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27
(26)
“아아아아, 유서 깊은 연회홀이……!”
“그렇게 절규할 시간 있으면 빨리 뜯기나 해.”
아른트는 훌쩍거리면서 벽에 붙어있는 장식을 긁기 시작했다.
그런 아른트를 잠시 감시하다가 나도 내 일로 고개를 돌렸다.
폐쇄한 연회홀을 다시 개방한 이유.
바로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해서다.
우리는 홀에 붙은 촛대며 벽의 금박을 모조리 벗겨내고 있었다.
내가 죽기 전, 첫 번째 삶에서는 레안드로스가 사냥한 고기로 식량을 충당했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여유로울 때나 가능한 법이었다.
고기를 손질하고 훈제를 하든 굽든 한 다음에 말리는 과정이 얼마나 번거로운데.
언제 유릭이 찾아와서 날 동부 구덩이에 처박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린 고기를 만든다?
완전 사치지.
“이래도 괜찮을까요? 벌 받지 않을까요? 정말 괜찮을까요?!”
“내가 공작인데 누가 벌준다고 그래? 선대 공작님?”
“누구든지요!”
“꿈에 나와서 괴롭히는 거면 나한테 말해. 내가 아버지한테 기도라도 올릴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악령을 퇴치하고 싶다는 이야긴가.”
“선대 공작님께 악령이라니요!”
아, 몰라. 몰라. 시끄러워.
나는 한 움큼 벗겨낸 금박을 레안드로스에게 넘겼다.
레안드로스는 그 사이에 차곡차곡 모은 금박을 확인했다.
“이만하면 되겠습니다.”
“충분한가? 여유 자금도 고려해봐.”
“괜찮을 겁니다.”
레안드로스는 내가 복수를 다짐했다고 말했을 때부터 묘하게 협조적이었다.
모르긴 하지만 그 역시 하르트만에 벌어진 일에 마냥 체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아주 분노할 수도 없었던 거겠지.
유릭은 쌩쌩하니 살아 있고, 레안드로스는 공작부인의 당부대로 나를 우선시 해야 했으니.
레안드로스는 잠시 말이 없던 나를 내려다봤다.
“뭔가 석연찮으십니까?”
“……연회홀의 금박을 다 벗긴대도 우리 셋이 외국으로 도망갈 수는 없겠지?”
“성을 팔면 가능할 겁니다.”
“이걸 사줄 사람이 있으면 말이야.”
장담하는데, 제국에서 가장 안 나가는 매물이 바로 하르트만 공작성일 거다.
저주받은 흉가 수준이라고.
레안드로스는 뜯어낸 금박을 잘 갈무리하며 품속에 넣었다.
“날이 밝자마자 다녀오겠습니다.”
“잘 부탁해. 혹시 가다가 강도…… 아니다. 너는 그럴 일 없겠지. 무사히 다녀와.”
주인공은 죽지 않으니까.
레안드로스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나가려다가, 아직도 그로기 상태에 빠져있는 아른트를 불렀다.
“안 나오면 그냥 문 닫는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안 그래도 여기 보수한 지가 오래 되어서 위험하다고요.”
아른트가 허둥지둥 일어나서 문으로 달려왔다.
보수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아른트!”
“네?”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른트가 하필 멈춘 곳이 기둥 옆이었다.
그 위에 기울어져서 달려있던 촛대가 불길한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촛대가 떨어지는 모습이 느리게 보였다.
더 빨리 떠올렸어야 했는데!
소용없을 걸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그 때 내 옆을 스치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쨍!
묵직한 쇳덩이가 바닥에 내리 찍히며 몇 번이고 튕겨나갔다.
그 옆에 아른트가 주저 앉아있었다.
레안드로스가 촛대를 걷어찬 덕분에, 촛대의 경로가 뒤바뀐 것이었다.
아른트는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아, 감, 감사.”
“여기 혼자 올 때는 조심하는 게 좋겠어.”
저기 머리를 찍혔다면 최소한 중상이다.
아른트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안도감보다 먼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가 똑같잖아.
떨어지는 촛대부터 아른트가 피해자라는 것까지 전부 같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느껴졌다.
레안드로스는 아른트를 가볍게 집어 들더니 바로 세워주고 나를 쳐다봤다.
“공작님.”
“……아. 그래. 고마워. 여기 보수하기 전까지는 오면 안 되겠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그냥 놀라서 그래. 꼼짝없이 아른트가 맞을 줄 알았어.”
“다음에 오신다면 촛대부터 떼도록 하겠습니다.”
아른트와 레안드로스가 연회홀을 나섰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고 칭얼거리는 아른트와 그럴 리 없지 않느냐고 응수하는 레안드로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걸 보다가 손바닥에 고인 식은땀을 옷에 닦아냈다.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 * *
레안드로스는 동틀녘에 성을 나서서, 다음날 저녁에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금박 대신 잡다한 꾸러미와 작은 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주머니 안에서는 짤랑거리는 맑은 소리가 났다.
“와, 얼마나 판 거예요?”
“조금 남기고 전부.”
“그런데 이렇게 받았다고요?”
동전을 세던 아른트가 의심의 눈으로 레안드로스를 봤지만, 레안드로스는 아른트를 무시했다,
“명령하신 물건은 얼추 갖추었습니다. 언제쯤 출발하시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찾는 이들의 행적을 좇으려면 마을을 경유하지 않고 바로 가장 가까운 도시로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레안드로스는 지도를 펼쳤다.
눈에 익은 조잡한 중고품 지도였다.
“동부로 가는 길에 도시가 하나 있습니다. 여기로 가면 대략적으로…….”
“다른 도시는?”
“여기가 가장 가깝습니다만.”
“동부는 안 돼.”
단호한 내 말에 레안드로스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수도로 올라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수도로?”
“수도는 정보가 가장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귀족들은 살롱에서, 평민들은 길드에서 소문을 수집하고 현시국을 파악합니다.”
“음.”
“그 뿐만이 아니라, 수도에서는 하급 귀족들이 여러 끈을 기대하고 모이는 장소가 있습니다. 입에 올리기 더러운 소문들이 자주 들리죠.”
“더러운 소문? 대체 거기가 뭐하는 곳인데?”
“주로 거기에서는 술과…….”
아른트가 파드득 일어나 팔을 마구 휘저었다.
“아뇨, 어쨌든 레안드로스 경이 말씀하시는 내용의 요지는 이거잖아요? 그 사람들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정보가 가장 모이는 곳에 가자고!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지방을 빙빙 돌아봤자 안 닿는 소문도 있겠죠. 귀족들은 수도에 가장 많이 머무니까요.”
수도. 수도라.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수도로 가면 유릭과 가까워진다는 사실이 꺼림칙하긴 하지만.
왕성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잠시 소문만 수집하러 가는 거라면 괜찮을지도.
유릭을 떠올리고 나도 모르게 차가워진 손끝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가고 싶은데.”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공작님께서는…….”
“탈 줄 알아.”
“승마를 배우지 못하셨, 네?”
아른트와 레안드로스가 나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는 건데.
“혼자서는 못 타지만 사람 뒤에 탈 줄은 알아.”
“아아.”
“깜짝 놀랐네요. 공작님께서 타실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건 무슨 소리야?”
아른트가 지나치게 안도하자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흘겨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여기서 승마를 따로 배워야 할까봐.
“말을 빌리자. 두 필만.”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경유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작님, 옛날처럼 말을 넘어뜨리시면 안 돼요.”
“안 그랬어!”
대체 아렌하이트는 옛날에 뭘 한 거야?
* * *
성을 떠난 우리는 결국 가장 가까운 마을인 압생트에 들렀다.
마을치고는 꽤 큰 규모. 제법 번화한 시장. 밝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아른트가 작게 감탄했다.
“압생트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네요.”
“소도시로 승격될 정도는 아니지만, 도시령으로 귀속된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어디선가 한 번 들었던 이야기였다.
나는 내 왼편에 우뚝 서 있는 상인길드 압생트 지부 건물을 애써 무시하며 물었다.
“말은 어디서 빌리지?”
“여관에서 말의 판매도 겸할 겁니다.”
여관은 다양한 역할을 하는구나.
우리는 가장 먼저 눈에 띈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온 용무를 듣자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아, 정말 아쉽네요. 어제 찾아오시지! 그랬더라면 원하시는 가격의 말을 보실 수 있었을 텐데요.”
“지금은 뭔가 문제가 있나요?”
“여기를 지나가던 상단이 어젯밤에 말을 몇 마리 사갔어요. 듣기로는 오다가 말이 다쳐서 버리고 올 수 밖에 없었대요. 그래서 지금 남은 말이 거의 없을걸요.”
“그래도 한 번 보여주세요. 저희도 좋은 말을 구하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며 주인에게 요구하자, 주인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도 우리를 마구간으로 안내했다.
우리의 지갑 사정도 사정이라, 그리 좋은 말은 애초에 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말이 없으면 얼마나 없겠냐고, 말 한 마리 정도는 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구간에 들어서자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내 앞에 있는 말은 딱 세 필이었다.
하나는 갈비뼈까지 앙상해서 레안드로스는커녕 내가 올라타도 쓰러질 것 같은 놈.
그 옆은 눈곱이 가득 껴 있고 고개를 들지도 못하면서 서글픈 울음소리를 내는 놈.
마지막 하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무릎을 꿇고 기절한 것처럼 자는 놈.
……제대로 된 놈이 없네?
주인은 나를 살피다가 슬쩍 속삭였다.
“그게, 상단에서 멀쩡한 말은 전부 사가…….”
그럼 그렇다고 말해주셨어야죠!
아픈 말 밖에 없다고 했어야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차에 레안드로스가 주인에게 물었다.
“저기 구석에 있는 말은 뭐지?”
“아, 저기 구석에요.”
어디지?
내가 고개를 돌리자, 비로소 마구간의 가장 끝에 있던 말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온 몸이 새까만 흑마였다.
막 이 순간 다 자란 것처럼 망아지 티와 동시에 늠름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끔 발을 구르며 푸르륵 거리기만 할 뿐 건강해보였다.
여관 주인은 곤란하다는 듯 답했다.
“저 말은 팔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인가?”
“아뇨, 당치도 않죠! 저 말을 사려고 했다가 낙마한 손님이 한 둘이 아니라서요. 고집도 세고, 성질머리도 더럽죠.”
“병에 걸렸나?”
“아뇨. 아주 건강한 놈입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나는 슬쩍 흑마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털도 반질반질한 게 못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도 안 타는 말이면 싸게 살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이리저리 관찰하다가, 말과 눈이 마주쳤다.
“어.”
피처럼 붉은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루비 같기도 하고.
우리는 한참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말에게 물었다.
“……유릭의?”
-푸르르릉.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이게 내가 생각하는 ‘그거’일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찜찜했다.
트라우마 생길 것 같은 저 눈이 유릭과 너무 닮은 데다가, 소설 속에서 유릭 외에 이런 눈을 가진 존재는…….
말은 생각에 잠긴 내게 콧김을 쉭쉭 내뿜더니 주둥이로 내 이마를 푹 밀었다.
아니, 이거 봐라.
“야!”
“세상에. 말이 가까이 온 사람을 물어뜯지 않는 건 처음 봅니다! 손님이 마음에 든 게 아닐까요?”
말과 눈싸움 하는 사이에 옆에 온 주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레안드로스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이 놈은 정말 싸게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말 어디 가서 다시 못 보실 겁니다! 혹시 압니까? 이 말이 혈통도 좋을지!”
“얼마지?”
“은화 다섯 닢이면 어떻습니까?”
아른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싸긴 진짜 싸네요.”
“많이 싼 거야?”
“저기 자는 말은 은화 세 닢하고도 동화 쉰 닢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건강한 말이면 싼 거고, 못 타는 말이면 비싼 거죠.”
“우리가 그만한 돈은 있고?”
“으으음.”
아른트의 머릿속에서 동전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게 다 보였다.
사실 무리하면 사지 못할 가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돈을 다 탕진하는 건 위험했다.
그나마 탈 수 있는 말이 두 필이기는 한데.
“하아아.”
역시 이 방법 밖에 없나.
나 지금 찜찜해. 되게 찜찜하다고.
“아른트.”
“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잠시만.”
“네? 어디 가시게요, 잠시만요!”
나는 터벅터벅 마구간을 나섰다.
이미 한 번 가본 길을 되짚어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히 반시간 후.
마구간에 돌아온 레안드로스와 아른트는 나의 짧아진 머리를 보고 기겁을 했으며, 우리는 무사히 흑마와 꾸벅꾸벅 조는 말을 끌고 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