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y of a former idiot who became a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3)
전직 망돌이 탑스타 된 썰 푼다-23화(23/110)
23
약속했던 시간이 되자 한산했던 테이블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가득했다.
로운도 재빨리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하필이면 맞은편이 강차헌이었지만 로운은 애써 상대를 무시했다.
“아아. 모두 자리에 계시는군요. 시간도 되었고 하니 먼저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자 김 감독이 마이크를 들었다.
“오늘 우리 ‘귀로’를 위하여 이 자리에 모여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비록 시작하기에 앞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짝짝짝!
많은 사연이 스치고 지나가는 복잡한 표정의 김 감독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지난 힘든 나날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다시 고개를 드는 김 감독의 얼굴은 더없이 밝았다.
활짝 미소 지은 그가 말을 이었다.
“이미 다 알고들 계시겠지만, 그래도 첫 만남이니 소개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감독인 김성하입니다.”
다시금 짧은 박수가 쏟아졌다.
‘귀로’는 크게 현재와 과거 두 가지 시간선으로 나눠지는데, 먼저 소개를 시작한 것은 현재 파트의 배우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주인공 이서준 역을 맡은 구일환입니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서게 되어 떨리고 그러는데… 그런 잡설 다 떠나서 일단 저기 저 잘생긴 친구가 제 젊은 시절이라니 너무 뿌듯하고 그렇습니다. 하하. 앞으로 여러모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구일환의 농담 섞인 말이 약간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를 훈훈하게 풀어 주었다.
“이서준의 아내 이미선 역을 맡은 신은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서준과 지독하게 얽히는 악우 권지호 역을 맡은 김종선입니다. 아마 개봉하면 욕 좀 솔찬히 먹지 싶습니다.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 같네요.”
친구 역할의 배우가 너스레를 떨자 또 한 번 작게 웃음소리가 흘렀다.
중견 배우들이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훈훈하게 풀어 나가니 로운도 점차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배우들도 차례차례 뒤를 이어 소개를 이어 갔다.
현재 파트가 끝나고 곧이어 과거 파트 배우들의 소개가 계속되었다.
“주인공 이서준의 과거를 맡은 강차헌입니다. 저야말로 훌륭한 선배님들과 작품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래의 이서준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만악의 근원이 될 권지호 과거역을 맡은 심새로입니다. 저도 김종선 선배님 말씀처럼 앞일이 조금 걱정되고 있습니다.”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과 대칭을 이루는 조연의 소개가 끝나고, 로운의 차례가 돌아왔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얼었다.
이전과는 달리 초대받지 못한 객이 된 듯한 시선에 순간적으로 움츠러들 뻔했다.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이럴 건 예상했잖아.’
하나하나 뜯어보고 평가를 내리는 듯한 부담스러운 눈초리들.
작은 실수라도 하면 곧장 ‘역시 쓸모 없음’ 타이틀을 붙여 줄 것만 같은 숨 막히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운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건 두려워할 게 아니라 기꺼워해야 할 기회야.’
이전에는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던 새로운 기회.
“안녕하세요. 친구 채유정 역할을 맡은 이로운입니다. 여러모로 많이 부족하겠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긴장하고 떨 필요도 없다.
심판하는 듯한 저 엄중한 판관들은 로운이 제 몫을 다 하는 것을 제대로 보여 주기만 한다면 분명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기다리던 대본 리딩이 곧 시작되었다.
* * *
“이 과장, 생각 잘해. 지금 나가면 다시 일하기 쉬울 줄 알아? 뭐, 글? 어린애도 아니고. 가족을 생각해야지.”
“표절? 무서운 소리를 한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표절을 해? 너 예전에도 그러더니만,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면 나 너 만나기 곤란해져.”
“유정이가… 제게 남긴 거라고요? …정말 못난 친구였네요, 저는…….”
본격적으로 대본 리딩이 시작되면서 회의실 내의 분위기는 점점 열띄게 변해 갔다.
첫 리딩이자 첫 만남.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파 배우들이 모여서 그런지 주고받는 대사가 몹시도 찰지게 맞아떨어졌다.
괜히 실력으로 유명한 게 아닌듯, 감독이 지시내리는 장면마다 호흡이 척척 맞아들어갔던 것이다.
씬을 지정하자마자 순식간에 몰입하여 내뱉는 대사는 노련한 배우들의 내공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와… 그냥 대본을 읽는 건데도 어떤 상황인지 머릿속에 그려져.’
사람 좋게 웃던 친절한 배우들은 어느새 강퍅한 직장 상사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옛 친구이자 표절범으로.
모든 것을 뒤늦게 알아 진한 자책과 후회로 범벅된 한 남자로.
순식간에 변해 있던 것이다.
“자, 다음은 과거파트로 넘어가겠습니다. 32번 씬으로 진행해 주세요.”
방금 김 감독이 요청한 씬은 주인공 이서준이 과거 큰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꿈을 이루고자 발버둥을 치는 부분이었다.
동시에 그 희망이 완전히 고꾸라지는 계기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고.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왜 접수가 불가능하다는 건가요?”
과거 이서준 역을 맡은 강차헌이 대사를 읊었다.
“여기 결격 사유 나와 있잖아요. 안 보이세요?”
“이게 저랑 대체 무슨 상관이…….”
“상관이 없기는 왜 없어요? 이서준 씨 아주 유명하던데요. 권지호 작가님 작품 표절하려고 했었다면서요?”
“잠시만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건… 분명히 무슨 오해가 있던 겁니다. 저는 표절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
“그건 잘 모르겠고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저희는 이서준 씨 접수는 받기 어렵겠습니다.”
“무슨… 그런…….”
앞선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도 놀라웠다면.
지금의 강차헌은 충격 그 자체였다.
‘뭐지? 이상한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대단하다고?’
괜히 탑스타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표정 연기도, 행동 연기도 따로 없는.
그저 대본 읽기에 지나지 않는 리딩이라지만.
어째서인지 강차헌이 연기한 이서준의 모습이 그려졌다.
끔찍한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이서준의 지난 노력이 몇마디 대화 후 끝이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처박힌다.
그 아연함과 좌절감이 고작 목소리의 강약 조절과 절제된 호흡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엔 씬 48 진행해 주세요.”
로운의 차례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진행할 씬은 채유정과 이서준이 친해져 가는 과정을 담은 장면이었다.
채유정은 훗날 글쓰기와 더불어 이서준이라는 인간이 중심을 잡게 지탱해 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의 둘은 아직 서로를 알아가며 친해지는 단계였다.
‘떨 필요없어. 준비했던 대로 하면 돼.’
그러기 위해 이 짧은 사이에도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열심히 연습하지 않았던가.
수천 번을 시뮬레이션 했던 장면을 되새기며 로운이 감았던 눈을 떴다.
“자, 여기. 오늘 매점 완전 다 팔리고 없더라. 남은 게 이거밖에 없어서 이거만 사 왔어.”
입에 익을 대로 익은 대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뭔데 이거?”
“보면 몰라? 빵이잖아. 점심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먹던가.”
“너, 내가 거지로 보여? 갑자기 빵은 왜 주는데?”
“뭐야. 왜 줘도 난린데. 나 사는 김에 같이 사서 줬는데 뭐. 친구끼리 뭐 빵 하나도 못 사 주냐?”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허, 하고 한숨을 내쉬던 로운은 문득 시선을 느꼈다.
마침 강차헌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정통으로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왠지 눈을 피하면 지는 것 같다.
때마침 지정된 씬도 티격태격하는 장면이다.
“뭐가 아니야, 아니긴? 맞는 말 했구만.”
로운도 같이 눈에 힘을 주고 상대를 바라보며 대사를 외웠다.
다행히 대본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외우고 수천 번을 반복해 시뮬레이션 했던 탓에 대사를 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내가 뭐 피자를 사 줬어, 햄버거를 사 줬어. 고작 오백 원짜리 빵 하나에 사람 거지 취급하는 쓰레기를 만드데 얘가? 나도 애들한테 종종 얻어먹는데 그럼 나도 거지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문제야? 됐으니까 얼른 먹어. 점심 시간 얼마 안 남았잖아. 이러느라 더 시간 지났겠다.”
아무렇지 않게 제 몫의 빵을 뜯어 야금야금 먹는 채유정을 바라보며 주인공 이서준은 어색하게 빵 봉지를 매만진다.
물론 지금은 리딩 중이니 빵도 없고 뭣도 없지만.
머뭇거리는 이서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일부러 잠시 텀을 두었던 강차헌이 다음 대사를 읊었다.
“…다음엔 초코빵으로 사 오던가.”
곧장 청량한 웃음이 터진다.
“와,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기 싫은 모양이네? 뭐, 좋아. 이서준 너 진짜 재밌는 애다. 그래서 글도 그렇게 재밌게 잘 쓰는 건가?”
“대체 뭐라는 거야…….”
웃음기를 참지 못하는 채유정과 쑥쓰러움과 약간의 민망함, 그리고 고마움이 뒤섞인 이서준의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우정이 싹트기 시작하는 친구끼리의 가벼운 씬이다.
이서준과 채유정이라는 인물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심각한 갈등이 있다거나 격한 감정이 터지는 씬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배우들에게는 그 장면이 달리 보였다.
‘강차헌에게… 안 밀리네?’
강차헌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탑랭크의 배우다.
그 말인즉슨, 웬만한 연기로는 강차헌에게는 비빌 수도 없다는 소리다.
어지간히 실력이 좋지 않은 이상, 강차헌의 연기에 완전히 잡아먹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뺏는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로 모조리 집중시켜 끌어들이는 존재감을 지닌 배우. 그것이 강차헌이었으니까.
그런데.
‘김 감독이 싸고 도는 걸로 봐서는 좀 하는가 싶기는 했는데…….’
물론 김 감독이 보는 눈이 좋고, 실력으로 오디션을 통과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지만.
그 어느 곳보다 소문이 빠른 곳이 이 바닥 아니던가.
아무래도 소문이 주는 선입견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인사도 싹싹하니 잘하고 매니저한테 딱히 성질 부리는 것 같지도 않고. 애가 얌전하긴 하더라만은.’
사람 됨됨이는 실제로 보니 소문과 다르기는 했지만 연기는 다르다.
아예 작품에 박제되어 있으니 사실은 연기력이 뛰어났다는 식의 변명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강차헌이 상대를 벼르고 있는 기색을 보였으니 ‘사실 연기는 별거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분명 그랬는데.
“…….”
“…….”
연기에 일가견이 있기에 오히려 더 잘 알 수 있었다.
저 강차헌과 합을 맞추며 저렇게 뚜렷하게 자기 색을 드러낼 수 있는 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심지어 대본조차 보지 않은 채 목소리의 톤 조절과 말투만으로 풋풋하게 오가는 미묘한 감정선까지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그게 더 어려운 건데…….’
기대가 없던 만큼 놀라움은 더 컸다.
정작 그 어려운 걸 해낸 로운은 어리둥절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