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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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단?
이제까지 내려왔던 길을 되돌아봐도 출발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득히 높은 곳까지 이어져 있는 계단만 계속될 뿐.
아래를 내려다봐도 마찬가지였다.
허공 속에 나와 계단만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가던 방향으로 쭉 내려가기로 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서는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예감이 들었다.
느리지만 부지런히 발을 옮긴 끝에 내 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뜬금없이 문만 덜렁 있는 건 또 처음 보는데.
문 주변을 돌아다니며 잠시 관찰했지만, 문의 앞과 뒤는 똑같았다.
이쪽에서 연다고 해도 바로 반대쪽으로 통하기만 할 텐데.
문의 역할을 못 하는 문이 왜 여기에 있을까.
단순히 호기심에 문을 두드려보다가, 열리기는 하는지 확인하려고 슬쩍 밀었다.
돌쩌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건 어둠이 아니었다.
“……숲?”
축축하게 습기를 머금은 공기.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로 작게 나 있는 오솔길.
틀림없이 숲이었다.
하지만 이제껏 봐온 숲과는 어딘가가 달랐다.
하늘은 보라색, 달이 두 개.
꿈틀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가진 앙상한 나무.
문 안으로 발을 내딛자 모호한 물체를 딛는 감각 대신 파슬거리는 흙바닥의 촉감이 확실히 전해졌다.
좁은 길의 한복판에는 흐릿한 인영이 서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데도 뭔가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는 기분.
내 뒤에서 문이 스스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무사히 도착했군. 다행이야.”
심지어 목소리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누구였더라.
“저, 죄송한데 저희가 어디서 만났나요?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실례되지만 성함이…….”
“이름만큼 허무한 것이 또 있을까. 네가 생각하기에 나는 누구인 것 같나?”
“그, 누구였더라.”
그것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정체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익숙한 외모였지만 가끔은 전혀 다른 얼굴로 보이기도 했다.
쉴 새 없이 바뀌는, 나를 지나쳐간 사람들의 초상을 연속적으로 보는 기분이었다.
얼굴은 점차 빨리 바뀌었고, 그 속에서 익숙한 형상과 그렇지 않은 것을 찾기 어려워졌다.
그것은 그저 얼굴만 들여다보는 내게 다시 물었다.
“다르게 생각해보지. 네가 가장 익숙한 얼굴은 어떤 거지?”
답도 아직 하지 못했는데, 질문과 동시에 외모가 하나로 멈추었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죽어버린 동생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대꾸했다.
“동생을 떠올린 건 맞지만, 이 얼굴을 남에게서 보고 싶진 않은데요.”
“그럼 그다음으로 익숙한 사람을 고르면 되겠군.”
얼굴이 다시 바뀌었다.
전체적으로 레안드로스를 닮은 외모였다.
내가 알고 있던 레안드로스는 머리카락 색부터 눈동자까지 온통 새카맸지만, 이쪽의 레안드로스는 온통 새하얬다.
“좀 낫네요. 하지만 그쪽이 레안드로스일 리가 없는데요. 걔는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겉이 같다고 속까지 같을 수는 없지.”
“그런데 진짜 누구세요?”
“너를 드림랜드로 피신시킨 장본인. 너와 함께하고 있는 운명 공동체, 그리고 위대하신…….”
“너 눈사람이지? 갑자기 문장을 제대로 구사하니까 못 알아봤네.”
“바로 말을 놓는군. 그딴 식으로 빠르게 태세 변환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있네.”
“됐고 여기는 어딘데?”
“방금 말하지 않았나. 드림랜드라고.”
드림랜드.
원작에서는 나온 적 없는 것 같은데.
눈사람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자 한숨을 쉬며 앞장을 섰다.
“좀 걸으면서 이야기하지.”
숲은 이상했고, 내 앞에서 걸어가는 백발의 레안드로스의 형상을 띤 눈사람은 더더욱 이상하게 보였다.
이 사지 멀쩡하게 생긴 놈이 내가 알던 얼음덩어리라고?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드림랜드는 이렇게 급하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입장을 하려는 사람들은 꿈에서 계단을 발견해야만 하지. 일흔일곱 개의 계단을 올라 문지기를 거치고, 깊은 꿈으로 입장해 다시 칠백일흔일곱 개의 계단을 넘어서면 드림랜드로 이동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나도 계단을 내려오긴 했는데.”
“하지만 문지기는 마주치지 않았고. 그건 네가 이미 깊은 꿈에 빠진 상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깊은 꿈?”
“그래. 현실의 네 몸은 얼려져 있거든.”
뭐라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한국에서도 SF소설 소재로나 등장하던 냉동인간을 여기서 실현했다니.
아직 안전이 검증되지도 않은 오버 테크놀로지를 내 몸에 실험하게 되다니!
“대, 대체 왜 그랬대? 누가 시켰어?”
“잘 기억 안 나는 모양인데. 너는 돼지 인간들에게 먹혔어.”
“돼지 인간이라면, 그.”
‘돼지 인간’이라는 단어를 주워섬기자마자 플래시백처럼 어떤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눈, 주둥이, 발굽, 더러운 진창.
설명할 수 없이 불쾌한 기분에 말을 멈추자 눈사람이 대신 이어갔다.
“글리코 마을에서 있던 일이지.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너를 살리기 위해 현실에 있던 인간 여자와 기사가 결정한 일이다. 드림랜드라는 발상은 내가 제안했다.”
“네가 원인이었네.”
“그대로 두면 유일한 신자가 죽을 테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너는 드림랜드로 와야만 했어. 그 시간이 당겨진 것뿐이다.”
“내가? 드림랜드로 와야 했다고? 왜?”
“왜라니. 나를 알현했을 때 했던 말이 기억나지 않는가?”
북부에서 아품 자를 알현했을 때?
-꿈에서 나를 만나라. 나를 숭배하고, 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며, 내게 꿈이 아닌 것들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를 섬기지 않고 나를 믿지 않는 나의 종이여. 드림랜드로 오거라.
“혹시 그 드림랜드가…….”
“꿈과 꿈의 사이. 실존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 인간이 사는 세상과 다르지 않지만 네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이지.”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그렇지. 드림랜드에 온 인간들은 모든 불가사의의 비밀을 밝혀내고, 수천 년도 더 전에 가라앉은 대륙의 신비를 풀 수 있지. 아품 자의 신자인 네게도 많은 것들이 안배되어 있고.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지만.”
해야 할 일?
올려다본 하늘 위로 두 개의 달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내 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푸르릉.
뒤를 돌아보자, 나와 눈사람이 지나왔던 길에 검은색 말이 서 있었다.
갈기가 늠름한 슬레이프니르가 가넷 같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슬레이!”
살아 있었다니!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슬레이 쪽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했는데 슬레이의 몸이 흙바닥에 허물어졌다.
왜?
슬레이의 몸에 달라붙은 그림자가 서넛 있었다.
몸이 우락부락하게 부푼 것들이 바닥에서 발길질하며 허우적대는 슬레이의 몸을 뜯어먹고 있었다.
아예 말의 몸에 머리를 처박고 살아있는 살코기를 뜯던 놈들에게서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꾸웨엑, 꾸우욱,]흠칫거리던 몸이 굳었다.
슬레이가 히히힝, 하고 높게 울 때마다 빨간 눈이 생기를 잃어갔다.
숲의 한쪽 편에서는 날갯짓하는 생명체들이 한 무더기 날아올랐다.
소리가 들린 방향,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노란 황금의 망토를 걸친 동생의 몸이 올가미에 걸려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동생의 손에는 두꺼운 붉은 책이 들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낡은 교수형 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불타는 석양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아렌하이트, 너는 외계에서 온 이방인의 그릇으로 태어났단다.]교수형의 관중은 기억에서 흐려진 엄마. 그리고 술에 취해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아빠.
보일러실에서 검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찌그러진 양푼 냄비는 아무리 요란하게 두드려도 돌아올 수 없다. 교수형 당한 시체들은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실려 가는 상품처럼 하나씩 이동한다. 그 끝에는 유릭이 미치광이처럼 웃음을 터뜨리면서 직접 죽은 사람의 목에 검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니까, 그 죽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부 빨간 머리고, 어떤 것은 잘렸고 어떤 것은 사지가 없고 어떤 것은 가슴이 뚫려서 나를 비난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뒤에서 하얀 레안드로스가 웃었다.
“자신의 과오는 자신이 처리해야지. 드림랜드잖나. 꿈나라가 언제까지고 아름다운 별세계일 줄 알았어?”
드림랜드에 살고 있는 괴물은,
이 몸에 잠들어 있던 트라우마라는 괴물이었다.
* * *
디켄터 산맥의 마수부터 북부의 괴물들까지 상대했던 레안드로스에게 돼지 인간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돼지 인간은 근력이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강했고 뭐든 먹으려는 습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힘이 센 용병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진 그날 밤,
레안드로스가 끈적끈적한 체액을 뒤집어쓰고 마지막 돼지 인간의 머리를 깨부쉈을 때.
그 장소에서 살아있던 사람들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뇌수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에 돼지 인간의 시체를 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수를 만났을 때와는 다른, 또 다른 공포.
레안드로스는 그런 마을 사람들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하르트만 공작가의 기사다. 새로운 공작님께서는, 바로 여기, 글리코에서 주민들이 벌이고 있던 잔악무도한 행태를 일찍이 접하시고 깊은 유감을 표하셨다.
-자, 잠시만. 하르트만 공작가에서, 어째서 지금 같은 순간에……. 증거, 증거를 보여!
-그게 중요한가? 원래대로라면 영지 대리인에게 보고한 후 너희들은 왕국 법에 따라 전부 처형되어야 마땅할 터. 목격자가 공작가의 기사든 용병이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레안드로스가 던진 돼지 인간의 시체는 쿵, 하는 무거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머리가 반쯤 사라진 돼지 인간의 시체를 본 사람들은 새하얗게 질렸다.
마을 사람들이 공모하여, 여행자를 죽이고, 시신을 유기하고, 살인을 은폐했으니.
누군가가 악을 썼다.
-우리가,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야! 마수가 나타났으면 용병이 와줬어야 했어! 하지만 그러지 않으니까 자기방어를 할 수밖에 없던 거라고!
-대리인의 잘못도 있어! 대리인이 계약한 용병 단이 허술했다고! 대리인을 불러!
-대리인을 부르라고? 대리인이 순순히 자신의 실책이라고 말할 것 같나? 이 농장의 모습을 보고도?
레안드로스의 서슬 퍼런 모습에 다시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일어났다.
-나, 나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나는 여기에 끌려오기만 했어. 마을 사람들이 뭘 했는지는 알겠지만 나는 이 사람들을 돕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너, 저 구덩이를 더 깊게 파는 걸 도왔잖아! 나야말로 아무런 잘못 없어!
-나도, 나도! 나는 그냥 농기구를 좀 빌려줬을 뿐이야! 여기에는 사람들이 떠밀어서 온 거야!
눈치를 보던 주민들은 저마다 벌떡 일어나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자신이야말로 죄가 없다, 여행객들이 죽었던 건 모르는 일이다,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었다.
모든 아우성을 뚫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그래봤자 대리인의 입장에서는 마, 마을 단위의 공모. 다들 벌을 피해 가지 모, 못하겠죠.
-아냐, 절대로 그럴 리가…….
-제, 가 한 가지 사, 살아날 길을 알려드리죠.
살아날 길이라는 말에 아멜리아에게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잠든 아렌하이트를 눕혀두고 올라온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게 사람의 본성이라니.
그녀는 구역감을 애써 눌러 참으며 제안했다.
-하르트만, 공작가에 속하는 겁니다.
-공작가에 속하라니. ……다시 공작령이 되라는 소린가?
-결과적으로는 그렇, 겠죠. 지, 지금은 임시로 왕실 직할령에 분류되어 있지만, 워, 원래는 공작령이었고, 언젠가는 그, 그렇게 될 테니. 하지만, 여러분의 동의가 있다면, 더욱 빠, 빨리 공작령으로 변경될 수 있겠네요.
-공작령이 되면 새 공작님이 이걸 다 눈감아주시기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그 말대로.
-뭐……!
-공작령이 된다면, 영지민의 처분은 영주의 손에 다, 달린 것. 그러니 왕국 법을, 따르지 않더라도 이상할 건 없죠.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거야? 당신이 그렇게 만들 수 있어?
아멜리아는 턱을 살짝 당기기만 했다.
하지만 그 침묵과 가벼운 제스쳐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혔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용병도 오지 않는 농가,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겁에 질려 아무런 의견도 제시할 수 없게 된 이 상황은 레안드로스와 아멜리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아멜리아는 조소했다. 지나치게 운이 좋은 게 아니냐며.
글리코 마을의 농가에서 벌어진 사건은 당분간 누구에게도 보고되지 않을 예정이었다.
마을 주민의 수가 부쩍 줄어든 것 하며,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여관에 모이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해서.
레안드로스와 아멜리아는 사전에 약속받은 말을 받고 바로 마을을 떠났다.
그들은 아렌하이트라도 좋은 꿈을 꾸고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