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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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안드로스는 이게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었다.
뒤로 가면 금세 돌아갈 수 있건만, 앞으로 가면 계속해서 집과 담벼락이 번갈아 나타날 뿐이었다.
마치 다른 길로 빠지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이.
레안드로스는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대로 마을을 떠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공작님은 그럴 마음이 없으시겠지.
레안드로스는 냉정하게 가능성을 하나씩 따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감각이 이상해진 것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환각을 일으키는 독초나 약에 영향을 받고 있는 걸까?
하지만 갤로에 온 이후로 여관에서 한 식사 외에는 다른 걸 입에 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관의 음식은 커다란 솥에서 다 같이 펄펄 끓이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음식을 먹은 다른 사람들, 가령 마을 주민들도 같은 증세를 겪어야만 했다.
역시 지금 가장 큰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레안드로스는 가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 * *
“아마도 아티팩트겠지. 그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아.”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길을 잃도록 유도하는 건 그렇다 치자.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제갈공명 선생은 팔진법을 고안해냈고,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병법 중 한 가지로 진법을 꼽았다.
이건 마법이 아니라 엄연히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낸 결과다.
하지만 지붕 위로 올라갔는데 무한히 펼쳐진 끝없는 건물들이 보인다?
이 정도면 마법이지.
방향 감각만 헷갈리게 만드는 걸 넘어서서 시각적으로 교란을 주고 있는데,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하지만 어떤 아티팩트인지 감도 안 잡혀. 애초에, 아티팩트라는 게 어떤 물건인지도 잘 모르겠어.”
“이, 일반적으로는, 그런 힘을 담은 물건이기도 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는 공간 자체에, 그, 그런 힘이 있어서.”
“이 마을 전체가 아티팩트라고 하면 그것도 좀 어려운데.”
“마을을 통째로 없앨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그러면 차라리…….”
외곽으로 나가기 위한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딱히 진전은 없었다.
한참이나 입씨름하던 차에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이쪽의 마법에 대해서, 아티팩트에 대해서, 그리고 마법을 구현하는 방법이 적힌 책에 대해서.
“잠시만.”
“공작님?”
마도서의 표지는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책이 흔하지 않은 곳이니 금방 찾을 수는 없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책은 단 하나뿐이다.
구석에 놓인 짐 상자를 뒤지자 안에 들어있던 것이 와르르 쏟아졌다.
옷이나 천, 위급할 때를 대비한 약, 노숙을 대비한 깔개, 모포.
그런 잡다한 것을 치우자 맨 아래에서 빨간색이 얼핏 보였다.
묵직한 장식이 딸린 책이 겨우 끌려 나왔다.
하르트만의 예언서.
이제까지 내가 없던 세상을, 몇 번이고 반복되었을 회귀를 기록한 책.
이 기록이 누구에 의해 쓰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게 하르트만이 숭앙하는 그 신과 관계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떨리는 손으로 단단한 표지를 열자 언젠가 읽었던 구절이 나타났다.
[아렌하이트의 몸을 입은 이계의 이방인은 아렌하이트의 업을 대신 짊어질 것이다.]본래 이게 마지막 페이지였을 텐데.
그 뒤로 이어져 있던 누런색 종이 위에는 읽은 기억이 없던 도식과 삽화, 그리고 텍스트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마수, 신, 이상한 구조를 갖춘 물건과 건물, 행성의 움직임과 별의 궤도를 설명한 지도.
누군가가 정교하게 그린 삽화와 그림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했다.
텍스트 위로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글자 하나하나가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완전히 마음을 뺏길 것 같이.
“고, 공작님!”
“어, 아?”
“머, 멍하니 빈 책만 보, 보고 계시는데. 괘, 괜찮으세요?”
빈 책?
다시 책을 봤지만 빈 페이지는 하나도 없었다.
“아냐, 비지 않았는데…….”
“네, 네?”
[아멜리아는 순간 아렌하이트가 이상한 줄로만 알았다.갑자기 이야기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짐을 죄다 파헤쳐놓질 않나,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책을 들고 멍하니 있질 않나.
글리코에서 일어난 일이 아렌하이트에게는 트라우마가 된 걸까?
아니라면 그 전부터? 도망자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아멜리아는 진심으로 아렌하이트가 걱정되었다.]
아멜리아 뒤로 서술이 주르륵 흘러갔다.
이런 젠장. 내가 미친놈으로 보이기 일보 직전이잖아.
“아무것도 아냐. 잠시 어지러워서 앉아있었어.”
“그, 그렇다면 지, 지금이라도 쉬시는 게 나, 낫지 않을까요……? 지금 이, 이렇게 저희끼리만 이야기해봤자 수, 수가 생길 것 같, 지는 않으니까요.”
“먼저 쉬십시오. 내일 아침에 어떻게 할지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답하며 나를 침대에 앉히는 것까지 도왔다.
내가 막 병상에서 일어나서 걱정이 되나 보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레안드로스와 아멜리아의 뒤에서 비슷한 서술이 둥둥 떠다녔다.
[아멜리아는 아렌하이트가 걱정스러웠다.최근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거나, 동결되었다가 돌아온 부작용은 아니겠지.
레안드로스에게 필히 상담해 봐야 할 문제였다.] [레안드로스는 공작님의 상태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음이나 정신처럼 섬세한 부분은 잘 모르는 탓에 아멜리아에게 상담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뭐지? 두 사람 엄청 친하게 보이네?
어쩐지 간병인들끼리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내가 친하게 만들어준 건가?
두 사람이 공손히 인사하고 객실을 나가자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책을 살필 겸, 나는 아예 누워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프나코틱은 한글도, 이 세계의 언어도 아니었다.
이 책의 언어는 체계라는 걸 갖추지 못한 조잡한 낙서 같았다.
하지만 그게 천재가 내키는 대로 끄적거린 낙서처럼 감미롭고 완벽하다는 게 문제지.
그렇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놓고 기술한 글은 끔찍했다.
이건 절대 인간의 시점에서 쓰인 글이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이 이다지도 방대한 분량의 마도서를 집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인간종이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의 눈을 통해 바라본 우주와 신, 그 너머의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단순히 ‘재미 삼아’ 만들어낸 엄청난 구조물과 오브젝트.
나는 유리창 하나 너머에 알 수 없는 거대한 공포가 꿈틀거리며 도사리고 있는 동안 실내에서 안락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책의 장점이었는데,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
얇은 벽 너머로 언제 여기를 침범할지 모르는 존재가 호시탐탐 이쪽을 엿보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벽이 나를 위험에서 지켜줄 완벽한 성채라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안전함과 두려움, 공포와 평화가 공존하는 기묘한 상태.
단두대에 맨 목을 내놓은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 같은 기분.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휩싸인 채로 책장을 넘겼다.
이 마을 따위는 가볍게 망가뜨릴 수 있는 힘이 책에 가득했다.
홀릴 것 같은 마음을 다잡고 눈에 힘을 줬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아티팩트, 아니면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신이나 마수가 분명히 여기에 있을 거다.
찾아보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있을 거고, 또 그렇게 되면 레안드로스도…….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아니지.
굳이 그래야 하나?
꼭 대처해야 해?
돼지 인간만 해도 그랬다.
그냥 알아보려고, 어떻게든 잘 해결해보려고 애썼지만 돌아온 건 없었는데.
고작해야 아멜리아와 레안드로스가 날 데리고 급하게 갤로까지 오게 만들기나 했지.
만일 그때 내게 이 마도서가 있었다면?
글리코에서 수상한 기색을 느끼자마자 바로 대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슬레이프니르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레안드로스나 아멜리아도 그 구덩이에서 나를 발견하지 않아도 됐었을 텐데.
아니, 일찍부터 마도서 프나코틱이 내게 있었다면, 유릭에게 그렇게 몇 번씩이고 내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첫 회귀를 하는 순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일을 오래 기억할수록 내가 더 빨리 미칠 거라고.
내가, 아렌하이트가 조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조연과 주인공에게 주어진 역할이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지난 회차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면 어떻게 이야기가 바뀌는지도 겪었다.
조연은 늘 이런 상태라는 걸 깨달아야 했다.
조연이 죽으면 주인공은 강해지고, 조연이 상처받을수록 주인공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나는?
여기 들어오고 싶다는 의지조차 없었던 내가 이야기를 끝내겠다는 결심만으로 겪어야 했던 일은?
슬레이프니르, 에리히, 어인, 별걸음쟁이, 북부 변경백, 검은 진흙, 차가운 설원.
내 앞에서 죽었던 요나스와 막스는?
지금은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 안에서 있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전 이야기에서 죽었던 인물, 파괴되었던 장소는 전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이번 회차에서는 이렇게 되었네요, 하면서 쓰다 만 인형처럼 내팽개쳐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른트가 조연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이 세상 속에서는 완전한 관조자가 아닐진대.
왜,
나만 이렇게,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거지.
내가 나약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낯선 세계로 떨어져서 끝도 없이 쳇바퀴를 도는 삶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손가락 옆에 그려진 삽화가 나를 비웃는 것처럼 흔들렸다.
하다못해, 내가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라도 있다면.
그 뒤로 일어난 일은 순전히 충동에 의한 우발적인 행동이었다.
* * *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레안드로스는 아렌하이트가 머무는 객실의 문을 두드렸다.
어젯밤 공작님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처럼 보여 계속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아멜리아에게 부탁할까 했지만, 남들이 보기에 이상할 수 있으니까.
“공작님. 깨어계십니까?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
“공작님?”
실례를 무릅쓰고 문을 천천히 열자, 방 한가운데에 아렌하이트가 주저앉은 채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추위를 방지하기 위해 비치된 작은 화로에서 꺼낸 숯과 재를 바닥에 시커멓게 문질러놓았고, 뭔가를 그린 종이도 흩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상하게 비리고 기분 나쁜, 매캐한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레안드로스는 함부로 방에 들어설 수 없었다.
아렌하이트는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래서였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레안드로스는 불쑥 묻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고 아렌하이트가 일어나기까지 망연히 지켜봤다.
아렌하이트는 비척거리며 일어나 문간에 얼어붙어 있는 레안드로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을 말이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을 세워봤어. 들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