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315)
재벌집 만렙 아들-315화(315/416)
315. 알고 계셨어요?
나는 눈을 감았다.
‘아니길 바랐는데.’
이곳에 오기 전에.
외가에서 우리 부모님의 혼약과 정씨 집안과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부디 내가 잘못 짚었기를 바랐다.
그래야 다음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어르신은 제 존재를 알고 계셨겠네요?”
“그래.”
이번에도 정동진 어르신은 순순히 시인했다.
그게 나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할머니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동진이, 너! 우리 성준이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할머니는 삿대질을 했다.
“나한테 일말의 언급조차 하지 않고?”
“물어봤다면 대답은 해드렸을 겁니다, 누님.”
“나는……! 그 애가 우리 성준이와 그 정도로 깊은 관계였는지도 모르고 있었어…….”
할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그 일 때문에 나는 내 아들 앞에서 죄인이 되었어. 무려 7년이나.”
“이런. 하나뿐인 아들 일인데. 그것 참 안일하셨군요.”
정동진 어르신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게 행동에 앞서 뒷조사부터 꼼꼼하게 하셨어야죠.”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덧붙였다.
“정씨 집안에서 태어나 보고 자랐다면 그 정도는 기본으로 숙지하셨어야 했습니다, 누님.”
“허!”
할머니는 기가 막힌 듯이 헛웃음만 토해낼 뿐이었다.
당장 달려들어 머리채를 잡아 뜯고 싶어 하는 할머니를 말죽거리 말대가리가 뜯어말렸다.
“진정하시죠, 여사님.”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됐어? 와, 나 이런 너구리 같은 새끼를……!”
“두 분의 대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대화가……!”
내 얼굴을 본 할머니는 움찔하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할머니 쪽으론 곁눈질도 주지 않았다.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는 깡마른 사내, 정동진을 응시했다.
“우리 외할아버지랑 어릴 때부터 함께한 친우이자,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던 동지였다면서요.”
“그랬지.”
“그렇다면 우리 외할아버지가 집 나간 딸을 찾아 3년이나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고 다녔다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었겠네요?”
“물론.”
깡마른 사내, 정동진 어르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점의 미안함이나 껄끄러움도 느껴지지 않는 고갯짓이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친우를 믿고 있었을 텐데요.”
“그런 편이지.”
“자식을 잃고 애가 타는 친우를 위해 귀띔이라도 해 주실 수 있었잖아요.”
“성준이가 돌아온다면 한꺼번에 해결될 일이었는데. 굳이?”
“우리 엄마가 돌아가실 뻔했어요.”
연탄가스 중독으로요.
전생에서 나는 그렇게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그럼 우리 외할아버지에겐 천추의 한으로 남게 되었을 거예요.”
“네 엄마는 안 죽었고, 성준이와 이어졌고, 그놈은 제 딸과 사위를 얻게 되었지. 뭐가 문제지?”
“만일 우리 엄마가 그대로 돌아가셨다면요?”
“상관없었겠지. 넌 살았으니.”
정동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그럼 전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요?”
씁쓸한 물음이었다.
“구로동 판자촌은 강제 철거에 들어갔을 테고, 일곱 살짜리 어린애가 미혼모로 살았던 엄마를 잃으면 집도 절도 없이 길바닥에 나앉을 수밖에 없어요.”
“그럴 일은 없었을 거다.”
정동진은 딱 잘라 말했다.
“내가 널 거뒀을 테니까.”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안 그러시던데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누구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일가친척 한 명 없이, 나는 길바닥에 버려졌다.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어서.
호적에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아서.
고아원과 보육원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나는 스승님을 만나기 전까지 길바닥 생활을 해야 했다.
한겨울에 버려져서, 한 겨울을 간신히 버티고, 그 이듬해 한겨울의 끝에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나 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던가?”
정동진은 여유가 철철 넘치도록 느긋하게 웃었다.
“수첩에 적어놓은 성준이네 집 전화번호, 바쉐론 콘스탄틴 1970 스페셜 에디션, 푼돈밖에 안 되는 적금 통장.”
전생에 내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보석함.
거기엔 그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만일 그 보석함이 없어진다면? 단언컨대 넌 나를 통하지 않고는 성준이에게 닿을 수 없었겠지.”
인질로서, 미끼로서.
그게 내 역할이라는 듯이.
그는 그렇게 단언했다.
“난 성준이에게 선택지를 내밀었을 거다. 너와 네 아들 중 누구에게 이 집안을 물려줘야겠느냐.”
“사람 목숨 어찌 될지 알고요? 엄마랑 같이 저도 죽었다면요?”
“처자식의 시체라도 얻으려면 별수 있나. 성준이는 똥줄이 바짝 타서 달려와 엎드렸겠군.”
정동진은 즐겁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뒤를 이어 이 집안을 다스릴 사람은 오직 한 명, 정성준뿐이다.”
우리 모자를 아버지를 끌어들일 미끼로 쓰겠다는 소리였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가 어떻게 돼도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우리 아빠가 먼저 돌아가신다면요?”
“그런 무의미한 가정은 이쯤에서 그만두지.”
정동진 어르신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죽을 날 받아놓은 건 성준이가 아닌 나야.”
천만에요.
전생에 우리 아버지는 새해 첫날 비행기 추락으로 유명을 달리하셨어요.
아마도 당신보다 더 일찍.
그러니 자꾸만 쓴웃음이 흘러나올 수밖에.
할머니는 기가 찬 듯 중얼거렸다.
“이 너구리 새끼가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충분히 각오하고 이 자리에서 섰다고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일을 확인하고 났더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후우.’
나는 길게 심호흡했다.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사실 확인부터 제대로 해야 했다.
그래서 난 정동진이 아니라 스승님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송골매 어르신께 하나만 묻겠어요.”
“저에게 말입니까?”
“네.”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껏 스승님께 차마 묻지 못했던 말이었다.
나는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쥐었던 주먹을 애써 쥐었다 폈다 했다.
그런데도 입을 떼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나답지 않게.
“어르신은 진즉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나요?”
“예.”
가슴이 쿵 떨어졌다.
‘아니길 바랐는데.’
어렵게 꺼낸 말인 만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지.
지금의 내가 아니라, 전생의 나를 위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우리 아빠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 엄마가 이수진이라는 것을, 언제부터…….”
“처음 전당포에 들어오신 순간부터 알았습니다.”
음?
“성준 도련님과 똑 닮으신 분이, 태성그룹 김 비서를 대동하고 들어오시는데.”
스승님은 빙그레 웃었다.
“성준 도련님이 여섯 살이던 시절부터 제가 맡아 길렀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정혁 도련님을 못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감았던 눈을 반짝 떴다.
절벽 위에서 바위가 떨어지듯 쿵 하고 추락했던 마음이 도로 구름처럼 둥실 떠올랐다.
“그럼 우리 엄마의 흔적과 정보를 차단한 게, 어르신이 아니었다고요?”
“저는 정씨 집안 청지기이지, 밀사(密使)가 아닙니다.”
청지기란 하인들의 우두머리로서, 하인을 감독하고 주인의 자산을 관리하며, 주인의 자녀 교육을 담당하던 이를 뜻한다.
스승님은 정동진의 휠체어 뒤에 서 있는 사내들 중 한 명을 힐끔 보았다.
나도 그를 따라 자연스레 시선이 향했다.
‘하!’
내가 어찌 저자를 잊을 수 있을까.
내 나이 열한 살, 눈보라가 치던 어느 겨울밤.
스승님은 웬 피투성이가 된 사내를 질질 끌고 와 내 앞에 들이밀었다.
-이놈을 기억하느냐?
-누군데요?
-하나하나 잘 뜯어봐라. 분명 아는 놈일 것이다.
스승님은 남자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채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미 걸레짝이 된 얼굴은 본래의 이목구비를 쉬이 알아보기 어려웠다.
-이 개 같은 놈을 못 알아보겠느냐?
스승님은 이런 식으로 날을 세워 분노를 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나는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사람인가요?
-아주, 매우, 몹시.
-제가 어떤 것을 떠올려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데요. 힌트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후우.
스승님은 자꾸만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애써 다스리려고 노력하면서.
고르고 고른 단어로 문장을 만드셨다.
-네가 나를 만나기 전에, 분명 이자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스승님은 이를 까드득 갈며 사내의 등을 꾹 지르밟았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꽥꽥 들려왔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지 않습니까!
-닥쳐라, 너더러 입을 열라 허락한 적은 없으니.
-아, 왜 사람 말을 이렇게 못 믿으실까? 나는 이런 꼬맹이 따윈 전혀 모른단 말입니다!
내 귀에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저 목소리!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압니다.
-그럴 리가! 넌 나를 몰라!
남자는 비명처럼 외쳤다.
-이 꼬맹이가 지금 누구 신세 망치려고 거짓말을 해?
그는 필사적으로 버둥대며 외쳤다.
-얼굴 꼬라지가 이 모양이 되었는데, 제깟 놈이 무슨 수로 나를 알아본다고……!
-그럼 제 말을 따라 해 보세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던 말.
죽어서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던 말.
나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억양, 어조, 단어, 어투까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우고 있었거든.
-엄마가 죽었는데도 아무도 널 데리러 오지 않다니, 이것 참 유감이구나.
-……!
돼지처럼 꽥꽥대던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애미도, 애비도 없는 빌어먹을 천애고아. 그게 너다. 흐흐흐.
죽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던 내 등 뒤에서 들려왔던 목소리는 그렇게 이죽거렸었다.
-어르신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었지. 주어진 환경에 맞서 싸우는 것도 능력이라고.
내가 말을 할수록 스승님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 가슴에 새긴 처절한 원한을 꺼내었다.
-부디 너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길 바라마. 사내라면 응당 그 정도는 되어야지?
내가 그자의 말을, 그 목소리를, 뒷모습을 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때 당신에게 이렇게 말했었죠. ‘우리 엄마 돌려줘요!’
어머니의 시체를 지킬 힘이 없었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빼앗겼다.
그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악을 쓰며 울고불고 매달려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가차 없이 걷어찼다.
내 나이 고작 일곱 살.
남자의 발길질에 부웅 날아가 바닥에 요란하게 처박혔었다.
숨이 턱 막혀서 내가 꺽꺽대는 사이,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차 트렁크에 싣고 사라져 버렸다.
-왜 말을 못 해? 결백을 증명해야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나는……!
-번호판도 기억하는데, 읊어드릴까? 경찰은 모르쇠로 일관했어도, 우리 스승님은 아닐 것 같은데.
나는 그자의 멱살을 잡았다.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보았다.
-우리 엄마 어디에 버렸어? 아니면 어디다 팔았어!
사내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스승님은 그자의 멱살을 잡고 덜컥덜컥 흔들어대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툭.
내 발치에 떨어진 물건.
그것은 새파랗게 날이 갈린 나이프였다.
-정혁아, 어떻게 할 테냐? 내게 맡기겠느냐, 네가 직접 할 테냐?
내 나이 열한 살.
내 손에 처음으로 피를 묻혔던 날.
피에 절은 손으로 지하실 창고문을 열고 나왔을 때.
밤새 휘몰아친 눈보라에 내가 알던 세상은 완전히 다른 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혈서를 태우고 싶으냐?”
기침이 섞인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뼛속까지 시리던 한겨울 눈밭에서 별채가 활활 타오르는 한여름의 이곳으로.
“까짓것 못 태울 것도 없지.”
끝까지 거부한다면 지루한 실랑이를 벌일 것을 각오하고 왔는데.
정동진은 그리 어려울 것 없다는 투로 품에 손을 넣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빛 바랜 혈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건 왜 뜬금없는 황금빛이냐.’
지장은 물론 손바닥 도장까지 확실하게 찍혀 있었다.
“이것의 처분을 결정하기 전에, 진위 여부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이지 않겠나? 이거야 원 억울해서 못 살겠군.”
정동진은 품에서 황금빛 종이를 하나 더 꺼내어 작게 흔들어 보였다.
“이왕 까는 김에 내 유언장까지 함께 교차 검수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고.”
들고 있는 종이가 쌍으로 찬란한 황금빛이었다.
나는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혀, 혈서를?”
“유언장까지?”
정씨 집안 최측근 5인방은 물론 할머니까지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뜻밖에도 이 중 가장 기함한 사람은 내 불구대천의 원수, 저기 서 있는 시체 도둑이었다.
쨍그랑.
그가 들고 있던 물잔을 떨어뜨렸다.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고, 반질반질하게 잘 닦은 나뭇결엔 물이 흥건하게 스며들었다.
시체 도둑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인어른, 혈서와 유언장을 같이 검토하자는 말은…….”
저 짜증 나는 목소리가 치 떨리게 듣기 싫어서.
뒷말은 내가 가로챘다.
“지금 저더러 정씨 집안 후계를 함께 논하자고 하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