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33
(32)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아멜리아의 연애사.
부모님이 나서서 손수 숨겨야 할 정도라고?
가설을 몇 개 생각해보자.
첫 번째, 아멜리아가 사랑하는 평민 애인에게 꼬임을 받아 공작저의 비밀을 팔아 먹은 것.
두 번째, 아멜리아가 평민을 가장한 유릭을 사랑해서…… 우욱. 아니다. 이건 패스.
세 번째. 아멜리아가 공작에게 앙심을 품고 공작저의 비밀을 팔아 먹은 것. 하지만 이럴 경우 전대 공작과 아멜리아가 불륜을 저질러야 한다는 조건이 생긴다.
이중에서 가장 현실성이 높은 건 단연코 첫 번째였다.
외부 세력에서 작정하고 침투해 가문을 뒤흔들어 놓는 것.
있을 법한 일이다. 논리적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 외부 세력의 배후는 당연히 유릭이 되겠지.
“레안드로스, 그 소문에 대해서 더 들은 거 없어?”
“하녀들 사이에서도 추측성이 강한 이야기였습니다. 남작부부가 몹시 엄하게 함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이것도 분명하지 않지만, 집사가 수도의 유명한 약사나 의원을 암암리에 수소문하고 있다고도.”
그걸 들은 아른트가 갑자기 딱하는 소리와 손가락을 튕겼다.
“아놀드 영애가 몸이 좋지 않다고 했어요. 하지만 하녀들 사이에서는 애정 문제가 있었고, 남작부부가 수치스러워하고, 또 의원이나 약사가 필요한 거라면…….”
잠시만.
“아놀드 영애는 지금 영지에 있다고.”
“수도에서 남작의 영지까지는 사흘도 넘게 걸려요. 공작님, 저희가 갈 수는 없어요. 간다고 해도 들어갈 수도 없을 거예요.”
시간은 상관 없었지만,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약사나 의원을 매수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위험했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다 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면.
“남작 부부는 전대 공작부인과 공작님의 얼굴을 뵌 적이 있었겠지.”
“그렇습니다.”
“내 얼굴은?”
나는, 정확히 말하면 아렌하이트는 사교계에 데뷔한 적이 없었다.
공작부인을 빼닮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걸 제외한다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편이고.
나는 아른트에게 말했다.
“아른트, 맥주를 구해와. 가능한 많이.”
* * *
며칠 후.
아놀드 남작의 타운하우스에는 편지가 한 장 날아 들었다.
편지의 출처는 공작의 시종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집사님.일전의 환대에 감사드리며, 마침 남작가문에서 보여주신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몇 자 적습니다…….]
아놀드 남작 영애의 쾌유를 진심으로 빌며, 잘 알고 있던 약사를 하나 소개해드리니 몸이 아픈 영애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걸 읽은 집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끈이 떨어진 공작가에서 한참 아래인 남작가에라도 비벼 보려는 모양이지.
하지만, 과거 공작가가 알고 있는 약사라면.
충분히 실력이 있는 약사일지도 모른다.
편지를 손에 든 집사장은 하녀를 불러 몇 가지를 지시했다.
그리고 그 날 늦은 밤,
허름한 마차 한 대가 아놀드 남작의 타운하우스 뒷문에 도착했다.
“자네인가?”
집사는 외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왜소한 체구의 남성을 유심히 관찰했다.
남자는 낡아빠진 망토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푹 숙인 얼굴은 램프의 빛이 닿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다.
집사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공작가의 시종이 당부한 내용 때문이었다.
[그 약사는 어릴 적 화재로 얼굴이 심하게 다쳤기에, 가능한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금세 발작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때면 실력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지요.]지금 약사가 발작하기라도 한다면 몇 시간은 지체될 테고,
그렇게 되면 질책을 듣는 것은 자신이었다.
집사는 딱딱하게 말했다.
“자네가 지금부터 갈 곳은 아놀드 남작 영애께서 계신 곳이다. 남작 부부께서 영애에 대한 애정이 크시고 자네에게 큰 영광을 베풀어 마차로 이동을 명하셨다.”
“…….”
“쓸데없는 말은 삼가고, 마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모든 일은 함구해야 한다. 알겠느냐?”
왜소한 약사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 덜 떨어진 것은 말도 못하나.
집사는 속으로 혀를 차며, 뒤에 서 있던 하인 두 명에게 눈짓을 했다.
“신분도 명확하지 않은 것 같으니라고. 공작가에서 보증한다니 보내지만…….”
“마차가 다 준비 되었습니다, 집사님. 지금 바로 출발시킬까요?”
집사의 말이 이어지려고 할 때 하인이 외쳤다.
그들의 뒤에는 말이 네 필이나 묶인 마차가 있었다,
말의 수에 비해 마차가 작은 걸 봐서, 순전히 속도만 중요시한 마차였다.
“흠. 내가 당부한 내용 잊지 말도록.”
약사는 다시 꾸벅 허리를 숙이고 망토를 질질 끌며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채비를 마친 마부가 마부석에 올라 말채찍을 휘둘렀다.
“이랴!”
-히히히힝!
말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마차는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길 저편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는 집사는 입맛이 씁쓸했다.
수도의 온갖 명의를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는 저딴 얼간이까지 보내야 한다니.
그는 진심으로 아멜리아 아놀드의 쾌유를 빌었다.
그리고 그 시간.
격렬하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는 망토 모자를 벗고 제 머리를 터는 아렌하이트가 있었다.
* * *
“뭐라는 거야, 짜증나게.”
집사의 얼굴도 못 봤지만 일단 떠드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다.
신분제, 정말 적응 안 된다.
나는 그제야 마음 편하게 마차 내부를 둘러봤다.
마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좁았다.
귀족가에서 내준다는 마차길래 얼마나 클까 싶었는데.
잘하면 맞은편 앉는 자리와 무릎이 부딪힐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마차 문에도 남작가 문양은 없었지.’
확실히 비밀스럽게 행동하고 있나 보군.
심각하게 덜컹거리는 마차.
문에 난 작은 창문은 커튼으로 가렸다.
마부와 대화도 할 수 없는 공간.
식사도 이 안에서 해결하라는 듯, 구석에 놓인 음식 보따리.
이 정도면 감지덕지인가.
나는 딱딱한 의자에 기대서 머리를 기댔다.
아른트의 말로는 사흘이 넘는 거리라던데.
이런 감옥 같은 곳인 줄 알았으면 뭐라도 가져오는 건데.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내가 아놀드 남작의 영지 관문을 통과한 건 불과 이틀하고도 한나절 후였다.
아른트의 말을 생각해 보면 엄청난 속도였다.
물론 마부가 한 시도 쉬지 않고 밤낮을 내내 달리기는 했지만.
내가 마차에서 내릴 때 즈음엔 마부도 말들도 녹초가 되어 있었다.
아놀드 남작령.
남작령은 다른 귀족령에 비해 수도와 가까이 있었다.
물론, 이건 소귀족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대귀족일수록 독자적인 권한을 유지하고 중앙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해 왕국령의 가장자리까지 영지가 뻗어 있었다.
아놀드 남작의 저택은 하르트만까진 아니더라도 꽤 으리으리했다.
최신 유행을 따르는 수도 타운하우스와 달리 고풍스러운 맛이 있었다.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쿨.
굽이치는 저택까지의 산책로를 덮은 무성한 나무들.
다만 군사적 용도로는 쓸모가 없어 보였다.
저택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나를 맞이했다.
처음에는 응접실로 갈 줄 알았는데, 하인은 나를 집의 깊숙한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회랑을 지나고,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고.
그러다 보니 빛이 점점 사라졌다.
복도에 크게 난 창문을 가리는 빈도가 점점 많아졌다.
벽에 걸린 액자나 미술품도 사라져 갔다.
그렇게 내가 도착한 곳은 어떤 문 앞이었다.
그 앞에서 남작부부가 서 있었다.
희한한 맞이 방식에 잠시 서 있으려니 남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 약사로군. 하르트만 공작저에서 공작이 앓던 고질병을 고친 적이 있다지.”
아른트 놈.
날 뭘로 만든 거야.
나는 일단 허리를 가능한 깊게 숙이며 굽실거렸다.
남작은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내 딸애인 아멜리아의 방이네. 최선을 다하게. 최선을 다 해서 그 애를 멀쩡하게 돌려놔야 해. 알겠나?”
멀쩡하게?
나는 그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는 남작부부를 멍하니 봤다.
외간 남자가 귀족 영애의 방에 들어가는데도 아무런 경계를 하지 않나?
직접 들어가진 않아도 하인이라도 하나 붙이는 게 정상이 아닌가?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을 가지고 천천히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천천히 문을 밀어젖히자 문짝이 삐걱거렸다.
방 안은 어두침침했다.
램프도 없었고, 창문을 가린 커튼의 귀퉁이를 걷은 게 고작이었다.
방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야릇하고, 비리고, 또 동시에 시큼한 냄새가.
그리고 아멜리아 아놀드.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창가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단지 모슬린 잠옷 한 장만 입고 있었는데 옷은 깨끗하지 않고 얼룩덜룩했다.
흘러내린 어깨는 보는 사람이 무서울 정도로 앙상했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생기 없이 부석거렸다.
손등 위로는 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고, 앙상한 광대뼈가 두드러졌다.
파리한 입술.
혈색 없는 피부.
무엇보다 심한 건 눈이었다.
눈구멍이 푹 파여서 퀭하게 보이는 눈.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눈동자.
의미라고는 없이, 그저 숨을 쉬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것.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다가 한 걸음 내디뎠다.
어쨌든 진찰은 해야 했으니.
그때, 발밑에서 뭔가 바스러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래되어 바싹 마른 죽은 벌레였다.
소름이 끼쳤다.
“……데더릭?”
가냘프고 까슬한 목소리.
내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그 무서운 눈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곧 나에게서 관심을 끄더니 고개를 돌렸다.
한참이나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있던 거리까지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나는 억지로 목소리를 냈다.
“안녕하십니까, 아놀드 영애. 저는 아놀드 남작부부께서 보내신…….”
“나가.”
“영애.”
“아프다고 보낸 거지. 다 알아. 내가 분명히 말했어. 그것만 되찾아 주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잖아.”
“영애, 잠시만 제 말을.”
“나가라고!”
아멜리아가 갑자기 폭발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큰 목소리였다.
“나가! 나가! 내가 나가라고 했잖아, 내가 그것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왜 안 들어줘! 그거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해주지 않는 거야. 내가 다른 걸 바란 적도 없었잖아!!”
고함은 히스테릭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제 어깨를 긁으며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는 제 분에 못 이겨 창문을 주먹으로 마구 두드렸다.
결국에는 주변에 있는 것들을 마구 집어던지면서 제 자리에서 발을 구르다가 얼굴을 긁으며 돌아다녔다.
“나가! 나가! 나가아아아!!”
벽에 제 이마를 찧고 벽에 달린 장식을 부수고, 책이든 화분을 집어 던지고.
제 몸을 피가 날 때까지 박박 긁어 대고.
나중에는 더러운 바닥에 쓰러져서 온 힘이 다한 것처럼 우는 소리를 냈다.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그녀를 보며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멜리아 아놀드는 떠도는 염문설처럼 사생아를 가진 게 아니었다.
그녀는, 뭔가에 중독되어 있었다.