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 of a wealthy family RAW novel - Chapter (413)
재벌집 만렙 아들-413화(413/416)
413. 우리 집
삼청동 한옥집은 언제나처럼 크고 으리으리했다.
나는 커다란 기와집 나무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유종태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대문을 두드리지 않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계십니까? 도련님답지 않게.”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요.”
내가 석 달 동안 이 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이렇게 입김이 많이 나던 한겨울이었다.
하지만 유종태는 짓궂은 얼굴을 해 보이며 웃었다.
“아하, 예린 아가씨에게 놀이공원 데이트 신청을 받으셨던 때 말이죠?”
그땐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대문 주춧돌에 나란히 앉아 약과를 나눠 먹었었지.
하지만 내가 떠올린 건 좀 더 옛날, 전생의 일이었다.
‘이 추운 날에 예린이는 매해 인왕산에 들어가 묵언수행하면서 백일치성을 드렸다는 거지? 나를 위해 제 목숨을 떼어다가.’
고생했겠네.
많이 힘들었겠네.
생색 한 번 내지도 못하고, 넌 그걸 무려 삼십 년 동안이나.
‘후우.’
하얀 한숨이 번져 나간다.
나는 눈 쌓인 한옥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오빠아아!”
벌컥!
커다란 나무 대문이 활짝 열렸다.
빼꼼하게 내미는 작은 머리통이 반가웠다.
“헤헤, 왔으면 얼른 들어오지 왜 여기서 이러고 서 있었어?”
“너한테 민폐 끼치기 싫어서.”
“에이, 참. 그런 게 어디 있어?”
“정말 그래?”
나는 슬쩍 대문턱을 넘어 발을 들였다.
그러자 저승사자가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다른 손으로는 소매를 떨치면서 크게 외쳤다.
[이리 오너라!]저승사자가 떨친 소매에서 시작된 광풍이 우르르 떨렸다.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풍압이었다.
저승사자가 허공에서 손아귀를 움켜쥐고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크어헝! 케헤헥!]집채만 한 투명한 백호가 엄청난 속도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쾅! 콰콰쾅!
백호는 땅바닥에 요란하게 텅텅텅 부딪히며 울부짖었다.
콰콰콰콰콱!
저승사자의 발치에 대가리를 처박고서야 백호는 간신히 멈춰 설 수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만신창이 신세였다.
저승사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백호는 순한 양으로 돌변하여 바로 꼬리를 말고 눈을 내리깔았다.
[차사님, 오랜만에 뵈옵니다!] [오냐.] [미리 기별을 주셨으면 제가 더 신경 써서 차사님을 맞이했을 것을.]백호는 납작 엎드렸다.
[우둔한 백호가 차사님의 행차도 몰라뵙고, 멍청하게 캣타워에서 뒹굴대기나 하다가…….] [본 차사가 네놈의 변명을 어디까지 들어줘야 하나?] [크허허헝! 이것들이 차사님 납시셨는데 뭣들 하고 있느냐! 당장 나와 귀하신 분을 맞이하지 못할까!]백호가 크게 울부짖었다.
땡땡땡땡땡땡땡땡!
저택 안쪽에서 미친 듯이 다급하게 치는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드르륵, 탁!
한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여자가 한지를 바른 장지문을 열었다.
“아이고오오오오!”
인왕산 선녀보살이 눈썹을 휘날리며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헐레벌떡 뛸 때마다 한 손에 든 무당방울은 요란하게 딸랑딸랑 울어댔고, 다른 손에 든 오방색 깃발은 펄럭펄럭 나부꼈다.
“귀한 분이 누추한 이곳까지 친히 발걸음을 옮기셨나이까!”
철퍼덕!
인왕산 선녀보살이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땅바닥에 대었다.
그 옆에서 같은 자세로 떨고 있는 백호처럼.
“귀인이 납시셨다! 무녀들은 당장 바닥에 무명천 깔아라! 화동은 무엇 하나! 가시는 걸음마다 꽃종이를 뿌리지 않고!”
인왕산 선녀보살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전원 달려 나와 풍악을 울리고 툇마루마다 오방기를 걸어라! 융숭히 맞이해야 할 것이다!”
“…….”
예린이가 입을 떡 벌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봐. 민폐 맞지?”
끄덕끄덕끄덕끄덕!
예린이가 고장 난 차량용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사자가 예린이 어깨에 앉아 있는 반투명한 작은 주작을 힐끔 보자, 주작은 즉시 백호 옆에 뛰어내려 대가리부터 박았다.
[삐약!]예린이는 움찔하여 어색하게 웃었다.
“오빠가 우리 집 대문 문턱 하나 넘는 일이 이렇게까지 요란할 일인가 싶은데…….”
내 말이!
하지만 인왕산 선녀보살은 기겁하여 손사래부터 쳤다.
“아이고, 아닙니다! 귀인께서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는 두 손을 모아 꾸벅 배꼽 인사했다.
그러자 인왕산 선녀보살은 아예 이마를 바닥에 대며 크게 절을 올렸다.
“과합니다. 귀인의 인사를 제가 어찌 감히 받겠습니까? 귀인께서는 예를 거둬주십시오.”
“…….”
예린이가 더욱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 음, 오빠, 우리 집에 온 걸…….”
“얘들아, 풍악 준비는 아직이니? 무명천 왜 안 까니? 꽃종이는 어쨌니? 오방기 안 걸 거니?”
“……우리 나가서 놀래?”
“그러자.”
예린이가 와다다 달려와서 내 품에 쏙 들어와 안겼다.
작고 가녀린 몸이었다.
언제나처럼 예린이의 몸에서는 베이비 오일과 파우더 냄새가 섞인, 포근한 애기 냄새가 올라왔다.
“예린이랑 잠깐 놀다 와도 될까요?”
“아이고, 물론이죠. 놀다 오는 것뿐입니까? 외박해도 됩니다! 며칠, 아니, 한 달도 좋습니다!”
후한 인심이었다.
인왕산 선녀보살은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면서 두 손을 들었다.
“저는 이 만남 무조건 찬성하겠습니다!”
[그래야지.]저승사자는 흡족하게 웃으며 허공에 움켜쥐었던 손아귀를 풀었다.
그제야 목 졸린 듯 켕켕대던 백호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고 있던 인왕산 선녀보살도 그제야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예린이 손을 잡고 대문턱을 도로 넘었다.
[크허허헝, 살펴 가십시오! 차사님, 다음에 또…… 또…… 또…….]차마 다음에 또 오시라 말을 맺지 못하는 백호를 뒤로하고.
우리는 나란히 삼청동 골목길을 걸었다.
“예린아, 갑자기 눈사람이 만들고 싶었어?”
“응! 어제 그제 눈이 엄청 예쁘게 펑펑 왔잖아. 헤헤헤.”
예린이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옅게 웃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늘 바쁘시고, 신언니들도 바빠서…….”
“이왕이면 눈 펑펑 내리는 날 연락하지. 언제든 달려올 수 있었는데.”
“사실은 정말 그럴까 했었는데에.”
예린이는 배시시 웃었다.
“오빠도 아주 많이 바빠 보인댔거든. 그럼 내가 방해하면 안 되는 거잖아. 오빠는 큰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으래? 누가 그런 쓸데없는 헛소리를 전했을까?”
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움찔한 유종태가 재빨리 즉석 사진기 버튼을 찰칵 눌렀다.
위이잉, 하고 천천히 나오는 즉석 사진을 바라보며 모른 척 눈을 데구륵 돌리는 게 아닌가.
“사진이 예쁘게 잘 나와야 할 텐데요…….”
“사진?”
예린이가 눈을 반짝였다.
“그거 내 거 해도 돼요?”
“물론입지요. 아가씨를 위해 오늘도 제가 사진사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그럼 두 개 가져도 되는 거예요?”
“백 개를 가지셔도 됩니다.”
“우와아아, 너무 좋아요! 헤헤헤, 감사합니다아아.”
……예린이가 좋아하니까 이번 한 번만 눈감아주자.
예린이는 즉석 사진이 선명해지길 기다리면서 팔랑팔랑 부쳤다.
사진을 바라보는 눈이 예쁘게 접혔다.
“헤헤헤, 여기 이거 오빠 눈 좀 봐.”
“내 눈이 어떤데?”
“쭉 째진 눈을 하니까 성격이 엄청 나빠 보여.”
“…….”
유종태, 흑역사를 남기다니 이 일은 잊지 않겠다!
“오빠는 어쩜 이런 눈을 해도 귀여울까? 나 이 사진이 정말 마음에 들어. 완전 좋아! 귀여운 거 최고야!”
“…….”
……뭐, 예린이가 좋다면 된 거지. 흠흠!
저승사자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에 팔불출.]‘아니거든?’
[30년 넘게 한 여자만 바라보는 거, 지겹지도 않냐?]‘우리 예린이 얼굴이 지겨워?’
[……확실히 쉽게 지겨워질 만한 미모는 아니긴 하군. 볼 때마다 새롭게 예쁘니.]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예린이 어깨에 앉아 있는 병아리만 한 투명 주작도 날개를 퍼덕이며 삐약삐약 울었다.
저승사자가 쳇 하고 혀를 찼다.
[안다. 이만하면 역사상에서도 손꼽힐 만한 경국지색이라는 거. 누가 뭐래?] [삐야아아아악!]의기양양한 울음이었다.
예린이가 두 팔을 쫙 펴서 사진을 요리조리 들여다보았다.
“오빠, 그거 알아? 내 방에 오빠 사진이 이마아안큼이나 많아.”
“이마아안큼이 얼마만큼인데?”
“……백 개 천 개?”
우리 예린이 아직도 숫자 잘 못 세는구나.
일곱 살이 되었으면 그래도 백까지는 셀 수 있어야 할 텐데.
“또, 또, 또 오빠 쭉 째진 눈.”
“아니거든?”
“이 사진이랑 똑같은 눈을 하고 있는데?”
“오해야.”
나는 눈을 깜빡거려 보였다.
예린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는 나랑 달리 눈동자가 정말 깊고 은은하고 까맣게 반짝거려. 흑구슬 같아.”
그러고 보니 예린이의 눈동자는 한국인치곤 드물게 색이 옅었다.
옅은 푸른빛이 돈다 싶을 만큼.
피부도 엄청 희고, 머리색도 옅고, 콧대나 이목구비는 외국인처럼 오뚝했다.
그녀는 많은 남자들이 탐내던 경국지색, 절세미인이었다.
예린이가 내 손을 덥석 잡아왔다.
“오빠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지.”
“쬐끔?”
“엄청 많이.”
“헤헤헤, 나도!”
예린이가 방긋 웃으면서 내 가슴에 뺨을 마구 비벼댔다.
쪼끄만 머리통이 곰살맞게 움직이자, 가슴이 마구 간질거렸다.
너도 날 기다렸다는 말이 다 뭐라고.
“참! 오빠, 나 요즘 매일 엄청 그리운 꿈을 꾼다?”
꿈이 그리울 수도 있나?
“어느 작은 반지하 집이었는데,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날이면 오빠가 창문가에 요만한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놓아주곤 했었어.”
……어?
“빨간 모자를 쓴 눈사람은 나고, 파랑 모자를 쓴 눈사람은 오빠였는데…….”
잠깐.
“오빠는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고, 나는 매일 그 집에서 눈사람과 함께 오빠를 기다렸었거든.”
웨이러 미닛.
“그땐 자꾸 아팠어서 매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는 바람에.”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거지?
“죽을 것 같이 아플 때면 고개를 들어 창밖에 나란히 서 있는 눈사람을 봤어. 그러면 왠지 오빠가 곁에 있는 것만 같아서, 혼자가 아닌 것 같아서, 빙그레 웃음이 나오는 거야.”
아니지?
내가 지금 괜한 생각 하고 있는 거 맞지?
“어느 날 오빠가 사준 장미꽃이 정말 예뻤거든. 그래서 눈사람 옆에 놓아주고 싶었는데, 눈사람은 이미 녹아서 없는 게 너무 아쉬운 거야.”
예린이는 주머니에서 작은 고깔모자 두 개를 꺼냈다.
“신언니한테 부탁했어. 남는 오방천 자투리로 만든 거야.”
예린이는 방긋 웃었다.
“오빠, 오늘 나랑 같이 눈사람 만들지 않을래?”
“그래.”
안 그래도 언젠가 네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어.
나는 예린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자.”
“응? 갑자기?”
“응, 갑자기.”
“어디 가려고?”
“가보면 알아.”
나는 예린의 동그란 콧방울을 톡 쳤다.
예린이가 두 손으로 코를 감추면서 놀란 눈을 했다.
“설마… 오빠, 아니지?”
네 설마가 뭔지는 몰라도.
내 설마는 아니었으면 해.
* * *
“우와아아아……!”
예린이는 입을 떡 벌렸다.
“내가 꿈에서 봤던 그 집이랑 정말 똑같이 생겼잖아?”
이런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을까?
내 설마가 들어맞았다.
“완전 신기해!”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기 우리가 같이 살던 그 집 맞거든.’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난 제일 먼저 이 집부터 사뒀다.
나도 안다. 미련한 미련이라는 거.
“세상에, 이거 정말 뭐지? 오빠, 여기 계단도 꿈이랑 똑같고! 저기 창문도, 요기 지붕이랑 거기 벽돌까지 똑같아!”
지하금융계의 다섯 거물 중 하나가 되고서도 나는 이 집에서 살았다.
내 별명은 신림동 개미지옥.
떠날 수 없었던 신림동의 망령이었다.
“말도 안 돼. 오빠는 어떻게 알았어? 내가 이 집 꿈꾼 거.”
몰랐지.
무당이 과거를 손바닥 보듯 들여다본다는데, 네 신기가 이런 것까지 들여다본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
그것까진 내가 모를 일이었다.
예린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근데 자세히 보니까 내가 꿈에서 본 집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아.”
“어떤 점이 다른데?”
“일단 마당이 너무 넓어. 완전완전완전 와아아안전 넓어!”
그야 내가 주변의 다가구 주택들을 싹 다 사들여서 밀어버렸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꽃을 종류별로 잔뜩 심을 화단을 만들기엔 정원이 너무 좁았거든.
넓게 튼 정원엔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생긴 강아지 집 같은 것도 꿈에선 없었거든.”
그야 네가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언제고 너와 함께 강아지 한 마리 데려다 키울까 했었어.
“안에도 들어가 볼래?”
“그래도 돼? 갈래, 갈래!”
우리 집 반지하 계단은 따로 후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구분되어 있었는데.
예린이는 단번에 계단과 현관문을 찾았다.
달칵.
어두컴컴했던 반지하 집 안에 불이 들어왔다.
“우와.”
이곳에서 홀로 너를 기다린 지 30년.
너는 긴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이곳에 섰다.
예린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여기… 우리 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