이라는데요. 전쟁 때 그 집안 남자들이 다 죽었대요. 딱 한 명만 빼고.”
“······어?”
외할아버지, 벌써부터 그렇게 놀라실 것 없어요.
마저 듣고 나면 더 놀라게 되실걸요?
“딱 한 명 살아남은 정씨 집안 남자가 우리 아빠의 외삼촌이시래요. 그래서 그분이 돌아가시면 그 집안은 대가 끊기게 생겼다나 봐요.”
“어어?”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분은 중병이 들어서 오늘내일하느라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거예요.”
“어어어?”
뭐가 많이 겹치는 것 같죠?
아직 더 남았습니다.
“그분은 정씨 집안 피가 섞인 외조카를, 즉 우리 아빠를 양자로 들여 가업을 이을 생각을 하셨대요. 그래서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데려와 가르치셨다네요?”
“자, 잠깐! 잠깐만!”
외할아버지도 감 잡으셨죠?
하지만 아직도 긴가민가하시죠?
그래서 나는 일부러 더 모른 척 계속했다.
“그 가업이란 일이 무척 비정하고, 냉혹하고, 잔인했던가 봐요. 우리 아빠는 도저히 못 하겠다고 뛰쳐나왔대요.”
“······!”
“덕분에 그 집안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재산을 노린 다섯 명의 최측근들은 수장의 사망 후를 대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지 뭐예요?”
“허억!”
외할아버지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미 두 눈은 경악으로 부릅뜬 지 오래고, 날 가리키는 손가락은 벌벌벌 떨렸다.
아니, 손가락만이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지, 지금 그 말은······!”
“이쯤 되면 우리 엄마랑 혼약을 맺었다던 친구분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왠지 알 것 같죠?”
“허어어억!”
“자세한 사정은 우리 아빠에게 듣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외할아버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말릴 새도 없었다.
드르륵! 쾅!
외할아버지는 장지문을 열었다.
너른 양반집 앞마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름의 훈풍이 훅 끼쳐왔다.
외할아버지의 이마에도 송글송글 맺혔던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 사위! 사위 어디 갔나! 차 서방! 차 서바아아아앙!”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외갓집 대문 밖에서 서성이던 아버지가 크게 대답했다.
“장인어른, 저 여기 있습니다!”
“얼른 이리 들어오게! 어서!”
외할아버지는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버지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대문 문턱을 성큼 넘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장인어른.”
“내 물어볼 말이 있어서 그러네. 그러니 어서 들어오시게, 얼른!”
“가고 있습니다.”
“셋 세랴?”
“뛰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외할아버지도 그새를 못 참고 버선발로 달려갔다.
“자네 외삼촌 이름이 뭔가?”
“예?”
“정씨 성을 쓰는, 사채업 하는 사람 말이야! 자네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를 삼으려 했다던!”
“정씨 성에 동 자, 진 자 쓰십니다.”
“정동진!”
왠지 새해 첫날 일출을 보러 가야 할 것 같은 이름이었다.
“자네가 바로 동진이가 말했던······!”
외할아버지는 감격에 겨워 두 팔을 벌렸다.
어리둥절한 아버지를 와락 끌어안고 탄식하듯 중얼거리셨다.
“자네였어! 자네가 바로 내 딸의······! 이미 오래전에 점지된 내 딸의······!”
“장인어른?”
“맙소사······!”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숨도 못 쉴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내 사위가 여기에 있었는데······, 내 그것도 모르고···, 내가 어리석어서 그것도 몰라보고!”
외할아버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은 이렇듯 스스로를 찾아가는 것을···, 돌고 돌아 결국 천생연분이었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은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이라고.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안방에 데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머니가 씨암탉 두 마리를 잡아 백숙으로 내오셨다.
태성그룹 주방장들이 옆집에 있는데도, 한사코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주겠노라 고집을 부리신 거다.
외할아버지는 연신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자네가 정성준이라고?”
“차성준입니다.”
“동진이네 집에 양자를 들일 뻔했다지 않아. 그럼 당연히 정성준이었던 게지.”
“호적까지 정리한 건 아닙니다만.”
“으하하하! 어쨌거나 정성준이 될 뻔했다는 거 아닌가. 그럼 됐지, 그러면 된 거여.”
벌써 여덟 번째 같은 말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여러 차례 들이밀었던 사주단자를 내놓았다.
“내가 우리 수진이 두 살 되던 해에 이걸 받았네.”
“예.”
“여기에 적힌 정성준이의 생년월일이 자네의 것과 똑같은 거 확실하지?”
“예, 맞습니다.”
“으하하하핫! 그것 보라고. 그럼 됐지. 그러면 된 거여.”
외할아버지가 낡은 비단포를 다시 보고 또 들여다보셨다.
혼인할 남자의 사주를 적어 청혼할 여자의 집에 보내는 사주단자가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동진이도 이와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을 테니, 자네도 외삼촌더러 보여 달라고 해 보게나.”
“예.”
아버지도 벌써 여덟 번째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은 기색이 하나도 없으시다.
오히려 얼떨떨하고, 한껏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몰랐습니다. 수진이와 제가 이렇듯 옛날부터 혼담이 오갔던 사이였을 줄이야.”
“으하하핫! 이게 다 하늘이 내린 천생연분이라는 뜻이 아니고 뭔가. 안 그런가, 차 서방?”
“예, 맞습니다. 장인어른.”
아버지가 또 똑같은 맞장구를 치면, 외할아버지는 또 똑같은 탄식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네가 우광의 딸과 결혼했으면···, 어이구야.”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빙그레 웃었다.
“전 수진이뿐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아무렴! 당연히 그래야지. 혼담은 자네와 내 딸이 더 먼저였어! 으하하핫!”
마지못해 결혼을 허락하던 때와는 외할아버지의 표정부터가 달랐다.
외할아버지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어렸을 때 수진이를 한번 보러 온 적이 있어. 기억이 영 안 나는가?”
“예, 너무 어렸을 때라서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때 수진이가 두 살이었으니, 자네는 네 살이었나.”
외할아버지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우리 수진이가 용케도 제 짝을 알아보고 찾아갔네. 걔가 그런 애여! 보통 애가 아니여!”
우리 어머니는 두 살 때였다면서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장인어른. 수진이 기억력이 어디 보통인가요?”
“아무렴! 아차. 또 깜빡할 뻔했네.”
외할아버지가 자개장에서 뭘 또 주섬주섬 꺼내신다.
“이건 우리 수진이 시집갈 때 주려고 넣어둔 통장.”
아직도 우리 아버지에게 줄 게 남았다고?
아버지는 이번에도 손사래를 쳤다.
“수진이 대학 졸업하면 주려던 땅문서도 받았고, 수진이 직장 들어가면 주려던 집문서도 이미 받았습니다.”
“받어. 이건 우리 수진이 신혼여행 갈 때 주려던 외환 통장.”
“······.”
“더 있어. 이건 우리 수진이 아들 낳으면 주려고 챙겨둔 금두꺼비들.”
“장인어른.”
“아직 이건 안 돼. 이건 우리 수진이 딸 낳으면 줄 거야. 그러니 둘째는 딸을 낳으면 되겠네. 으하하핫!”
그렇게 외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준 게 이미 한 보따리였다.
아버지는 난처한 얼굴로 선뜻 받지 못했다.
이미 과하게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통장 한번 깔 때마다 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시더라고.
“저는 이만큼 받은 것으로도 분에 넘칠 만큼 과합니다. 차라리 이것들은 우리 정혁이에게······.”
“전 이미 더 좋은 것으로 두둑하게 받았어요.”
일본 부동산이랑 부동산 회사를 주셨거든요.
저기 보이시죠?
황금빛이랑 네 가지 색깔로 번쩍번쩍하게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거요.
나는 싱글벙글했다.
‘이거 잘만 하면 생각보다 문제가 훨씬 쉽게 풀리겠는데?’
아까 외할아버지에게 들었다.
-일본 부동산 회사를 지금 누가 맡고 있냐고? 동진이 최측근이라는 다섯 놈 중 한 놈.
-일본에서 기업을 대상으로 사채를 굴리는 미친놈이 하나 있어. 동남쪽 스컹크라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말죽거리 말대가리와 남산 찰거머리의 보스!’
동남쪽 스컹크는 대한민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 지하금융계의 일곱 거물 중 하나였다.
-그 사람이 정씨 집안 하수인 중 한 명이라고요?
-동진이 덕에 가족들을 구할 수 있었다지? 이후 광신도마냥 목숨 걸고 정씨 집안에 충성하더라고.
외할아버지는 슬쩍 덧붙였다.
-그놈은 나한테도 목숨 빚을 진 적이 있어서. 그러니 내 그놈을 믿고 부동산 회사를 맡겼지.
안다.
일본의 지하금융 대부인 동남쪽 스컹크.
대범하고, 똑똑하고, 잔인하리만치 손속이 독하나.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은원이 확실하다고 정평이 난 자였다.
‘이거 늦기 전에 그분을 만나서 제대로 담판을 지어야 할 것 같군.’
나는 오색찬란한 빛깔로 눈부시게 빛나는 일본 부동산 관련 문서들을 힐끔 보았다.
복잡하게 얽힌 색깔들이 영 못마땅하다.
‘복잡한 문제들을 이참에 싹 다 정리해서 황금빛 하나만 남겨 보자!’
계산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실행만 남았을 뿐이다.
‘정 씨 어르신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또 있으니까.’
나는 팔꿈치로 아버지를 툭 쳤다.
“장인어른이 사위 예쁘다고 챙겨주시는 거잖아요. 먼저 건네는 호의는 귀한 거예요.”
내 것에 비하면 아버지 몫은 기껏해야 황금빛이 은은하게 일렁이다 꺼질 정도였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그래야지.”
외할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었다.
훈훈한 분위기였다.
나는 이때다 하고 입을 열었다.
“외할아버지, 우리 엄마 아빠 결혼식은 언제쯤 올렸으면 하세요?”
“이것저것 준비하려면 아무래도 가을이나 되어야지 싶은데.”
늦어.
“가을엔 추수하셔야죠. 안 그래도 농번기라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해 죽겠는데, 마을 사람들이 잔치에 오려면 부담스럽잖아요.”
“어쩔 수 없이 농한기에 날 잡아야겠구먼. 동지섣달은 어떠냐?”
너무 늦습니다!
나는 일부러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우리 할머니가 너무 섭섭하실 것 같은데요. 어쩌죠?”
“네 할머니가 왜?”
“우리 할머니한테 자식이라고는 우리 아버지 딱 한 분뿐인데, 결혼식에 부를 형제도 딱 한 분뿐이거든요.”
정씨 집안 남자들이 전쟁 때 다 죽어서요.
우리 아버지의 외삼촌이자, 정씨 집안의 수장이라는 분.
외할아버지 절친이자, 동업자이자, 독립운동가 동지이자, 혼담을 맺으신 분 말이에요.
“가뜩이나 건강이 안 좋으시다죠? 겨울까지 버티실 수 있으려나······.”
“아!”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차 서방, 동진이는 요즘 상태가 어떤가?”
“최근 들어 부쩍 건강이 악화되신 것 같더군요. 많이 안 좋으십니다.”
“으음. 그 녀석은 젊어서부터 칼부림이 끊이질 않아서 몸 성한 곳이 드물었지.”
외할아버지가 방바닥을 탁 쳤다.
“아무래도 결혼식을 서둘러야지 싶다. 동진이 죽기 전에 우리 애들 결혼하는 모습은 보여 줘야지.”
외할아버지가 결단을 내리셨다.
“되도록 빨리. 최대한 빨리 상견례를 해서 혼삿날을 잡아야겠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자네 가족들은 사업이 바빠서 약속 잡기가 힘들 것이니. 한 달 전부터 미리 연락을 돌려야 얼추······.”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상견례, 지금 당장 가능할 것 같은데요?”
“음?”
“마을 잔치한다고 우리 태성그룹 사람들을 다 불러왔거든요.”
제가 이 결혼을 추진하면서 왜 전화부터 돌렸는데요?
아버지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우리 정혁이, 역시 일찌감치 큰 그림을 그렸구나.”
이 결혼, 내가 책임지고 성사시킨다니까요.
< 돌고 돌아 천생연분 > 끝
ⓒ 오소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