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325)
재벌집 만렙 아들-325화(325/416)
325. 책임을 묻겠어요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종류가 다른 침묵이었다.
전대 거물들은 다들 놀라고 감격한 눈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반면 정동진 어르신은 깡마른 손등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담요 자락을 움켜쥐었다.
“나더러 사과를 하라?”
“못 할 것도 없잖아요.”
“내가 왜?”
정동진 어르신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사과는 아쉬워서 하는 게 아니에요. 미안해서, 반성의 마음으로 하는 거죠.”
“나는 미안한 것 없다.”
정동진 어르신은 딱딱하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해도 후회는 없다. 난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아마도 그러셨겠죠.”
그놈의 자존심이 다 뭔지.
“내게 사과를 강요하지 마라.”
저 오만하고 독한 남자는 타협의 여지 따윈 없다는 얼굴로 턱을 들었다.
“그건 너 또한 마찬가지여야 한다. 이 자리란 원래 그런 자리야.”
정씨 집안의 수장 자리.
“내 뒤를 이을 자라면 응당 그래야 해. 함부로 고개를 숙여서도, 속내를 내비쳐서도, 물러서서도, 공감해서도 안 된다.”
정동진 어르신은 날카로운 눈으로 수하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고, 변명거리가 있고,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그런 것을 일일이 헤아리지 마라.”
그 날카로운 눈길의 끝.
그 끝에는 내가 있었다.
“넌 결정하는 사람이고, 이끄는 사람이고, 통보하는 사람이고, 지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동진 어르신의 결론이란.
“나는 잘못한 것 없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어르신의 말과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다고 해도요?”
“그렇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어르신의 책임감이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던가요?”
“책임은 사과로 지는 게 아니야.”
정동진 어르신은 느긋하게 웃었다.
“힘으로 해결하는 거지.”
뒷골목 세계는 그렇게 굴러갔다.
강자존, 약육강식, 힘의 논리가 이 바닥의 룰이었다.
“내게 책임을 물으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동진 어르신은 낮게 웃었다.
짙은 기침과 피 섞인 가래가 연신 쿨럭거리며 올라왔지만, 개의치 않으면서.
“설사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내 무릎을 꿇려 사과를 받아내기는 여의치 않을 터인데.”
정동진 어르신은 좌중을 쓸어 보았다.
“누가 감히 내게 문책을 하며, 누가 감히 내게 사과를 요구한단 말인가?”
정동진 어르신의 광오한 말에, 전대 거물들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제가 해요.”
“제3자는 빠져야지.”
“제가 왜 제3자예요? 저도 피해자예요.”
“뭐?”
“그뿐만이 아니에요. 어르신이 피해를 입힌 사람들은 제 아빠와 외할아버지, 제게 충성을 맹세한 내 사람들이에요.”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르신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상처 입었는지 알기는 해요?”
내가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까.
어디까지 따져 물어야 할까.
“고작 여섯 살이었던 우리 아빠는 부모와 생이별하다시피 이 집안에 들어가야 했다면서요.”
일제 시대와 전쟁을 거치면서 남자들이 싹 다 죽어서.
자식이 없던 정동진 어르신은 뒤를 이을 후계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 아빠를 ‘정성준’으로 입적하여 정씨 집안의 뒤를 잇게 하고자 했었다.
“후계자 교육이란 명목하에 우리 아빠한테 일부러 더러운 꼴, 못 볼 꼴, 참혹한 꼴을 골라서 보여줬다면서요.”
강하게 키운다는 일념으로.
어린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고, 엄한 기준하에 가차 없는 처벌을 자행했다.
“오죽하면 우리 아빠가 혈서를 쓰고 이 집안을 뛰쳐나왔겠어요.”
우리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었다.
능력도 있고, 생각도 있고, 인성도 훌륭하며 목표마저 확고한 남자다.
그런 우리 아버지를 벼랑 끝까지 밀어 넣은 게 바로 이 사람, 정동진이다.
“분명 어르신의 후계자로서 우리 아빠와 타협할 점이 있었으리라고 봐요.”
우리 아버지는 대화가 안 통하는 고집불통이 아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제 이상만 내세우는 이상주의자도 아니고,
무식하고 능력은 없는 주제에 탐욕만 앞세우며 징징대는 골치 아픈 응석받이도 아니다.
“우리 아빠 숨통을 틀어막으려고 했던 모든 일, 그게 왜 잘못이 아니에요?”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우리 아빠한테 사과하세요.”
나는 전대 거물들을 가리켰다.
“그 와중에 막중한 책임을 떠안고 충정을 다해 가산을 불렸으나 끝내 어르신께 무능하고 쓸모없는 것들이라며 방해물 취급당했던 여기 이 어르신들에게도 사과하시고요.”
또 있다.
“우리 엄마의 소식을 일부러 차단한 것도 명백한 잘못이었어요.”
날 가진 게 들켜서 맨손으로 도망치듯 집을 박차고 나온 우리 어머니.
양아들의 며느리 될 사람이었고, 운명처럼 양아들과 잘 맺어져서 날 가진 것도 다 알면서.
정동진 어르신은 보호하거나 도와주기는커녕 모든 기댈 곳을 막아놓았다.
“우리 외할아버지가 집 나간 첫째 딸을 얼마나 간절하게 찾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그러셨잖아요.”
외할아버지는 우리 어머니를 찾기 위해 삼 년간 농사일도 팽개치고 전국을 뒤졌다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바보도 아닌데, 정동진 어르신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동진 어르신은 잘 지낸단 소식 한 점을 전하지 않았다.
“친우이자, 과거 목숨 걸고 함께 싸웠던 독립운동가 동지의 부탁이었어요.”
그건 어르신도 인정한 바 있다.
“일부러 정보를 차단한 건 칼 맞아도 싼 일이라고 하셨죠? 그러니 우리 외할아버지에게도 사과하셔야죠.”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아빠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세 식구가 누구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그 생고생을 했는데요?”
우리 어머니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다 중동에서 7년이나 개고생을 했던 우리 아버지.
낯선 동네를 전전하며 날 낳고, 몸조리조차 제대로 못 한 채, 판자촌 쪽방에 월세살이를 하며 어렵게 날 키우셨던 우리 어머니.
-야채 다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매일 이렇게 별이 떴을 텐데. 어떻게 그동안은 하늘 한 번 쳐다볼 생각을 못 했을까?
한남동 대저택을 사서 들어왔던 첫날 밤.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놓은 정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었다.
-아빠 따라가면 호강할 수 있을 거야.
그날 어머니는 날 아버지에게 내어줄 결심을 하셨다.
-좋은 옷에, 좋은 차에, 좋은 선생님 만나서 대학교도 가고. 떵떵거리며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걸? 지금까지는 엄마 때문에 고생이 많았잖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시면서.
-그러면 아빠랑 결혼하고 싶겠네요?
-아무리 사랑해도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엄마가 많이 부족해서 그래.
막상 까놓고 보니까 우리 어머니는 돈 많은 땅 부잣집 귀한 첫째 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감히 아버지를 욕심내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왜 우리 아빠를 우광그룹과의 혼약에 밀어 넣으셨어요? 우리 엄마는 아빠가 집안에서 정해 준 상대와 결혼하게 된 줄 알고, 그 가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고생을 자처했어요.”
나를 잃지 않으려고.
병원 가잔 소리에 놀라 어머니가 든든한 친정의 그늘도 마다하고 뛰쳐나왔던 이유도 같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우리 아빠를 몰아세우려고 우리 엄마를 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하나 없는 외톨이로 만들어요?”
우리 어머니가 수첩에 적어놓은 전화번호는 딱 하나.
바로 아버지의 집, 태성그룹 총수의 자택 전화번호였다.
그게 우리 어머니의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우리 엄마는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단 한 번도 연락하지 못하셨어요. 내가 혼외자식, 사생아가 되어 우리 아빠의 발목을 잡고, 우리 아빠의 치부가 될까 봐서요.”
그게 우리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어머니는 홀로 날 키우며 멀리서 아버지의 행복을 빌어주는 길을 택했다.
“그래서 전 일곱 살이 다 되도록 우리 아빠가 누군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어요.”
우리 어머니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다 살아난 후에.
용기를 쥐어짜서 어머니는 아버지 댁에 전화를 걸었다.
행여 어머니가 죽은 이후,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어르신은 저를 콕 짚어서 유언장을 쓰셨잖아요. 우리 아빠를 붙드는 미끼로 절 이용하셨잖아요.”
어디 그뿐이야?
“방금 전까지 시험이라는 명분하에 날 기만하고, 농락하고, 몰아세우려 하셨잖아요.”
나는 검지로 내 가슴팍을 콕 찔렀다.
“그러니 제게도 사과하세요.”
이번에도 침묵이 내려앉았다.
분명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는 정적이었는데도.
전과 결이 다른 침묵이었다.
스승님은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고, 까치산 방 여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종로 금이빨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고, 말죽거리 말대가리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반면 정동진 어르신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날 내려다보았다.
“난 단 한 번도 내 말을 번복해 본 적 없다.”
정동진 어르신은 아까 딱 잘라 말했었다.
-나더러 사과를 하라? 내가 왜? 내가 뭐가 아쉬워서?
역시나 예상과 같은 말이 이어졌다.
“나는 미안한 것 없다.”
아마도 그 뒷말도 똑같겠지.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해도 후회는 없다. 난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그럴 줄 알았다.
알고 있으면서도.
입맛이 쓰다.
“그러니 네가 틀렸다. 차라리 피해 보상을 요구했어야지.”
정동진 어르신은 손짓했다.
하지만 수족처럼 움직이던 동남쪽 스컹크는 이미 끌려가고 없는 상황.
전대 거물 4인방은 깊은 탄식만 터트리며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정동진 어르신은 작게 혀를 찼다.
“침대 밑에 금고가 있다. 거기에 태성그룹 지분이 들어 있어.”
스승님이 말죽거리 말대가리를 향해 턱짓했다.
말죽거리 말대가리는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과 침대 밑을 번갈아 가리켰다.
하지만 스승님은 지팡이로 똑같이 번갈아 가리켰다.
이마에 ‘그럼 막내인 네가 하지, 큰형님인 내가 하리?’ 하는 말을 붙여놓은 듯 엄한 표정을 하고서.
“에라이!”
말죽거리 말대가리가 툴툴대며 침대 밑에 몸을 구겨 넣었다.
한참이나 낑낑대더니 우지끈 뚝딱 소리와 함께 통철로 만든 금고가 고정쇠가 박살 난 채 딸려 나왔다.
스승님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금고에 다가가 귀를 대고는 몇 번 끼릭끼릭 다이얼을 돌렸다.
덜컹!
간단하게 금고를 딴 스승님은 입을 떡 벌렸다.
멀리서 봐도 황금빛이 요란하게 쏟아지는 게 금고 안 사정을 알 만했다.
‘귀한 물건들은 다 저 침대 밑 금고에 숨겨두고 있었군.’
정동진 어르신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누런 서류 봉투. 태성그룹 지분은 따로 넣어두었지.”
스승님은 서류 봉투를 열어 문서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파란 장부도 가져와.”
스승님이 파란 표지의 장부도 들어 올렸다.
‘뭐지? 이 어마어마하게 불길한 똥빛은?’
똥빛과 검은빛의 환상적인 콜래보레이션!
이렇게까지 음험하게 번쩍거리는 똥빛은 처음이었다.
분명 내 눈에만 보이는 색깔일 뿐인데, 행여 이걸 잡으면 손끝에서 병균이 타고 올라올까 싶어 집어 드는 것조차 꺼려질 정도였다.
“네가 찾던 장부다. 청와대 경호실장의 뒷거래 내역.”
바로 납득 완료.
역시 이유 있는 똥빛이었다.
“더 얹어주지. 거기에 있는 나머지 장부도 전부 꺼내 와.”
신기한 일이었다.
‘어떻게 나오는 족족 죄다 똥빛, 똥빛, 똥빛 투성이일 수가 있지?’
정동진 어르신은 오만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만하면 피해 보상으로는 차고 넘칠 것 같은데.”
“그래서 결국 사과는 못 하겠다는 거네요?”
“내게 사과를 강요하지 마라.”
또 똑같은 소리.
죽을 날을 받아놓고도 참 한결같다니까.
“내게 책임을 물으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라 하지 않더냐.”
“좋아요. 그럼 능력껏, 재주껏, 요령껏 내 식대로 책임을 묻겠어요.”
협상 결렬.
“어르신은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거예요.”
내가 손가락을 튕기기도 전에, 스르륵 연기처럼 저승사자가 솟아올랐다.
[짜잔~!]저승사자는 눈을 반짝이며 날 돌아봤다.
[나 부르려고 했던 거 맞지? 그렇지? 내가 딱 맞춰 왔지?]‘그래, 부탁 하나만 하자.’
[죽여 달라고?]‘…….’
그런 청탁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동티 가지고는 택도 없다.]저승사자는 턱으로 가리켰다.
[안 그래도 오늘내일하는 놈인데, 동티 난 티가 나겠어?]바로 이해 완료.
우두둑.
저승사자가 손가락 마디를 꺾었다.
[본 차사의 권한으로 천벌을 내려주랴?]천벌?
[벼락 맞아 죽으면 그게 바로 천벌이지.]‘갑자기? 집 안에서?’
[저것으로.]저승사자는 정동진 어르신에게 주렁주렁 연결된 의료기기 줄을 가리켰다.
아하. 바로 이해했다.
벼락이나 감전사나, 몇 볼트로 죽느냐만 다르겠구만!
‘함부로 천벌 내렸다가 명계 감사 뜨고 난리 난다며?’
[이래 찍히나, 저래 찍히나. 한 번 찍히나, 두 번 찍히나. 어차피 염라대왕께 찍혀 좌천당한 신세야!]저승사자를 내 수호신으로 붙여줄 때 알아봤어야 하나.
저승사자는 긴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팔짱을 꼈다.
[지켜볼수록 괘씸한 것이 내 가만히 두고 보기가 어려워서 그렇다!]‘됐어. 내버려 둬도 조만간 자연사 아니면 병사야.’
[…….]그러니 굳이 그런 일로 염라대왕과 얼굴 붉힐 생각 없다.
어디까지나 이건 내 청탁이니까.
‘너 잘하는 거, 그거 한 번만 해 줘.’
[내가 잘하는 거?]‘꿈 말이야.’
[오호라, 감 잡았다! 이건 나한테 맡겨 둬라!]저승사자가 눈을 반짝이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저놈 때문에 꼬였던 네 천벌 받은 전생, 화끈하게 제대로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