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296)
재벌집 만렙 아들-296화(296/416)
296. < 남아일언중천금 >
할머니는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정씨 집안 재산을 다른 이가 먹어 치우건 말건, 그에 대해서는 출가외인인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하니, 그것까진 나도 어쩔 수 없지만.”
할머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나도 양보 못 해. 나도 정씨 집안의 핏줄로서 가보를 지킬 의무가 있어.”
할머니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정씨 집안의 보물을 피 한 방울 안 섞인 놈들에게 내어줄 순 없지. 그건 우리 정혁이 몫이야!”
“그게 왜 제 몫이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핏줄에도 순서가 있잖아요. 우리 아빠가 먼저예요.”
“아니. 성준이는 못 받는다.”
“왜요?”
“자격을 박탈당했거든. 성준이는 정씨 일가를 박차고 나올 때 혈서를 썼어.”
문득 아버지와 언성을 높이며 신경질적으로 되받아쳤던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썼던 혈서는 어쩌고? 진짜 죽고 싶어서 그래?
아까는 아버지와 할머니를 뜯어말리느라 대충 넘겼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닌 듯싶다.
“아빠가 썼다는 혈서는 어떤 내용이었어요?”
“그건······.”
말하다 말고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셨다.
“말할 수 없구나.”
“왜요?”
“정씨 집안일이라서.”
“할머니 아들의 일이고, 우리 아빠의 일인데도요?”
“그래.”
“힌트라도 주시면 안 돼요?”
“주고 싶지. 나도 그러고 싶은데······.”
“기밀유지 조약에 걸렸나 보네요. 발설하면 손가락을 자른대요? 팔다리? 눈이나 귀?”
“내가 자세한 내용을 몰라. 쩝.”
“······.”
황당했다.
할머니는 불만스럽게 덧붙였다.
“정씨 집안 후계에 관한 일이라, 출가외인인 나는 알 것 없다는 거야.”
“······.”
“쳇, 이 자식들이 치사하게 자꾸 나만 따돌려.”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어르신께 물어보는 수밖에.’
우리 아빠 목숨이 걸린 일이라는데, 모른 척할 수야 있나.
그뿐만이 아니다.
‘다섯 명의 최측근 중에서 향후 누가 정씨 집안을 이어받느냐에 따라 태성의 미래도 달라질 테니까.’
할아버지들이 했던 대화가 내내 마음에 걸렸거든.
-동진이가 죽으면 정씨 집안의 새로운 수장이 태성그룹에 넣었던 지분을 도로 회수하려고 할 텐데. 그건 어쩌실 겁니까?
-감수해야죠. 그것까진 제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할머니의 남동생이라는 분이 돌아가신다면 사돈 우대도 끝이란 소리.
언제까지 정씨 집안이 태성에 우호적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정씨 집안이 가지고 있는 태성전자 지분이 11%랬다.’
태성전자는 태성그룹의 지주회사였다.
11%면 태성 전체에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터.
간 김에 이쪽 일도 제대로 정리해야겠군.
‘이참에 정씨 집안의 수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다섯 명의 후보자들도 눈여겨봐야겠고.’
되도록이면 그들을 포섭하여 태성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남겨두자.
후계자 쟁탈전은 생사를 건 결전의 무대.
동맹을 맺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터였다.
‘어떻게 포섭할까. 누구를 회유할까. 무엇을 약속할까.’
내가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정혁아,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음?
“우린 정씨 집안의 가보만 얻으면 돼. 그럼 나머지는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아. 그깟 건 욕심 많은 떨거지들더러 먹고 떨어지라고 해.”
뭐 얼마나 대단하기에.
나머지는 부스러기란 소리가 나와?
문득 궁금해졌다.
“정씨 집안의 가보는 뭐예요?”
“그건 나도 말해 줄 수가 없구나.”
“하기야. 가보인 만큼 1급 기밀, 아니, 특급 기밀사항인 건 당연할 테니까요.”
인정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래서가 아니야.”
“그럼요?”
“내가 자세한 것까진 몰라서 그래.”
“······.”
“정씨 집안 남자들에게만 대대로 전해진 귀물이라잖아. 난 딸이라고 보여주지도 않더라?”
당혹스럽네.
“뭔지도 모르는 물건을 어떻게 받아내려고요?”
“나는 몰라도 동진이는 알 거 아냐.”
그야 정씨 집안 가보의 주인이니까요.
“동진이 멱살이라도 잡고 탈탈 털어내 보마.”
“중병 들어서 오늘내일하는 환자와 멱살잡이를 하시겠다고요?”
“멱살잡이는 영 아니니?”
“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청계산으로 끌고 갈게.”
“······.”
“이것도 아니야? 지하실이 나으려나?”
“사람 잡을 일 있어요?”
“내가 안 잡아도 어차피 병사(病死)인데 뭘.”
“대화부터 하시죠.”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게 가장 쉽고,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잖아요.”
“쉽지 않을걸?”
“왜요?”
의아했다.
“설마 그 중병이라는 게 뇌졸중? 치매? 파킨슨병? 그래서 지금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인가 보죠?”
“아니, 주둥이는 멀쩡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너무 멀쩡해서 탈이지. 아오, 내 그 얄미운 주둥이에 펀치를 꽂아줬어야 했는데!”
“보통 입심이 아니신가 보네요.”
“중병 걸린 걔보다 입씨름하던 내가 혈압 올라 먼저 죽지 싶다!”
할머니는 허공에 분노의 원투 펀치를 날려댔다.
나는 이때다, 하고 입을 열었다.
“할머니, 그럼 먼저 우회적으로 찔러보는 건 어때요?”
“우회적으로? 어떻게?”
“주변인 공략이요. 수발을 드는 최측근 중에 말이 잘 통하고, 온건하게 일을 처리하는 분이 있을 거 아니에요.”
“있지.”
“그분과 먼저 말을 나눠보려고요.”
할머니가 솔깃하기에, 나는 조금 더 은근하게 밀어붙였다.
“이왕이면 태성에게 우호적인 분이면 더 좋고요. 혹시 떠오르는 분 없으세요?”
“있어.”
“누군데요?”
“명동 송골매.”
“······!”
너무 뜻밖인지라.
나는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그래서 나답지 않게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고요?”
“명동 송골매라고 있어. 대대로 우리 정씨 집안의 손발이 되어줬던, 청지기 송 씨의 큰아들.”
할머니는 날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일제시대에는 몰래 군수품을 만들어 독립군을 지원했었고, 지금은 명동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면서 정씨 집안의 문화재를 관리하고 있다던데. 혹시 들어본 적 없니?”
들어본 적 없긴요.
내 평생을 귀 따갑게 듣던 이름인데요.
‘스승님이 정씨 일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옛 생각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만일 스승님께 주인이 있었다면 후계자인 나를 데리고 인사하러 갔어야 했을······ 아!’
내가 스승님을 따르게 된 건 정동진 어르신이 죽고 난 후였겠구나.
문득 의문이 생겼다.
‘설마 정씨 집안의 후계 전쟁이 그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었던 것은 아니겠지?’
스승님께선 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후계자로 낙점된 이유 또한 이와 관련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과거에 이해할 수 없던 의문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정혁아.”
할머니는 엉켜 있는 내 머릿속을 풀어주려는 듯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다듬어주었다.
“할미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니?”
“아, 네. 물론이죠.”
내 표정을 조심스레 살펴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한 번뿐인 혼사인데. 어미가 되어서 이대로 나 몰라라 내팽개칠 수는 없잖니.”
할머니가 내 눈치를 보며 운을 띄웠다.
“이 할미의 부재를 틈타서 고집불통 노인네들끼리 3년 후로 날 잡으면?”
“그건 안 되죠.”
“그러니 이번 일은 이 할미에게 맡겨라!”
할머니는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내 책임지고 화끈하게 밀어붙이마. 인왕산 선녀보살이 어련히 좋은 날을 받아 왔을까.”
3주 안에 이 혼사의 결판을 보겠다는 굳은 각오!
아주 좋다!
“할머니 파이팅!”
이거 아주 든든하구만!
* * *
“오빠아아!”
예린이가 태성호텔 주방장표 디저트를 먹다가 반색했다.
먹던 초코쿠키도 집어 던지면서 날 향해 다다다 달려왔다.
“예린이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심심하진 않았고?”
“아니야!”
오늘 하루 아니야 금지를 풀기로 했더니만.
예린이는 목청을 높여 자신만만하게 ‘아니야!’를 힘껏 외쳤다.
“헤헤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 속 시원해!”
이게 뭐라고. 엄청 좋아한다.
“진짜 안 심심했어. 여기 주방장님들은 맛있는 걸로 골라서 챙겨주셨고, 유 팀장님은 등말이랑 목말을 태워주셨거든.”
저쪽 구석에서 흐뭇하게 예린이를 지켜보던 태성호텔 베이커리팀 주방장은 그 말에 감격한 듯 두 손을 꼭 잡고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유종태는 재빠르게 허리춤을 뒤져 즉석 사진기를 꺼냈다.
찰칵!
예린이 볼에는 홍조가 피어올랐다.
활짝 피어난 웃음은 그칠 줄을 모른다.
쏙 들어간 보조개와 부드럽게 휜 눈매까지.
‘귀엽네.’
얘는 왜 아니야를 외쳐도 짜증이 안 나냐.
괜히 놀리고 싶어지게.
“간식은 맛있었어?”
“아니······! 응!”
예린이는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태성호텔 베이커리팀 주방장과 고르고 골라 한 상 가득 대령한 유종태가 저쪽에서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고 만 까닭이었다.
“그럼 감사 인사하고 올까?”
“아니······! 응응응!”
이번에도 차마 아니라고 말 못 하고.
예린이는 두 주먹을 꽉 쥐고 고장 난 차량용 인형처럼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 소리를 연발해야 했다.
감사 인사 소리에 반색하는 어른들을 외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꾸벅 배꼽 인사했다.
“고마워요. 디저트 맛있었고, 덕분에 잘 먹었어요.”
“별말씀을요. 아이고, 아가씨!”
예린이는 어느새 땅바닥에 털썩 앉아 두 손 모아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과합니다, 너무 과해요!”
“헤헤헤. 감사합니다! 맛있었어요.”
예린이는 씩씩하게 벌떡 일어나 무릎을 팡팡 털었다.
그러더니 날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어때? 나 감사 인사 잘했지?”
“응.”
“······이, 이게 아닌데?”
왜? 오늘은 내가 아니야 금지라서?
우리 바보 예린이.
내 입에서 아니야 소리를 나오게 만들려면 질문을 그렇게 던지면 안 되지.
“예린이 잘했어. 착해. 훌륭해.”
“아니야.”
“진짜 아니야?”
“으으으으!”
예린이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치사하게 자꾸 아니야를 못 하게 하다니!”
“내가 언제?”
“아까부터 계속!”
“그럼 다르게 물어볼까?”
“아니······! 쳇.”
우리 귀염둥이 바보 예린이.
나는 예린이의 머리를 슥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꽃구경부터 갈까, 시장구경부터 갈까?”
“꽃구경! 꽃구경! 저어어어기 동네 어귀 꽃밭에 예쁜 꽃이 가득 피었더라구!”
“그래, 가자.”
예린이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거든.
스승님께 쫓겨나 맨손으로 밑바닥을 전전하던 시절, 나는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넌 무슨 꽃 좋아해?
도리도리.
기억과 함께 말까지 잃어버리고 내 품에 떨어졌던 여자.
그녀가 대답하기엔 썩 좋은 물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장미꽃 좋아해?
도리도리.
-거절의 의사를 밝힌 사람치곤 눈은 꽃집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도리도리도리도리!
-그럼 백합은 어때? 해바라기는? 수선화는? 튤립은? 국화는? 안개꽃은?
그러다 목 돌아가겠다.
고개를 젓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넌 늘 아니라고만 하더라.
이야, 넌 어떻게 끝까지 고개를 젓냐.
그녀가 습관처럼 고개를 저어야만 하는 이유라면 뻔했다.
나는 문제의 주머니를 팡팡 쳤다.
-너한테 꽃다발 사줄 돈도 없을까 봐? 나 그 정도 능력은 돼.
허세였다.
사실 막노동판 공사 잡부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하루살이 신세였다.
그녀에게 꽃을 사주고 나면 당장 점심 한 끼를 굶어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사주고 싶었다.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거든.
-골라 봐.
도리도리.
-젠장, 몰라. 됐어. 그럼 내 멋대로 고른다?
연신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손사래까지 치던 그녀였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장미꽃을 사서 안겼다.
혹시라도 엄청 싫어할까 봐 딱 한 송이만.
활짝.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지.
그깟 장미꽃 한 송이가 다 뭐라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달콤하게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장미꽃에 코를 묻고 향기를 음미하던 그녀의 모습이 사진처럼 뇌리에 박혔다.
-꽃 좋아하는구나.
도리도리도리도리도리도리도리!
하여간에 고집쟁이라니까.
그게 어디 꽃 싫어하는 사람의 얼굴이야.
-다음엔 꽃다발로 사줄게. 싫으면 쓰레기통에 버려. 알았지?
나는 난감해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럴 때면 내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날 따라와주는 그녀.
착한 여자였다.
-반지도 사줄까?
손깍지를 하면서 충동적으로 중얼거렸던 말.
도리도리도리도리도리도리!
내 이럴 줄 알았지!
-늦었어. 남아일언중천금이거든.
나는 웃었고, 그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쩔쩔맸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내게 몸을 맡겨왔다.
-결혼하자.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침밥을 함께 먹다 충동적으로 말을 툭 던지고 말았다.
순간 아차 했다.
반지를 준비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뻔뻔하게 씩 웃었다.
-반지는 이따 줄게. 이왕이면 꽃반지로. 어때?
고개를 젓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나는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그날은 하루 종일 미친놈처럼 종로의 금은방이란 금은방은 죄다 뒤져야 했다.
-무슨 놈의 금은방에 쓸만한 꽃반지 하나 없냐!
해가 다 지고서야 나는 실반지와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귀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 맞이한 건 엉망이 되어버린 집안이었다.
내 여자는 흔적도 없이 연기처럼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예린아, 넌 무슨 꽃 좋아해?”
30년 만에 다시 묻는 물음이었다.
“나? 으으으으음. 장미꽃!”
다행이다.
잘했다, 그 시절의 나!
탁월한 선택, 잘 골랐다!
“그건 갑자기 왜 물어?”
“꽃반지 사줄까?”
남아일언중천금이거든.
< 남아일언중천금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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