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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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제작자를 구한다고 했더니 그대들을 추천한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아, 정말입니까? 최근 들어 마땅히 일을 하지 못했었는데.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참 감사한 일이군요.”
“듣기로는 요나스, 그러니까 이쪽 아이가 지도를 제작할 수 있다던가?”
“예. 맞습니다. 제 아들자식 되는 놈입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영특해서 제 할 일은 곧잘 해내는 놈입니다. 허허허.”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막스는 여전히 허허허 하고 웃는 버릇이 남아 있었고, 요나스는 막스의 옆에서 쭈뼛거리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가슴 한복판이 꾹 막힌 것 같았다.
“다행이군.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자네들에게 의뢰할 내용은 디켄터 산맥의 지도를 그리는 일이네. 다만, 가문에서 마수 토벌을 진행하지 않은 지 꽤 되어서 마수의 수가 제법 불어났다네.”
“그래서 지도 제작자뿐만 아니라 호위 용병도 함께 구하셨던 거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작님. 이래 봬도 젊었던 시절에는 제법 힘이 좋았습니다.”
“말만 들어도 든든하군. 그럼 오늘은 공작저에서 쉬고, 내일부터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요나스, 일을 의뢰해주신 공작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려야지.”
막스가 요나스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요나스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큰일도 아닌데 뭘. 그보다, 아이의 체격에 맞는 장비나 물건이 추가로 필요하다면 이쪽에서 따로 알아봄세. 편하게 물어보게.”
“그, 그런 은혜를. 정말 감사합니다!”
막스가 연거푸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나는 요나스의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의 동그란 눈은 약간의 경계와 호기심을 함께 담고 있었다.
잠시 그걸 보다가 요나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오늘은 푹 쉬어.”
손바닥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정말 뭘까, 이 기분은.
* * *
아멜리아는 최근 며칠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하르트만 공작이 사고를 당한 시종 대신이라며 붙여준 아른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었다.
공작이 성을 비울 때까지만 해도 한산했는데, 돌아오면서 손님을 엄청나게 끌고 온 탓이었다.
아멜리아는 하르트만 공작가 소속의 하녀와 하인들이 귀족들을 수발드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뻔하다. 단순한 잡일만 시킬 요량으로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평민을 급하게 데리고 온 거겠지.
하긴, 경력 많은 고용인이 왜 하필 한 번 주저앉았던 공작가에 오고 싶어 하겠어.
갈 수 있다면 차라리 다른 곳을 가겠지.
어쨌든, 그렇게 엉망인 사람들을 성에 채워두었으니 손님맞이에는 내보내지도 못할 터.
그나마 귀족식 예법을 알고 있던 가엾은 아른트만 고생하는 꼴이었다.
공작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람?
아멜리아는 아렌하이트 공작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없었다.
뒤틀린 첫인상이 깊게 남아버린 데다가, 유의미한 대화조차 나눈 적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임시 시종이 된 아른트조차 양해를 구할 정도로 허덕이는 걸 보니 안 그래도 부정적이던 인상이 더 악화 되었다.
아멜리아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반쯤은 아렌하이트를 욕하고, 또 반쯤은 공작에게 항의도 못 하는 아른트를 미워하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낮에서 해 질 녘, 해 질 녘에서 초저녁까지.
시간이 흐르는 내내 가만히 누워있던 아멜리아를 방문하거나 살피는 것은 그녀의 시녀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저녁은 드신 거 맞냐, 반 그릇 이상 드셨냐, 의원이 지어준 약은 버리지 않으셨냐.’ 확인하러 왔을 아른트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멜리아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아른트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부아가 치밀어 벌떡 일어났다.
내 거라며?
나한테 임시로 붙여준다며?
그런데 대체 왜 ‘내‘ 시종이 아닌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였다.
아멜리아의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출입을 허락하자, 문 뒤에서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얼굴이 쏙 튀어나왔다.
“아직 취침 전이시죠? 약은 다 드셨습니까, 영애?”
“이, 이제 와서!”
왜 이렇게 늦게 묻는 건데!
지금이면 약을 버리고도 남았겠어!
아멜리아는 표독스럽게 소리쳤지만, 아른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의 품 안에는 아멜리아가 보지 못했던 종이 뭉치가 그득했다.
아른트는 그걸 보이지 않게 탁자 위에 엎어두고, 아멜리아가 자는 중에 감기에 걸리지 않게 무거운 커튼을 도로 내려주었다.
“죄송합니다, 남작 영애. 내일 상단 대표자들의 만찬이 있는데, 좌석 배치가 있어서 공작님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늦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사, 상단 대표자들과 연회를, 해?”
“영애께서도 손님이시니 원하신다면 참석하시지요.”
“시, 싫어.”
사람 많은 곳에 내가 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멜리아는 아직도 바짝 말라서 흉한 제 손을 내려다봤다.
자신이 지금 보기 좋은 꼴이 아니라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커튼을 내리고 수면에 도움이 되는 향을 피우느라 뒤돌아 서 있는 아른트를 흘긋 쳐다봤다.
그녀는 아른트가 엎어두었던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작 손님 배치가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공작이 아른트를 내내 잡아두었는지 궁금해서였다.
처음에는 살짝만 볼 생각이었지만,
아른트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릴 때까지 아멜리아는 종이를 놓지 못했다.
“아, 그건 보시면 안 됩니다!”
“이, 이 사람들은, 왜, 같이 붙여서, 두, 둔 건지…….”
“네?”
아른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눈은 종이에 꽂혀 있었다.
“이, 이 상단. 들어 봤, 어. 여기, 옆에 있는, 사, 사람 조부와, 수입 푸, 품목이 겹쳐서. 그래서, 사, 상단에서도 문제가 되고, 또, 나, 나중에는 개인적으로도…….”
“잠시만요. 그러니까, 여기 이분이 바로 옆에 앉으신 분과 여러모로 골치 아프게 얽혀서 별로 관계가 좋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득을 다투는 이들끼리 서로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사이가 좋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른트는 고민을 잔뜩 떠안은 얼굴로 아멜리아와 함께 만찬 손님 배치도 초안을 들여다봤다.
“그럼 끝자리에 앉히는 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감히 여쭐 수 있겠습니까?”
“호, 혹시 이 사람을 와, 완전 푸, 푸대접……?”
“아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혹시 그렇게 비칠까요?”
“응.”
“제가 상단 쪽은 잘 몰라서…….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무래도 공작님과 다시 상의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멜리아는 시무룩한 아른트의 얼굴을 보고 확신했다.
아른트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멜리아가 알기로 아른트 역시 귀족 출신은 아니었던데다, 근 몇 년 동안은 아렌하이트와 레안드로스 경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했으니.
그가 귀족식 예법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기적이지.
아멜리아의 검지가 배치도 위를 짚었다.
“나, 나도 잘 모르지만, 우, 우선은 유명세에 맞게……. 그, 그리고 여기, 관계가 좋지 않다거나 하면, 이렇게 맞은편으로. 그리고 끝자리는, 말석으로, 비, 비칠 수 있으니까. 이런 탁자 말고, 좀 다른 형태로. 응. 이, 이렇게 해서.”
아멜리아가 더듬거리며 말하는 내내 아른트는 신중하게 귀담아들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서서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자리를 찾아서 앉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른트는 궁금한 게 많은 학생이었고,
아멜리아는 소심하기는 해도 최대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해주는 좋은 선생이었다.
아멜리아와 아른트는 수면향을 피운 보람도 없이, 향이 다 타들어 갈 때까지 내내 질의를 계속해나갔다.
논의가 끝날 무렵인 늦은 밤, 아른트는 변경된 배치도를 그려보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아멜리아의 방에는 뜻밖의 손님이 방문했다.
아렌하이트 공작은 손에 배치도를 들고 직접 그녀를 찾아와서 물었다.
“아른트가 말하기로는 영애가 이 배치도를 그리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군요.”
“마, 맞습, 니다. 무, 무슨 문제, 라도……?”
“영애에게 몇 가지 더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듣자 하니 상단주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다고.”
“오, 오래된 일이라. 그, 그렇게까지 자세하거나, 최근에, 이, 일어난 일까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혹시 이 두 상단에 얽힌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아멜리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지만, 자신이 죄가 되는 일을 한 것도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아렌하이트 공작은 꼭 아른트처럼 진중한 표정으로 그녀의 설명을 들었다.
그 후로도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고, 아렌하이트는 모든 것에 납득한 것인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빼앗게 되었군요.”
“아, 아닙……니다.”
“배치도를 그리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영애가 부집사장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르더군요.”
아멜리아의 얼굴이 순간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짧은 순간 강렬한 수치심이 몸을 꿰뚫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절대 나서지 않았을 텐데.
아멜리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아렌하이트는 지나가듯 툭 던졌다.
“다시 할 생각은 없나요?”
“네, 네?”
“부집사장 말입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영애는 아직 일을 하는 게 즐거워 보이던데요.”
“그, 그렇지 아, 않아요. 아, 아직 건강하지 못해서, 오, 오히려 폐가 될 테고. 게다가, 또…….”
“건강은 여기 온 후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두통은 어떤가요? 구역감이나 피로도는? 전에는 산책도 나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그건.”
그런가?
아멜리아는 공작이 짚어준 부분에 대해 생각했다.
옛날에는 마치 머리가 꼬챙이에 꿰뚫린 것같이 아팠지만, 지금은 좀 덜했다.
메슥거려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속도 한결 편해졌고.
마치 기절하듯 하루 내내 자는 것도 드물어졌다.
눈을 뜨고 있는 건 여전히 괴로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오랫동안 깨어있을 수 있었다.
하르트만에서 요양한다는 게 유효한 선택이었던 걸까?
자신에게는 깨끗한 공기와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걸까?
공작저로 올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게 일어난 일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자신은 금화에 팔려 왔고, 가문의 하인은 의문스러운 사고사를 당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마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는 기분이 드는 건, 너무 이상한 생각일까?
아멜리아는 생각했다.
‘내가 미쳐 가나 봐.’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솔직히, 어제 아른트와 업무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눌 때는 약간 즐겁기까지 했다.
아멜리아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살피던 아렌하이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무리한 요청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영애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시종이자 영애께 빌려드렸던 아른트가 최근 과로하고 있어서요.”
“과, 과로요?”
“아무래도 성의 일에 익숙한 사람이 아른트밖에 없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이런 걸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 그럼, 추천서를 받은 다, 다른 가문의 고용인을, 데, 데리고 오거나.”
“하지만 추천서를 받은 멀쩡한 가문의 고용인이 공작가에 올 확률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아멜리아는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이 했던 생각을 공작에게 들킨 것 같았다.
아렌하이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러모로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당장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꾸려나가야겠죠. 실례했습니다, 영애. 푹 쉬시길.”
아렌하이트가 돌아서는 찰나의 순간.
아멜리아는 아른트의 거뭇거뭇한 눈그늘과 살짝 충혈된 눈의 흰자위를 떠올렸다,
안 그래도 부스스한 머리가 평소보다 더 부풀어 있는 모습과,
뭐든 서둘러서 빨리 끝마치려고 하던 습관,
어제 끌어안고 오던 두툼한 종이 뭉치…….
“자, 잠시만……요!”
“네, 왜 그러십니까?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그게, 부, 부집사는! 다, 당장은 조금, 제가 정말로, 많은 생각을 해야, 그,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하, 하지만 조, 조금이라면. 도, 돕는 정도로, 그러니까!”
두서없는 말이 쏟아졌다.
아렌하이트는 순진하게 보이는 갈색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겨, 결론적으로.”
이건 안 될 짓이야.
이런 제안을 한 하르트만 공작 자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이상한 사람과는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잖아.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옛날에 저질렀던 그 죄를 이걸로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다면.
아멜리아의 성마른 손이 치맛단을 꼭 쥐었다.
“조, 조금이라면, 도, 도와드릴, 수 있, 있을 것 같, 은데, 요.”
대답을 들은 아렌하이트의 얼굴이 봄날의 새순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이번 생의 아멜리아가 하르트만 공작가로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