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327)
재벌집 만렙 아들-327화(327/416)
327. 스스로 불러온 재앙
뚜벅, 뚜벅, 뚜벅.
한 걸음씩 다가오는 실루엣마저 그리웠다.
“살아 있었구나……!”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방금까지 정혁이의 전생을 보느라 기억의 파도에 휩쓸렸던 까닭이었다.
“비행기 추락사로 네가 그렇게 허망하게 갈 줄 알았더라면…….”
“전 안 죽었고, 그건 그저 해프닝이었을 뿐입니다.”
“그래, 다행이다.”
정동진은 감격어린 눈으로 차성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그가 아꼈던 정씨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 차성준의 죽음을 깨닫고 마음이 한 차례 무너졌던 후다.
정동진의 욕심이 초래했던 재앙이 대체 몇 사람의 인생을 망쳤던가.
그게 이제 와서 새삼 사무치게 뼈아팠다.
주르륵.
주책맞게도 정동진의 눈가에 다시금 뜨끈한 것이 흘러내렸다.
정동진은 재빨리 손바닥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런데도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무언가를 틀어막기엔 부족했다.
스윽.
차성준이 쪼그려 앉아서 손수건을 건넸다.
“처음 봅니다. 우시는 거.”
“안 운다. 눈에 뭐가 들어갔을 뿐이야.”
정동진은 성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황급하게 손수건으로 물기를 훔쳐내기 바빴다.
쪽팔렸다.
“늙어서 그래. 죽을 때가 되니까 이것도 고장 났나 보지.”
정동진은 문득 차성준의 손이 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손이 왜 이 모양이야?”
“제 손이라면 아주 멀쩡합니다.”
차성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붙인 채 풀어주신 것을 감사히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꿍꿍이속이 있으셨더군요.”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차성준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건……?”
“밀사의 것입니다.”
툭.
잘린 손가락이었다.
“네가 직접 손을 썼느냐?”
“내 처자식을 건드린 놈을 그럼 그냥 두고 봅니까?”
“아아아…….”
정동진의 얼굴에 후회가 번졌다.
이것 또한 그가 초래했던 재앙이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목구멍에 탁 걸려서 나올 줄 몰랐다.
정동진의 최선은 이것이었다.
“고생했다.”
“이런 게 고생 축에나 듭니까.”
툭.
또 다른 손가락이 정동진 앞에 떨어졌다.
“고생은 제가 아니라 제 아내와 아들이 했죠. 밀사를 잡아온 덕분에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탁.
손가락 몇 개를 잃은, 뭉툭한 손목이었다.
“일부러 내 아내의 소식을 끊으셨다죠?”
“그래.”
“7년 동안 일부러 내 아내를 고립시켜 벼랑 끝으로 몰아갔었고.”
“그래.”
“내 아내와 내 아들을 미끼 삼아 절 끌어들이려 했습니까?”
“그래.”
정동진은 언제나처럼 순순히 시인했다.
하지만 전과 달리 회한에 가득 찬 얼굴은 침통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유감입니다. 밀사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이 집구석 풍비박산 나는 것도 시간문제였을 텐데요.”
“그래.”
아마도 그랬겠지.
정동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집구석이 얼마나 개판이 났던지 이미 보고 온 후였다.
“흑사회 손바닥 위에서 농락당하는 일은 어떠셨습니까? 재미있으셨습니까?”
“재미없었다.”
“저와 제 처자식이 생고생하며 구르는 꼴을 지켜보는 재미가 워낙 쏠쏠해서 작정하고 그런 일을 벌이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차성준은 담배를 구둣발로 비벼껐다.
후우, 하고 내뿜는 숨은 뿌연 연기가 섞여 몹시 탁했다.
“꼴 좋군요.”
“그렇게 됐다.”
“제 아들은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겠지.”
저 집구석을 홀라당 태워버릴 때, 타죽게 내버려 뒀어도 됐을 일이었다.
“왜 수고롭게 당신을 살려두었는지, 그 뜻은 짐작하십니까?”
“글쎄.”
“제게 처우를 맡기겠다더군요.”
차성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제 아빠를 어린시절부터 키워주신 분이라고. 자신의 은원은 이것으로 끝내겠다더군요.”
“그런 말을 하던가.”
정동진도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들리는 그날, 어린 정혁이의 피맺힌 울부짖음이 귀에 들릴 듯하다.
-우리 엄마 돌려줘요!
어린 정혁이는 어머니의 시체를 지킬 힘이 없었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빼앗겼다.
밀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악을 쓰며 울고불고 매달려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정혁이에게는…… 빚을 갚아야겠지.”
이번에도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만일 정혁이가 종잣돈을 두둑히 들고 있었더라면…… 대한민국 지하금융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일찍이 정씨 집안의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된다면 아마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장악하는 큰손이 되었을 테지.
로스차일드나 록펠러 이상으로 대단한 거물이 될지도 모른다.
“정혁이에게 정씨 일가의 모든 것을 줄 것이다. 대한은행에 맡겨두었던 것을 네가 찾아 와야겠다.”
뜻밖이었다.
이것은 차성준이 정씨 집안의 후계자로 낙점하며 그에게만 몰래 알려준 극비 중의 극비였다.
“암호는 그대로다.”
“그걸 아직도 안 바꾸셨습니까?”
“네가 언제든지 되찾아야 하니까.”
정동진은 빠르게 덧붙였다.
“조선은행에도 맡겨두었던 것도 전부 찾아라. 그것도 정혁이한테 주고.”
“정혁이에게 정씨 집안의 짐을 떠안길 작정이십니까?”
“이건…… 그저 피해 보상일 뿐이야.”
정동진은 이미 장담한 바 있었다.
피해를 받았다면 보상을 요구하라고.
정혁이에게는 미처 갚지 못한 빚이, 아마도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도 컸다.
“정혁이는 뒷세계와 지하금융계에 발 담글 일 없을 겁니다.”
그건 무척 유감이구나.
네 아들이라면 누구보다 훌륭한 사채왕으로 성장했을 텐데.
사채왕이란 칭호가 그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인물도 없었다.
내 뒤를 잇기엔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제 신장을 하나 떼어다 판 돈으로 그 자리까지 기어올라 간 놈이니 더 말해 뭐해?
“네 아들놈, 확실히 난놈은 난놈이다.”
정동진은 웃었다.
“정혁이를 보고 나니 알겠더군. 난 널 잘못 키웠어.”
차성준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이 커졌다.
“쓸데없이 바르게 잘 자랐어. 이 바닥엔 어울리지 않게.”
진심이 깃든 칭찬.
처음이었다.
“네 장인에게는 친구로서 못할 짓을 했으니 칼 맞아도 싸다. 찌르라 그래. 얼마든지 맞아주마.”
차성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정동진의 미안했다는 표현임을 깨달았기에.
“송골매, 말대가리, 금이빨, 까치산…… 사실은 마지막까지 믿고 있었다.”
정동진의 눈은 먼 곳을 응시했다.
그 옛날,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사람처럼.
“안락하고 평온하며 명예로운 노후, 그것도 좋지. 나쁘지 않아.”
욕심을 내려놓으니, 세상을 보는 느낌이 달라졌다.
언제 이렇게 길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에서, 사람들을 손끝으로 부리느라 흙바닥에 오랜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다.
“스컹크, 그 녀석은 성준이 네가 책임져 줘야겠다.”
그놈만 왜 중정에 끌려갔는지 의아했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네 아들이 주는 선물이라고 치면 돼. 네가 중정까지 가느라 내다 버린 시간, 손해는 안 볼 거다.”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중병이 들었다고 하더니.
중얼중얼 지껄이는 말은 죄다 정동진 답지 않은 말뿐이었다.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보지. 너도 그냥 그러려니 해.”
깜빡할 뻔했네.
“참, 누님한테는 난 저승 면담에서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성묘 가서 실컷 이르시라 전하고. 가주 반지는 웬만하면 정혁이 주라고 덧붙여 주면 더 좋고.”
차성준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네 혼사를 좌지우지 한 거, 널 유언장으로 옭아매려 했던 거, 정보를 끊었던 것. 또 뭐가 아주 많겠지.”
정동진은 피식 웃었다.
“날 원망해라. 너랑 수진이는 그래도 돼.”
오래도록 차성준의 마음 한 구석을 잠식했던 원망과 미안이 자꾸만 꿈틀거렸다.
시시때대로 요란하게 치솟던 그 응어리진 감정이 어느새 물반죽처럼 흐물흐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혈서 쓰던 날 말이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더라면 밥 한끼는 먹여서 보낼 것을 그랬다.”
정동진은 미안한 듯 웃었다.
“그게 내 인생의 유일한 후회였다.”
“그 밥 한 끼, 지금이라도 먹으면 되겠네요.”
차성준은 피식 웃었다.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라 싶기도 하고.
십 년 넘게 함께 살면서 좋았던 기억이 없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인지 십 년만에 느껴보는 후련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차성준은 손을 내밀었다.
피로 얼룩진 손이었다.
정동진은 차마 그 손을 잡지 못하고 머뭇댔다.
“역시 이대로는 좀 찝찝하죠?”
“당연히 찝찝하지.”
정동진은 순순이 인정했다.
“이렇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니까. 내게 잘잘못을 따져 봐. 벌이라면 얼마든지 감내하마.”
“그게 싫어서 그 집구석을 나갔는데, 아직도 제가 정씨 집안의 룰을 따라야 합니까?”
그런가…….
“그럼 차씨 집안의 룰은 어떠냐?”
“아주 유명한 구호가 있습니다만. ‘태성은 한 가족!’ 모르십니까?”
“그건 알지.”
“한솥밥 먹는 식구끼리 잘잘못 따져서 뭐합니까?”
차성준이 정동진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일으켰다.
그러더니 훌쩍 등에 업었다.
“잘못은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고, 잘한 것은 시원하게 칭찬 한번 해주면 됩니다.”
“잘했다.”
정동진은 차성준의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었다.
처음이었다.
차성준은 정동진을 들쳐 업은 그대로 우뚝 멈췄다.
“이 정동진이에게는 흐물흐물한 약한 소리 따윈 어울리지 않아. 이거야 원 이빨 빠진 호랑이가 다 되었군.”
“밥 든든히 먹어서 배를 채우고 나면 호랑이 기운이 솟아오를 겁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구나.”
정동진으로서도 처음이었다.
성준이가 그를 이렇게 업어준 것은.
“살다 보면 종종 이런 날도 있어야죠. 어릴 때 제가 외삼촌 등에 업힌 적이 있으니, 이걸로 서로 퉁칠까요?”
“하하하. 넌 여전히 밑지는 장사를 하는구나.”
“가족끼리 이득 따져가며 살아서 뭐합니까? 전 좀 손해 봐도 상관없습니다.”
차성준은 말없이 정동진의 몸에 연결된 링거와 의료기기를 챙겼다.
카트에 실려 있는 데다 보조 배터리까지 달려 있어서 이동에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 차성준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던 정동진.
성준이의 목에 슬며시 팔을 둘렀다.
“역시 내가 그간 헛가르쳤다 싶다.”
“죄송합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사람답게, 사내답게, 아버지답게 잘 컸다는 소리야.”
정동진은 깡마른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이 속도로 언제 밥집에 갈래? 아파 죽는 것보다 배고파 죽는 게 더 빠르겠다.”
“하여간에 성질은. 가고 있습니다.”
차성준이 크게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정동진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성준아, 다른 건 몰라도 정혁이에게 네 그림자 라인을 물려줘야 한다.”
그림자 라인은 차성준이 정씨 집안의 후계자로서 구축한 정보라인이었다.
뚜벅, 뚜벅 걸어가던 차성준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정씨 집안을 떠났을 때부터 그건 이미 제 소관이 아닙니다.”
“밀사가 장악하려고 온갖 수를 다 썼지만, 네가 떠나면서 핵심 정보요원들도 물밑으로 숨어들어 성공하지 못했다.”
차성준으로서는 내 알 바 아닌 일이었다.
“그게 누구 손에 넘어가게 생긴 줄 아느냐? 최일태 의원이다.”
덕분에 최일태는 정치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놈은 그걸 제 손자에게 물려줬다. 그 손자가 바로 남산 찰거머리다.차성준은 대답없이 묵묵히 걸어갔다.
“남산 찰거머리라는 놈, 음험하고 욕심이 많아. 정혁이에게 필히 걸림돌이 될 것이다.”
정동진의 목구멍에서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맴돌았다.
네 정보라인을 빌리기 위해 정혁이가 제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난 그런 꼴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성준아.
“수진이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을 때 말이다. 만일 네 그림자 라인이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우뚝.
차성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김 비서에게 무릎 꿇는 수모도, 나를 찾아올까 말까 갈등해야 할 이유도, 전국방방곡곡을 뒤지며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었겠지.”
차성준은 말이 없었지만, 온몸으로 전해지는 느낌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그건 최씨 일가가 아니라 네 아들이 물려받았어야 했던 네 유산이었다.”
“…….”
“조커처럼 들고 있으면 돼. 쓰고 안 쓰고는 정혁이 마음이겠지. 굳이 네 아들에게 똑같은 아쉬움을 남길 테냐?”
정동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혁이테 가서 직접 물어 봐라. 남산 찰거머리가 부리던 정보 조직을 가지고 싶냐고. 정혁이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면 되겠군.”
정동진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정혁이 그놈, 두 여자와 아주 깊은 인연을 맺었던데……. 그 똑똑한 놈이 끝까지 눈치를 못 채는 게 영 어처구니가 없더란 말이야…….”
웃음이 자꾸만 실실 흘러나왔다.
“난 딱 보니까 한눈에 알겠던데, 두 눈 멀쩡하게 달린 놈이 왜 유독 제 핏줄만 몰라보는 건지 원……. 헛똑똑이가 따로 없더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정동진은 눈을 감았다.
쌕쌕거리던 숨소리가 점차 조용해졌다.
차성준은 묵묵히 걸었다.
“쉬세요, 외삼촌.”
차성준의 발걸음 소리와 카트 끄는 도로록 소리가 여름밤 풀벌레 소리와 섞였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같이 밥 먹어요. 이번엔 제가 사 드릴게요.”
툭.
차성준의 어깨를 붙잡았던 정동진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하지만 정동진의 입가엔 여전히 만족스러운 웃음이 맺혀 있었다.
* * *
정씨 집안의 수장, 정동진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 일은 정재계를 막론하고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켰다.
“뭐라고? 사채왕 정동진이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