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y of a former idiot who became a top star RAW novel - Chapter (92)
전직 망돌이 탑스타 된 썰 푼다-92화(92/110)
92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었다.
“……?”
잠시 스턴이 걸린 로운이 힘겹게 버퍼링을 이겨 냈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아뇨, 잘 들었어요. 암 맞아요.”
담담한 이정혜의 말을 들으니 그간의 미싱 링크가 풀리는 것 같다.
늘 피곤해하고 가끔 입안에 털어 넣는 정체불명의 알약들이 떠오른다.
‘벌써 노환이 올 연세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단순한 노화라고 하기에는 이정혜의 나이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던 것.
‘이호 님이 본래도 허약 체질이라고 알려 주셔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이런 대형 폭탄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척해 보이는 게 괜한 착각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윤서의 방문도 좀 그랬어.’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조카손녀가 매일같이 방문하여 돌봐주는 것도 조금 신기하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환자 케어라고 생각하면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진다.
“그럼 지금 여기 계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병원에 입원하셔야 될 것 같은데…….”
“가도 별 소용은 없어요. 어차피 치료할 방법도 없거든요. 이미 몇 군데 전이 되기도 했고…….”
담담하게 이어지는 이정혜의 말.
“고작해야 연명치료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이 나이에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냥 나 하고 싶은 거나 하고 그리웠던 얼굴이나 실컷 봐두는 게 낫지.”
그렇게 말한 이정혜의 얼굴에는 맑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 * *
이정혜는 초탈해 보였다.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 같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다가올 듯 다가오지 않아서 내 애간장을 다 끓이던 그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나타날 결심을 했는지 궁금해졌지 뭐예요. 본래 한번 마음먹으면 참 독한 양반이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더 이로운 씨 귀찮게 군 것도 있고요.”
사소한 실수 하나를 일부러 저지를 때마다 안달복달하는 이호를 보는 것도 나름대로 꽤 즐거웠다고 한다.
그리운 한편, 멋대로 도망간 이호가 밉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은 긴 시간 동안 풍화되어 오히려 그리움이 그 자리에 쌓였다.
“조금만 더 일찍 나타나지. 남은 시간도 없을 때가 되어서야 이렇게 간신히 얼굴을 보여 주다니. 참 나쁜 사람이죠?”
이호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분이니까 걱정을 하셨던 거구나.’
오래도록 이정혜를 봐 온 이호다.
게다가 그에게는 앞날을 볼 수 있는 능력과 뛰어난 감이 있었다.
분명 뭔가 이상함을 느꼈던 것이리라.
-그 별일이 없는 게 이상한 거라니까? 별일이 벌써 있어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니까 그렇지!
이호가 초조해하면서 꺼냈던 말이 영 허튼소리는 아니었다.
이미 별일은 엄청나게 있었다.
그걸 당사자가 꼭꼭 숨겨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지.
그간 보는 사람마저 초조하게 만들던 이호의 반응이 떠올랐다.
그래서였다.
“그래도 이호 님이 정혜 님을 많이 걱정하셨어요.”
로운이 자신도 모르게 변명 한마디를 보태게 된 것은.
“저를 찾아내려고 피를 줄줄 토할 만큼 고생도 하셨던 것 같고요.”
딱히 이호의 편을 들어주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초탈하고 초연해 보이는 이정혜의 웃음이 어째서인지 로운에게는 씁쓸해 보였던 탓이다.
“그분이… 그랬어요?”
이호가 직접 개입하기 어려워 로운에게 부탁한 것까지만 알지 그 비하인드는 몰랐던 듯 눈이 커다래졌다.
“네. 정혜 님을 제가 도울 수 있던 것도 사실 이호 님이 미리 알려 주신 덕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전부 다 말씀이신가요?”
“미리 가서 저를 대기시켜 놓더라고요.”
“이런. 그분이 마음 놓고 떠나지 못하게 허술한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게 로운 씨를 번거롭게 해 드렸었군요.”
“아뇨. 그런 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조금 거들어 주려던 것이 어째 이호를 변호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왠지 지금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만큼 정혜 님을 염려하신다는 거죠. 특히 건강을 엄청나게 신경 쓰시더라고요.”
이정혜의 커다란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왜 그런지 사실 이해를 잘 못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하시는 말씀 들으니… 이호 님이 걱정하셨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싶어서요.”
로운이 머쓱하게 말을 끝내자 이정혜가 곰곰히 생각하는 것처럼 굴더니 한마디를 꺼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저도 짐작가는 게 하나 있긴 하군요. 제가 암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말씀드렸었나요?”
“아니요.”
“얼마 전 받은 건강 검진에서였어요. 이 나이 먹고 말하기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가 과거의 일 때문에 병원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이걸 우리 윤서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자꾸만 건강검진 받으라고 받으라고 저를 졸라 대더라고요. 그러더니 어느날 무료 건강검진 이벤트에 당첨됐다고 팜플렛을 받아 오지 뭐예요?”
“혹시 그거…….”
“네. 생각하시는 게 맞을 거예요. 아마 그분이 손을 쓰신 거겠죠.”
그래서였나 보다.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한 것부터가 뭔가 걸려서 그랬던 건데 그 뒤 후속조치가 없으니 자꾸만 이상하다고 하셨던 거구나.’
그래서 혼자 속을 끓이다가 로운을 찾아 전국을 뒤지면서 피를 토했던 것이고.
[흐으음. 그놈이 그래도 제법 신경은 썼구나.]청화에게도 의외였는지 날 서 있던 태도가 누그러졌다.
“안 그런 척하시면서도 워낙 다정하신 분이니까요.”
다정……?
‘뭔가 서로 캐릭터 해석에 이견이 있는 거 같기는 한데…….’
로운과 청화가 잠깐 혼란에 휩싸인 사이, 이정혜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원망도 그분의 잘못은 아니에요. 내 마음대로 품고 내 마음대로 키운 마음이니까. 그 책임을 그분께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아이가 귀찮을 법도 하지만 이호는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할 시간 동안 내색없이 함께 다니며 약속을 지켰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투정이 맞겠네요. 그분의 다정함에 기댄.”
그렇게 말을 맺은 이정혜가 조심히 부탁했다.
“오늘 일은 가능한 비밀로 해 주겠나요?”
은밀하게 이루어진 회동뿐만 아니라 그녀의 와병 사실도 포함된 부탁이었다.
“간신히 이만큼 다가오신 분인데, 제가 알면 또 멀리 도망가 버릴지도 몰라요. 이제는 기다릴 만한 시간도 없으니…….”
이정혜가 담담히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끝을 점쳤다.
“게다가 그분이 아셔 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괜히 속상하기만 하실 거예요.”
끝까지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를 위하는 배려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아쉽지만, 그 덕에 이호 님이 이렇게 가까이 오고 그분 소식도 이렇게 듣게 되니 좋기만 한걸요.”
이정혜가 로운을 위로하듯 도닥이며 말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들어준 것만해도 충분히 고맙답니다. 일기를 쓰는 심정으로 지금껏 글로 쓰고는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한 번은 이렇게 얘기해 보고싶었나 봐요.”
속이 다 후련하다는 기색으로 이정혜가 웃었다.
당당하면서도 개운한.
그런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언뜻 비치는.
수많은 감정이 녹아 있는 그런 미소였다.
* * *
뜬금없이 이루어졌던 은밀한 회동은 그만큼 빠르게 끝이 났다.
이윤서가 데리러 올 시간이 됐다는 얘기에 로운과 청화도 철수하기로 한 것이다.
‘이호 님한테 부탁받은 게 있기는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마냥 자리를 지키고 있기도 좀 그랬던 것이다.
[뭘 걱정하느냐? 별일 없을 것이다. 내 기운의 일부를 정혜 씨에게 남겨 두었으니 무슨 일이 있다면 어련히 알게 될 것이니. 그나저나…. 정말 그럴 예정이느냐?]“정혜 님도 동의하셨고 해 봄직하죠. 청화 님도 그러셨잖아요. 이대로 가면 미련만 남을 거라고.”
[그렇기는 하지만.]제멋대로 지상에 내려와 휘젓고 다니며 인연을 만들지를 않나.
만든 건 백번 양보한다 쳐도, 마무리조차 제대로 짓지 않다니.
“그 미련이 위험하다면서요.”
[끄응. 그만한 영력을 지닌 놈이 미련 때문에 정도를 잃어 행여 선적에서 지워지기라도 하면 곤란한 건 사실이다. 규율에 매이지 않은 커다란 힘은 위협적이니까. 지상도 그 여파에 휩쓸릴 테고 말이다.]“그러니 미련 따위 가지지 못하게 해야죠.”
[그 말 또한 맞도다. 그러나 행여 역효과라도 나면 어떡하느냐?]청화가 걱정스럽다는 듯 뱅글뱅글 돌았다.
“당연히 상황 봐 가면서 해야죠. 아니다 싶으면 중단 사인 보낼 거고요.”
[흐으음. 알았다.]“제가 신호 보내면 청화 님도 미리 했던 약속대로 진행하시는 거 잊으시면 안 돼요.”
[아, 당연하지. 나를 뭐로 보느냐!]이정혜와 헤어지기 전.
로운은 생각했다.
‘이게 과연 최선일까?’
하고.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왜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데 만나지를 못하는가?
‘아, 뭔가 답답한데. 약간 밤 고구마 먹을 때의 그 느낌 같기도 하고?’
그래서 로운은 직접 사이다를 제조하기로 했다.
물론 인생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니 모든 일에 사이다가 따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손놓고 있으면 답답한게 해결되냐고!’
적어도 지금 상태가 지속되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알았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로운은 한 가지 방법을 이정혜에게 제시했다.
처음 이정혜는 로운의 계획을 듣더니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재미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상냥하신 분이로군요.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그나저나 벌써 기대가 되네요. 그분이 얼마나 놀라실지.
이정혜의 허락도 받아냈겠다.
로운은 거칠 것이 없었다.
[하여간 네 녀석 계획대로 된다면 볼 만하겠구나.]“그쵸?”
[그치만 표정관리 잘하려무나. 네 얼굴, 지금 꼭 여우 한 마리 잡을 것만 같구나.]“에이, 설마요.”
로운이 원하는 것은 원만한 의뢰의 해결이지 여우를 잡는 건 아니다.
그러기 위한 작당모의 아니던가.
‘애초에 천 년 넘게 묵은 존재를 내가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만, 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최선을 다할 뿐.
그 결과는 이제 곧 알게 되리라.
그렇게 다음 날이 밝았다.
“별일은 없었고?”
약속된 시간에 맞춰 나오던 이호가 멈칫했다.
뭔가 이대로 가다간 뼈도 못추릴 것 같은 본능적인 위기감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
그리고 그 끝에는.
“왜 멈추세요? 얼른 오셔야죠.”
화사하게 미소 짓는 로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